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소리
오래된 숨을 품고 새로운 세계를 울리는 음악가 박지하. 그녀가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피리와 생황으로 만들어내는 소리는 어떤 이름표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전통을 딛고 실험으로 나아가는 박지하의 음악은 언제나 경계 너머를 향한다.
피리, 생황, 양금 같은 전통악기를 손에 쥐고, 익숙함 너머 새로운 소리를 그려온 음악가 박지하. 국악을 전공한 그녀는 듀오 숨[suːm]의 멤버로 활동한 뒤, 2016년 첫 솔로 음반 〈Communion〉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장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박지하는 워멕스(Womex), 클래시컬넥스트(Classical:Next) 쇼케이스 아티스트로 선정되며 해외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영국 바비칸센터 현대음악 프로그램, 독일 몬하임 트리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 초청되어 전통악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최근 모든 생명에 대한 찬사를 담은 새 앨범 〈All Living Things〉를 발표한 그녀를 만나 음악을 처음 시작한 후 지금까지 걸어온 여정을 차분히 되짚었다.
음악은 언제 처음 의미 있게 다가왔나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집에 늘 클래식 FM이 틀어져 있었거든요. 그렇게 자연스레 음악을 들으며 자라다 보니, 작곡가나 제목은 몰라도 멜로디나 구성 같은 게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스며든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게 제 음악의 기반이 된 것 같아요. 노래하는 것도 좋아해서 초등학생 때는 합창부나 성가대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그때 배운 여러 성부의 하모니, 파트가 나뉘어 하나로 모이는 방식, 그런 것이 지금 제가 곡을 만들 때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죠.
국악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처음부터 ‘국악을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어요. 그냥 음악이 좋았고, 우연히 동네에서 본 음악학원 전단지를 보고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 선생님이 예술학교 진학을 추천하셨고, 부모님은 서양음악보다 경쟁이 덜하다고 판단해 국립국악중학교를 권하셨어요. 전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기에 큰 고민 없이 그 길을 택했고, 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국악의 길로 들어서게 됐죠.
국악기 중에서도 피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전공 악기를 정할 때는 좀 특이한 걸 하고 싶었어요. 남들이 잘 안 하는 악기, 뭔가 도전적인 걸요. 여학생들은 보통 가야금이나 해금을 선택했고, 피리는 부는 모습이 예쁘지 않다거나 힘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악기였는데 전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피리를 적을 정도로 뜻이 확고했죠.(웃음)
전통음악 교육을 받다가 창작 음악으로 전환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성실히 다녔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회의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미 정해진 곡을 반복해 연주하면서 감정이 희미해졌달까요. ‘기술적으로 잘 연주하는 게 전부일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연주하는 의미가 점점 퇴색해버린 거죠. 저는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상상이나 이미지가 떠오르는 걸 좋아하는데, 전통음악은 저한테 그런 동기부여가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럼 내가 만들고 싶은 음악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이어졌죠.
그 결심이 숨[suːm] 프로젝트로 이어졌군요. 가야금을 전공한 친구와 함께한 듀오인데, 9년 가까이 활동했죠. 그때는 전통음악과의 연결을 의식해 곡에 산조 느낌의 솔로나 국악적 요소를 넣기도 했어요. 하지만 2016년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그런 경계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장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하고 있어요.

위 영국 세인트 조지스 브리스틀(St George’s Bristol)에서 생황을 연주하는 모습. © Kaylar Studio.
아래 디파인 서울에서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와 협업한 공연 무대. © Define Seoul.
지금 하고 있는 음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단순히 어떤 장르로 묶기보다는 ‘박지하의 음악’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어떤 문화권이나 전통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루트 뮤직이나 월드 뮤직처럼 ‘어디서 왔는가’를 따지기보다는, 지금 내 감각으로 만든 음악이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근 제 음악 스타일은 앰비언트나 미니멀 컨템퍼러리 음악으로 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통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예전엔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을 느꼈어요. 아무래도 국악을 배웠으니까 당연히 그 틀 안에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무대 경험을 쌓고 다양한 작업을 해보면서 점점 생각이 달라졌어요. 피리든 생황이든, 저에겐 그저 가장 익숙한 악기일 뿐이에요. 마치 피아노가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 등 여러 장르에 자유롭게 쓰이는 것처럼 전통악기 역시 반드시 ‘전통’ 안에 머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통을 지키는 이들도 꼭 필요하지만, 저는 개인의 색이 뚜렷한 예술가가 더 많아졌으면 해요. 각자의 방식으로 확장해나가다 보면 누군가는 다시 전통을 탐구하고 싶어질 테니까요. 그런 자연스러운 접근이 전통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무엇인가요? ‘조화롭고 아름다운 소리’요. 곡 전체의 질감과 균형, 그리고 각 소리의 결이 어떻게 어우러질지 세심하게 고민해요. 이미 누군가 해본 방식의 반복은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소리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제가 다루는 악기와 음악 구성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늘 실험하고 있어요.
최근 발표한 정규 앨범 〈All Living Things〉도 그런 감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할까요? 앨범을 구상할 때 ‘땅에 뿌리내리는 생명’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어요.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됐죠. 그래서 앨범명도 ‘All Living Things’로 정하게 됐어요. 트랙 순서도 탄생, 성장, 성숙, 쇠퇴, 죽음에 이르는 하나의 생명주기를 따라 흐르도록 구성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면, 삶의 흐름 안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며, 예전엔 바쁘게만 살던 저도 삶과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에는 그런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싶었어요.
그 앨범에 영향을 준 특별한 경험이 있나요? 2023년에 시어셔 로넌과 폴 메스컬 주연의 영화 〈적(Foe)〉의 음악 작업에 참여했는데, 그 경험이 큰 영향을 줬어요. 영화 〈라이언(Lion)〉으로 아카데미 후보에도 오른 호주 출신 감독 가스 데이비스의 작품인데, 감독은 제 음악에서 땅의 소리 같은 걸 느꼈다며 영화 안에서도 광활한 자연의 소리와 인물 사이의 미묘한 감정을 표현해주길 원했어요. 한국적 요소가 전혀 없는, 오히려 SF적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제 사운드를 쓰고 싶다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감독은 제 음악에서 보편성을 느꼈고, 그 경험을 통해 저는 앞으로 음악을 해나갈 힘을 얻기도 했어요. 또 영화음악이다 보니 곡의 스케일을 키우거나 여러 레이어를 쌓는 작업을 하며 테크닉적으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이전 음반이 악기에서 나는 사운드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전자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훨씬 다양한 소리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어요.

오른쪽 영국 하워드 어셈블리 룸(Howard Assembly Room)에서 열린 박지하의 공연 장면.
왼쪽 영국 카페 오토에서 열린 공연 중 피리를 연주하는 박지하의 모습. © Sam Watson.
영화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와 꾸준히 협업해왔죠. 작년 디파인 서울에서 스위스의 디자인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와 협업해 특별 전시를 열었어요. 얇은 금속 물질을 겹겹이 연결한 인위적 공간에서 각각의 스트링이 생성해내는 진동과 제 음악을 함께 녹여냈고, 연주 무대도 선보였죠. 또 기억에 남는 협업 중 하나는 영국 BBC 라디오 프로그램 〈레이트 정크션(Late Junction)〉에서 로이 클레어 포터와 함께한 즉흥 퍼포먼스예요. 그는 글을 쓰고 낭독 퍼포먼스를 하는 아티스트인데 그날 현장에서 직접 쓴 글을 낭독하고, 저는 그의 목소리나 딕션을 하나의 소리로 받아들여 즉흥적으로 맞춰갔어요. 텍스트와 목소리를 하나의 사운드처럼 사용하는 작업은 저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해외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계시죠. 한국과 다른 점이 있을까요? 2017년에 세계 최대 규모의 월드 뮤직 마켓 워멕스와 클래식 및 예술 음악 전문 국제 네트워킹 포럼 클래시컬넥스트에서 공식 쇼케이스 아티스트로 선정된 후 독일 레이블 글리터비트 레코드(Glitterbeat Records)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활동을 시작했어요. 국내에서 음반을 내도 월드 릴리즈가 되긴 하지만, 유럽 레이블을 기반으로 해외시장에서 음반을 발매하는 건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해외에선 장르나 악기보다는 음악 그 자체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앨범 리뷰 중에 “뿌연 안개 낀 서울에서 브라이언 이노와 일본의 다카다 미도리가 만났다면 이런 음악이 나왔을 것 같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굉장히 디테일하고 감각적인 해석이었어요. 국내에선 아직도 제 출신이나 국악 배경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아 그런 부분은 조금 아쉽기도 해요.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실험적 작업이 있을까요? 최근엔 제 음악을 오케스트라처럼 더 확장된 편성으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까지는 혼자 여러 악기의 소리를 만들어 레이어링하는 방식이었다면, 그걸 실제 연주자들과 나누고, 새로운 편곡으로 공연하거나 녹음해보는 거죠. 음악적으로도 또 다른 가능성을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 가장 가까운 계획은 5월, 일본 도쿄에서 ‘모드(Mode)’라는 공연을 해요. 런던과 도쿄를 기반으로 한 이 프로그램은 도시의 경계에 위치한 장소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 공간을 배경으로 건축적 특성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반영해 실험 음악과 오디오 비주얼 공연을 선보이는데, 제 음악이 그 맥락 안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저도 무척 기대돼요. 가을엔 유럽 투어를 준비하고 있어요. 구체적 일정은 아직 조율 중이지만,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어요.
에디터 조인정(ijcho@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