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을 엮는 이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놀라운 환기를 일으키는 존재다. 클래식 음악이 캐비닛 속 악보의 먼지를 털어 리바이벌되는 관습이 아닌, 이 시간에도 끊임없이 창작되며 진화하는 장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 등 세계적 악단을 위해 끊임없이 곡을 짓는 작곡가 신동훈도 마찬가지다.

고백하건대,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프로그램 리스트에서 불혹을 갓 넘긴 젊은 한국인 작곡가의 이름을 만나는 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지난 1월, 베를린 필이 콘서트홀에서 세계 최초로 연주한 비올라 협주곡 ‘실낱 태양들(Threadsuns)’을 작곡한 신동훈 이야기다.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던 시절 서울시립교향악단의 현대음악 프로그램 ‘아르스 노바’를 통해 진은숙을 사사한 그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 베를린 필을 비롯한 세계적 악단과 음악가가 곡을 위촉하는 ‘가장 촉망받는 현대 작곡가’ 대열에 올랐다. 오는 11월에는 런던 심포니,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함께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도 선보인다. 5월 말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 김선욱과 함께 ‘실낱 태양들’ 아시아 초연을 위해 내한한 그를 만났다.
지난 1월 베를린 필과 비올라 협주곡 ‘실낱 태양들’을 초연했어요. 이처럼 세계적 무대에 오르기까지 여정을 간략하게 들려줄 수 있나요? 운이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베를린 필 산하의 카라얀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에서 체임버 오케스트라곡 커미션을 받았어요. 아르스 노바를 통해 만난 스승 페테르 외트뵈시가 곡을 위촉했고, 2019년 초연 때 직접 지휘를 맡아주셨죠. 그 곡의 반응이 좋아 두 번째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카라얀 아카데미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베를린 필과 카라얀 아카데미 조인트 오케스트라가 제 첼로 협주곡 ‘밤의 귀의‘를 초연했죠. 사실 이 무대는 비올라 협주곡의 초석이 되었어요. 당시 비올라 협주곡에 대한 밑그림이 있었는데 베를린 필 측에서 첼로 협주곡의 반응을 보고 연주를 결정하겠다고 했고, 공연 이후 정식으로 곡을 위촉받았거든요.
현재 위촉받은 곡이 상당히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곡을 쓰고 있나요? 피아니스트 조성진에게 헌정하는 ‘피아노 콘체르토’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 콘체르토를 쓸 때 연주자들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3년 전쯤 런던 바비컨 센터에서 리사이틀을 치렀는데, 그때 사실 가장 인상 깊었던 해석이 로베르트 슈만의 ‘심포닉 에튀드’였어요. 제가 피아노 작곡가로서 슈만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조성진 피아니스트에게도 잘 맞을 것 같아 ‘슈만’이 가졌던 두 개의 올터 에고, 즉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플로레스탄’과 사색적이고 평화로운 ‘에우세비우스’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을 써보자고 생각했죠. 조성진 피아니스트에게도 그런 면이 있고, 인간의 충돌하는 자아, 양면성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이번에 한국에서 아시아 초연한 ‘실낱 태양들’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작곡가로서 제 버킷리스트 중 ‘D♭장조(내림라장조) 아다지오’ 곡을 써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어요. 내림라장조로 가장 유명한 곡을 꼽자면, 구스타프 말러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이 있죠. 조성은 그 자체가 지닌 특성이 있는데, 내림라장조는 뭔가 슬픈데 입을 가리고 우는 느낌이에요. ‘실낱 태양들’은 말러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중요한 두 개의 삼화음, D♭ 장조와 A 장조를 음악적 주재료로 삼아, 조성적 비조성적인 화성적 실험을 한 음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타계한 제 스승 페테르 외트뵈시를 추모하는 의미도 있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농담처럼 “내 진짜 꿈은 ‘조성 아다지오’를 쓰고 죽는 거야. 하지만 그만큼 용감하지 못했어”라고 하셨거든요.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음악을 치열하게 하셨던 분의 말씀이라 정말 충격이었죠. 저는 새로운 세대인 데다 충분히 용감하지 않나 싶어 쓴 곡입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곡이에요.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 전통에서 작업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어요. 일반 대중은 대부분 현대음악을 난해하게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이런 관점이 신선해 보입니다. 현대 작곡가로서는 음악이 변화하면서 ‘표현의 팔레트’가 한층 넓어졌어요. 작곡가들이 쓸 수 있는 도구가 훨씬 많아진 거죠. 그 툴로 뭘 만드느냐는 전적으로 작곡가들의 선택이에요.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건 ‘감정이 응축된(emotional charge)’ 음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굉장히 센티멘털한 사람이기도 하고, 전통적 툴을 쓰면서도 충분히 새로운 걸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첼로 협주곡, 비올라 협주곡, 생황과 아코디언을 위한 이중 협주곡, 그리고 올해 말에 발표할 피아노 협주곡까지 거의 모든 악기를 아우르는 협주곡을 작업했는데요. 어떤 악기에 가장 친밀감을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곡을 쓸 때는 피아노를 가장 많이 이용하고, 더 잘 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그 악기를 잘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곡을 쓰는 건 아니에요. 이를테면, 그 악기를 모르는 사람이 곡을 썼을 때 나오는 퀄리티가 있어요. 연주자들이 생각지 못한 것을 만들어내는데, 그런 면에서 악기를 잘 안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합니다.
윌리엄 예이츠의 시구에서 따온 ‘그의 유령 같은 고독 위에서’,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 제목을 딴 ‘밤의 귀의’처럼 곡 제목이 매우 문학적입니다. 창작 과정에서 문학적 영감은 어떻게 작용하나요? 곡을 쓸 때 그 곡의 ‘동행(companion)’이 될 수 있는 책을 심사숙고해 고르곤 합니다. 요즘은 예전에 읽은 고전문학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비올라 협주곡을 쓸 때는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를 다시 읽었는데, 원서로 보니 새삼 아름다워서 충격적이었어요. 요즘은 피아노 콘체르토를 쓰면서 토마스 만의 <닥터 파우스트>를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감은 어디까지나 영감입니다. 음악을 한다는 건 음과 리듬과 소리를 다루는 것이기에 문학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르죠.
앞으로 더 도전해보고 싶은, 또는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피아노 콘체르토 작업이 끝나면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선보일 예정이고, 이후에는 작은 오케스트라곡을 쓰기로 했어요. 2030년 하반기에는 오페라 작품을 하나 올리기로 했고요. 다음엔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토를 하게 될 것 같아요. 언젠가는 제 ‘교향곡 1번’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구시대적 유물 같은 포맷이라 ‘과연 해도 될까?’ 하는 갈등이 있지만, 언젠가 도전해볼 의향은 있습니다.(웃음)
에디터 박지혜(프리랜서)
사진 김제원
장소 협조 경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