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빛을 현재로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 티파니, 불가리가 선보이는 지속 가능한 럭셔리의 새로운 패러다임. 지금의 기술과 감각으로 새롭게 태어난 브랜드의 유산을 통해 하이 주얼리는 유행보다 오래 살아남는 예술이 된다.
까르띠에, 뚜띠 프루티 스타일
20세기 초반 자크 까르띠에의 인도 여행은 주얼리 역사에 선명하고 화려한 빛을 선사했다. 무굴제국의 보석 세공 유산에 유럽의 아르데코 미감을 더한 뚜띠 프루티(Tutti Frutti) 스타일은 정교하게 세공한 화려한 원색 스톤으로 자연의 꽃과 열매를 형상화하며 장식 예술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특히 1936년 사교계의 아이콘 데이지 펠로즈(Daisy Fellowes)를 위해 제작한 ‘콜리에 힌두(Collier Hindou)’는 뚜띠 프루티의 정수를 담은 대표작으로 남았다.
2025년 까르띠에는 뚜띠 프루티라는 유산에 현대적 생명을 불어넣었다. 뚜띠 프루티 하이 주얼리 브레이슬릿과 네크리스 디자인은 1920~1930년대 까르띠에 아카이브 주얼리에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에메랄드와 루비, 사파이어를 각각 열매와 잎, 꽃봉오리 형태로 세공한 네크리스는 20세기 초반 뚜띠 프루티 스타일의 정수인 콜리에 힌두의 디자인을 계승하며, 브레이슬릿은 1925년 린다 리 포터(Linda Lee Porter)가 까르띠에 파리에서 구매한 컬러풀한 브레이슬릿의 오벌 링크와 오닉스 디테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까르띠에는 뚜띠 프루티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와 브레이슬릿을 비롯한 주얼리에 RJC(Responsible Jewellery Council) 인증 기준에 따라 윤리적으로 채굴한 젬스톤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며, 세공 또한 수작업과 디지털 프로세스를 조화롭게 결합한다. 다중 세그먼트 구조로 설계한 네크리스와 브레이슬릿 모두 일부를 분리해 브로치로 연출할 수도 있다. 한 세기 전 보수적 미감에 도전장을 던진 까르띠에의 뚜띠 프루티 스타일은 오늘날 까르띠에의 역사와 철학을 대표하는 상징적 하이 주얼리로 재탄생했다.
반클리프 아펠, 헤리티지 컬렉션
반클리프 아펠에 헤리티지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미감과 기술, 정신을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작한 메종의 빈티지 피스를 오늘날 애호가들이 구매해 착용할 수 있도록 검증 및 복원을 거치는 헤리티지 컬렉션은 반클리프 아펠의 철학을 선언적으로 드러내는 프로젝트다.
올해 4월, 반클리프 아펠은 세계 3대 아트 페어 중 하나로 꼽히는 TEFAF 마스트리흐트를 통해 30점에 달하는 헤리티지 컬렉션 작품을 선보였다. 그중 네크리스(1955)는 플래티넘 소재에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정교하게 세팅한 고전적 구조에 7개의 튀르쿠아즈 카보숑과 다이아몬드 화환을 번갈아 배치했다. 당대에 유행한 각면 처리가 아니라, 부드러운 곡면으로 마감한 블루 스톤이 생동감 넘치는 현대적 감각을 전한다. 마거리트 클립(1964)은 플라워 모티브의 입체적 해석이 인상적이다. 골드와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를 조합한 이 빈티지 피스는 마치 잔잔한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꽃잎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미니멀한 뱅글 형태의 오르세 브레이슬릿(1994)은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로 표현한 모던한 격자 구조와 메종의 유산인 미스터리 세팅 기법으로 장식한 루비의 강렬한 붉은빛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는 작품.
반클리프 아펠 헤리티지 컬렉션의 모든 주얼리는 메종이 직접 아카이브를 통해 진위 여부를 확인한 후 워크숍 장인들의 철저한 복원 작업을 거친다. 기술력뿐 아니라 역사적 감수성, 고유한 철학이 모두 필요한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세월을 견디는 것뿐 아니라, 다른 시공간에서 새로운 맥락과 가치를 더하는 하이 주얼리의 매력과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티파니, 블루 북 컬렉션 ‘티파니 씨 오브 원더’
티파니는 1845년 미국 최초의 주얼리 카탈로그 〈블루 북(Blue Book)〉을 발행하며 브랜드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러한 전통은 자사의 아카이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하이 주얼리 컬렉션으로 진화했다. 티파니가 매년 새롭게 내놓는 블루 북 컬렉션은 디자인 유산과 기술력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구현하는 브랜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블루 북 컬렉션의 테마는 ‘씨 오브 원더(Sea of Wonder)’, 즉 바다의 경이로움이다. 매혹적이며 신비로운 바다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 컬렉션은 20세기 중반 티파니 아카이브에서 발굴한 쟌 슐럼버제의 주얼리 디자인과 스케치를 구상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초현실적 여정으로 표현한 것. 수중에서 빛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반짝임과 해양 생물에 반사되는 빛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은 감각적 컬러 팔레트를 통해 깊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블루 북 컬렉션 ‘티파니 씨 오브 원더’는 봄, 여름, 가을 세 차례에 걸쳐 선보이며, 최근 공개한 봄 컬렉션은 수중 정원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해양 식물의 세계를 표현했다. 대표적 피스 ‘해양 식물(Ocean Flora)’은 깊고 생동감 넘치는 녹색을 품은 잠비아산 에메랄드가 마치 다이아몬드 정원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표현했고, ‘해마(Sea Horse)’는 쟌 슐럼버제가 1968년에 선보인 아이코닉 브로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문스톤과 지르콘, 사파이어 등 다양한 유색 스톤의 절묘한 대비가 풍부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성게(Urchin)’의 복잡한 형태를 구현한 19세기 파요네 에나멜링(paillonné enameling) 기법 역시 쟌 슐럼버제가 티파니에 남긴 유산이다. 티파니 씨 오브 원더 컬렉션에서 쟌 슐럼버제의 유산은 회고적 인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 움직이는 창작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불가리, 세르펜티 컬렉션 & 투보가스 기법
뱀이라는 상징을 통해 끊임없는 재생과 변화를 표현하는 세르펜티(Serpenti) 컬렉션의 시작은 1940년대 후반 불가리가 선보인 스네이크 브레이슬릿 워치다. 독창적인 투보가스(tubogas) 기법으로 완성한 유연한 메탈 브레이슬릿과 뱀 머리를 본뜬 시계 케이스 형태는 시대를 초월한 관능적 아름다움과 탁월한 기능성을 동시에 담아냈다.
올해 불가리는 전통적 투보가스 기법을 현대적 감각으로 정제한 불가리 투보가스 워치를 새롭게 선보였다. 오리지널 스네이크 브레이슬릿 워치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가볍고 섬세한 플래티넘, 로즈 골드 소재의 조합과 진화한 연결부 설계를 통해 보다 현대적인 착용감을 구현해냈다. 손목에 부드럽게 감기는 더블 랩 브레이슬릿은 뱀의 유연한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불가리 로고를 각인한 라운드 케이스는 고전적 형식미를 구현한 것. 함께 출시한 세르펜티 링도 브랜드의 아카이브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한 ‘세르펜티 헤리티지 링’에서 뱀의 비늘을 형상화한 입체적 구조와 곡선을 고스란히 가져온 것. 과거의 감각적 디자인을 베이스로 로즈 골드 소재에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해 화려함을 더했다.
불가리 투보가스 워치와 세르펜티 링은 불가리가 자사를 대표하는 아카이브 피스의 구조와 조형, 철학을 재해석해 정교하게 계승한 결과물이다. 투보가스 기법과 특유의 볼륨감, 상징적 메탈 광택 등 지난 세기에 구축한 디자인 코드를 유지하면서도 오늘의 기술과 감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착용성과 소재의 다양성, 조형의 정밀도를 높였다. 과거의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미래적 스타일을 창조하는 하이 주얼리는 자연스럽게 세르펜티 컬렉션의 모티브인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뱀의 생명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 형상은 반복되지만 시대마다 새로운 감각으로 진화하는 것, 세르펜티 컬렉션과 투보가스 기법을 통해 드러나는 불가리의 정체성이 아닐까.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