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사랑 하나로
연남동 예술 공간 챕터투, 예술 책방 스프링플레어를 설립해 젊은 작가들의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는 의료 기기 전문 기업 케이씨피메드 최춘섭 회장. 그가 가족처럼 사랑한다는, 그 사랑에 이유가 없다는 배윤환 작가와 만나 나눈 대담.

왼쪽부터 최춘섭 회장, 배윤환 작가.
최춘섭 컬렉터 벌써 챕터투를 설립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네요. 막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때도 의욕적으로 시작한 이 공간의 의미를 알릴 기회가 있었지요. 미술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공부와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이를 바탕으로 기업의 사회 환원 측면을 고려해 챕터투를 설립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오늘 배윤환 작가와 함께 특별한 대화를 하게 되어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배윤환 작가 오늘 오랜만에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작가로서 컬렉터와 긴밀하고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지내긴 쉽지 않지만, 최 회장님과의 관계는 정말 특별한 것 같습니다. 특히 슬럼프가 왔을 때나 좋을 때나 한결같이 응원해주신다는 점에서 항상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미술을, 또 한 작가를 꾸준히 사랑하실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최춘섭 원래 DNA에 각인돼 있나 봐요. 그리고 한번 마음먹으면 뭐든 끝까지 하는 성격이에요. 2001년쯤 학교에서 미술을 배워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홍익대학교 최고위과정을 등록했습니다. 3개월간 수강했는데, 이상하게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번만 더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다시 등록하고, 또다시 등록하고, 그렇게 여러 번 수강했더니 총장님이 평생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생증을 끊어주더군요. 아마 최초였을 겁니다. 그때 내 나이 일흔이 넘었어요. 늦은 나이였지만 그만큼 진심을 담아 공부했어요. 챕터투를 시작하려 할 때는 주변 사람들 모두 같은 공부를 하도록 권유했어요. 그래야 내가 이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같은 마음으로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배윤환 회장님을 마주하면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칼 같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작가의 작품을 마주할 때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최춘섭 사실 작품을 볼 때 사람마다 느끼는 게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 역시 1차적으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할 뿐만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스스로 갖추고자 노력하죠. 지금까지 챕터투 레지던시를 거쳐간 작가가 24명이고,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100여 명에 달합니다. 매체로 보면 회화,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디자인 등 어느 하나에 머무르지 않았죠. 나는 작가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주목하고 귀 기울이는 편입니다. 작품은 보는 날마다 감상이 달라요. 어느 날엔 비평적 시각으로 보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엔 열렬히 응원만 하고 싶을 때도 있죠. 문득 작업실에 펼쳐진 작품을 보고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도 있어요. 감상을 말로 옮기긴 힘들어요. 그냥 사랑하니까, 사랑할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요. 다만 배윤환 작가의 작품은 읽히는 게 많아요. 즉흥적이면서도 계획적이죠. 머릿속에서 논리와 감성이 서로 뒤엉키는 대화를 하다가 결국 이미지와 내러티브가 구조화돼 하나의 장면으로 안착하는 듯합니다.
배윤환 저는 작업에서 유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유머는 일종의 긴장 상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그릴 때 제가 그 현장에 없다는 안도감, 괴수가 무언가를 잡아먹는 장면을 그릴 때 그 대상이 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거죠. 그래서 작품은 반대로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 저는 겹겹이 코드를 심어요. 1차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레이어를 통해 한 번씩 비틀어가며 제 나름의 유머, 유희를 만드는 거죠.
최춘섭 이해가 되네요. 2016년 서울시립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신기하게 계속 눈길이 갔어요. 우연히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간 방에서 본 그림이 참 재기 발랄했던 기억이 납니다. 상상 속에서 뛰어나온 각양각색의 생명체와 군상이 수십, 수백 장의 이미지로 펼쳐졌죠. 특히 스토리 전개가 뇌리에 각인되었습니다.
배윤환 저도 그날을 기억합니다. 이야기는 흘러가지만, 화면은 멈춰 있으니까 치밀한 구성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즉흥적 요소도 개입하게 되죠. 예를 들면 갑자기 본능적으로 전화기를 넣고 싶어서 오른쪽 귀퉁이에 그렸는데, 알고 보니 이 전화기가 제가 전에 그린 작품과 연결된 것이라든지, 혹은 제가 어떤 소통 문제를 겪고 있다든지 하는 즉흥성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저도 제 그림을 관찰해요. ‘내가 이걸 왜 그리고 싶었을까?’ 끊임없이 탐정이 되어 추리합니다. 사실 작업 방식은 조금씩 변화하는 것 같아요. 변했다가 한 바퀴 돌아 다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근에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어요. 회화, 영상을 비롯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 같았는데 사실 같은 구역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영역이 조금씩 확장될 뿐이었던 거죠. 매체로 따지면 회화 안에서 색을 과장되게 쓸 때도 있고, 정적으로 쓸 때도 있었던 겁니다.
최춘섭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를 보면 문학을 업으로 삼고자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통해 의도적으로 삶을 통찰하고 인간의 내면을 탐험하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의 삶의 태도는 종종 우리에게 화두를 던집니다. 어떤 작업을 하든 작가는 정말 책임감을 느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힘들겠지만요.
배윤환 맞습니다. 미술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만큼 고통스럽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시대의 예술가는 진정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시각예술인으로서 결국 저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품도 그 자체로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작업하는 작가도 있겠지만요. 단지 그게 제가 걸어갈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춘섭 예술은 사람들을 모이게도 하죠. 지적으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물이나 현상을 비언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성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정진하기를 바랍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 갤러리바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