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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본다는 것

ARTNOW

프리즈 서울과 아트 바젤 홍콩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으며 올해 초 홍콩 유즈 프로젝트 스페이스 오브 아트에서 개인전 〈No round〉를 개최한 이진주. 기억과 감정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세밀하게 묘사한 인체와 사물은 유기적으로 관계하며 세계의 풍경을 엮는다. 다가오는 8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는 그녀를 만났다.

이진주 1980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한국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양화의 전통 채색 기법을 현대적으로 응용해 일상에서 마주한 낯설고 기묘한 장면, 대상, 풍경을 섬세하게 재해석해왔다. 2006년을 기점으로 미국, 독일, 네덜란드, 러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송은문화재단, 중국 롱 뮤지엄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업실에서 이진주 작가.

첫 개인전을 선보인 지 어느덧 20년이 되어갑니다. 작품 활동에 뚜렷한 변곡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변곡점은 많이 있었죠. 작가로서 정체성과 고유한 작품 세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첫 개인전을 열면서부터 늘 함께해왔어요. 초기 작업은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구체적 경험이 중심이었는데, 이후에는 일상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확장됐어요. 특히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며 바라본 이 세계의 풍경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는데,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은 주관적이기에 이런 심리적 풍경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작업했어요. 이후 크고 작은 상실과 사회적 사건을 겪으며 블랙 페인팅과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고, 2017년 아라리오갤러리 개인전 〈불분명한 대답〉에서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맥락이 맞물리는 지점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어요.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환경, 정치, 사회 등 세상의 다양한 양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죠. 지금은 부모부터 제자, 자녀까지 여러 세대의 삶을 긴 맥락에서 마주하며,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오래도록 남는 풍경과 상황에 주목하고 있어요.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20 ~29,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45.5×45.5cm, 2024. ©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볼 수 있는 22 ~29,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08.7×81cm, 2024. ©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무대와 이어지는 ‘0막’ 또는 ‘3막’ 같은 제목은 또 다른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 같아요. ‘막’이라는 게 연극의 1막, 2막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의 마디마디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종의 중요한 경계를 짓는 거죠. 회화적으로는 작품에 하얀 막 같은 벽이 등장하는데, 어떤 경계를 짓는 동시에 가로막는 역할도 하고 또 상황적으로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기도 해요. 이 시리즈는 오는 8월 아라리오에서 열리는 개인전에서 1층 전시장의 메인 작품으로 선보일 예정이에요.
이목구비와 표정을 숨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운 포즈를 취한 채 등장합니다. 이런 자세는 어떻게 구상하나요? 기본적으로 인체 그리는 걸 좋아해요. 내면을 향한 에너지, 나아가 인간이 지닌 에너지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다닌 7년 동안 누드 크로키 수업을 계속 참관할 만큼 인체 드로잉을 강도 높게 훈련했어요. 그래서 현실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포즈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편이에요. 또 현대무용이랑 퍼포먼스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독일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작품들도 찾아 보죠. 제가 인체와 그 아름다움에서 오는 감각을 섬세하게 느끼는 편이어서 이런 오묘한 지점을 어떻게 하면 잘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고민합니다.

0막,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37.5×112×4.7cm, 2024. ©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이목구비와 표정을 숨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어려운 포즈를 취한 채 등장합니다. 이런 자세는 어떻게 구상하나요? 기본적으로 인체 그리는 걸 좋아해요. 내면을 향한 에너지, 나아가 인간이 지닌 에너지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다닌 7년 동안 누드 크로키 수업을 계속 참관할 만큼 인체 드로잉을 강도 높게 훈련했어요. 그래서 현실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포즈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편이에요. 또 현대무용이랑 퍼포먼스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독일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피나 바우슈가 안무한 작품들도 찾아 보죠. 제가 인체와 그 아름다움에서 오는 감각을 섬세하게 느끼는 편이어서 이런 오묘한 지점을 어떻게 하면 잘 발견하고 드러낼 수 있을지 지속적으로 고민합니다.
작업에 사용하는 재료 중, 배우자인 이정배 작가가 만든 ‘이정배블랙’이 있죠. 전통 채색 기법의 선명한 발색과 무광의 독특한 질감이 돋보입니다. 제가 아이의 얼굴을 솜털까지 그린 작품이 있는데, 그때 계속 봐온 것을 온 마음을 다해 오래 관찰할 때 비로소 보이는 새로움을 발견하고, 더욱 정교한 시선으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이정배 작가는 그 작품의 어두운 배경이 이야기를 덮는 역할을 한다고 했죠. 마치 더 강한 압력으로 그 배경에 있던 여러 가지 사건을 이야기로서 등장하지 못하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요. 더 강한 어둠일수록 도상들이 함축한 의미가 효과적으로 드러날 것 같았고, 당시 가장 진한 검정 분채 물감으로는 부족해서 이정배 작가가 숱한 실험을 거쳐 이정배블랙을 만들었습니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검은색 물감 중에선 흑도, 즉 순수한 블랙의 채도가 가장 높아요.

비좁은 구성(Detail),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Walnut, Black Mirror Painting, 185×330×177cm, 2021~2023. ©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닿지 않는 땅,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60×400cm, 2024. © Lee Jinju. Courtesy of the Artist and Arario Gallery.

전통적 재료와 기법을 바탕으로 작업하면서도 전통 회화에선 다루지 않던 내용과 소재로 새로운 형식을 만드셨어요. 전통이나 동양화를 고정된 개념으로 생각하진 않았어요. 요즘은 많은 요소가 서구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한국적인 것, 전통적인 무언가를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히는 게 쉽지 않은 환경이잖아요. 유화 작품도 좋아하지만, 작가로서 그 재료의 물성을 다루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어요. 내게 맞는 매체가 동양화였어요. 물을 쓰는 재료라는 점도 체질적으로 잘 맞았고요. 그렇게 편해야 자유롭게 다룰 수 있고,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고유의 지역성이나 역사적 감수성의 예민함에 대해 계속 다루고 확장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해외에서도 전시를 하다 보니 무언가 재발견하게 되는 지점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동양화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전통 산수화나 사군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회화적 양식이 다채롭고 시선이 유연해요. 오히려 영감을 받아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치기 때문에 저는 동양화나 전통을 여러 영향을 받아 변화하며 이어가고 있는 하나의 맥락으로 생각했어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미술도 100년 또는 200년 후엔 우리나라의 또 다른 전통이 되어 있을 거예요.
8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위해 새롭게 구상한 작품이 있는지, 출품작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앞서 언급한 ‘막’ 시리즈가 비중 있게 메인 작품으로 등장하고, 그간 소형 작품으로 많이 보여드린 ‘블랙 페인팅’도 조금 더 과감한 실험을 통해 스케일을 키운 작품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최근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에서 전시한 작품 ‘비좁은 구성’도 함께 선보입니다. 제 작업에서 중요하면서도 다채로운 지점이 한데 어우러진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정희윤(heeyoon114@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아라리오 갤러리, 유즈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