로열 패션의 정수를 찾아서
로열 패션의 완성, 예의와 예술이 담긴 밀리너리의 과거와 현재.

스티븐 존스의 2011 S/S 컬렉션 ‘Chapeau Little Fishes’ 작품.
유럽 왕실의 각종 행사에서 의상과 주얼리만큼 주목받는 아이템이 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지도 모를 이 아이템은 바로 ‘밀리너리(Millinery)’다. 밀리너리는 여성의 모자를 총칭하는 말로, 영국에서는 장식적 요소가 짙은 스타일을 ‘패시네이터(Fascinator)’라 부르기도 한다. 일상에서 흔히 착용하는 캐주얼한 모자와는 다른 개념으로, 레이스·깃털 등 다양한 장식 요소로 완성한 화려한 모자를 의미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용어지만,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밀리너리만을 다루는 디자이너와 전문점이 발달할 정도로 복식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왕실의 공식 복장 규정에도 포함될 만큼 그 상징성과 전통이 깊다. 밀리너리를 가장 자주 착용한 인물로는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꼽을 수 있다. 70여 년의 재위 기간에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 많은 공식 행사와 해외 순방 시 의상에 맞춰 컬러풀한 밀리너리를 착용했으며, 같은 디자인은 두 번 이상 착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 역시 섬세한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탄생한 다양한 밀리너리와 함께 특유의 패셔너블한 스타일을 선보였고, 밀리너리라는 아이템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때는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던 밀리너리가 점차 대중에게 확산되었고, 오늘날 영국에서는 하나의 특별한 복식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다양한 공식 석상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밀리너리를 택하는 이가 많다.
현시점 가장 유명한 밀리너로는 필립 트레이시와 스티븐 존스가 손꼽힌다. 필립 트레이시는 영국을 대표하는 밀리너리 디자이너로, 과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스타일리스트이자 패션 에디터 이저벨라 블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설립할 수 있었다. 2008년 알렉산더 맥퀸의 S/S 컬렉션을 위해 수백 마리의 빨간 나비로 제작한 피스를 선보인 그는 밀리너리가 단순한 기능성 아이템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에도 랄프 로렌, 칼 라거펠트 등 여러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밀리너리를 제작했고, 지난 2011년 윌리엄 왕세손의 결혼식에서는 비어트리스 공주를 비롯한 60여 명의 왕실 여성을 위해 밀리너리를 제작하는 등 전문성과 예술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컬러와 플라워 모티브, 깃털, 레이스 등 다양한 장식을 더한 화려한 디자인부터 독특한 셰이프로 감탄을 자아내는 실험적 디자인까지 상상을 초월한 작품들을 꾸준히 공개하고 있다.
‘모자계 대부’로 불리는 스티븐 존스 또한 영국 출신으로, 1970년대부터 밀리너리업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디올, 스키아파렐리, 장 폴 고티에, 레이 가와쿠보, 톰 브라운 등 세계적 디자이너와 협업해 수많은 컬렉션에 참여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실은 물론 비욘세, 리애나, 레이디 가가, 젠다이아 등 글로벌 스타의 사랑을 받는 밀리너로 자리매김했다. 정형화된 모자의 틀을 깨는 독창적 비율과 볼륨, 기발하면서 모던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프랑스 파리의 패션 박물관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에서 열정과 커리어를 집약한 전시
인체 중 하늘과 가장 맞닿아있는 머리 위 예술 작품, 밀리너리. 소재와 형태에 한계를 두지 않는 자유로운 디자인으로 발전한 밀리너리는 이제 단순히 햇빛을 가리기 위한 액세서리나 격식을 차리기 위한 수단을 넘어 자기표현의 매개로 자리 잡았다. 보는 이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시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밀리너리의 창조적 세계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이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에디터 김유정(yj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