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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가려진 여성

ARTNOW

누군가에겐 여전히 불편하게 다가가면서도, 동시에 여성 작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조건처럼 여겨지는 ‘페미니즘’. 그러나 ‘젠더’로서 여성이 아니라 ‘주체’로서 여성이라는 점이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앤 콜리어(Anne Collier), Crying, 크로모제닉 프린트, 99.1×134cm, 2005

2015년은 대한민국 사회에 ‘된장녀’가 등장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페미니스트가 싫다”며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 모 군이 미디어에 등장한 이후 한 팝 칼럼니스트는 IS보다 페미니즘이 위험하다는 글을 남겼고, 각종 온라인에서는 페미니즘과 여성 혐오를 주요 이슈로 다루었다. 서울시는 ‘성평등도서관’을 개관했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의 1세대 페미니즘 작가 윤석남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9월에는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시아(East Asia Feminism: FANTasia>전을 통해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여성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최근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적 가치로 변모하고있는 페미니즘의 현재를 조명하는 국제 기획전을 개최했다.
11월 막을 내린 <판타시아>전에 참여한 14명의 작가는 장르, 매체, 양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방식으로 오늘날의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했다. 20세기 서구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작가들의 활동과 작품은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물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의 페미니즘은 과거 성 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사회정의와 휴머니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판타시아>전에서는 이러한 변화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런 변화는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여성 현대미술 작가들의 많은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이슈화하고 억압된 사회에서 여성의 현실에 주목하는 제도 비판적 주제의식은 오늘날 페미니즘 작가뿐 아니라 많은 여성 작가가 다루고 있는 주제다. 과거에는 ‘여성’ 작가임을 강조한 까닭에 그의 배경과 젠더 자체가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에 많은 비평이 따랐다. 주류 미술계에서 남성 작가와 동등한 대우를 받기도 힘들었다. 그 때문에 주요 미술관 회고전의 주인공은 남성 작가가 대부분이었고, 소장품 비율 역시 남자 작가가 월등히 높았다.
여전히 차별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차별에 반발하고 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는 움직임을 통해 여성에 대한 이슈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게릴라 걸스(Guerrilla Girls)는 1980년대 뉴욕을 시작으로 등장한 여성주의 행동주의자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익명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드러나지않는 차별을 가시화하고 각종 통계 등을 이용한 포스터와 출판물, 퍼포먼스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구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은 “여성이 Met에 들어가기 위해선 알몸이 되어야만 하는가”, “현대미술 섹션에는 여성 미술가가 5%도 안 되지만 85%의 누드화는 여성이다” 등의 사실을 강조하며 1980년대 후반 뉴욕 대형 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계에 팽배한 서구·부계 중심적 시각을 꼬집고 각종 통계와 유머를 인용한 페미니즘 이슈를 통해 비주류 예술가(여성, 성 소수자, 유색인종)의 힘든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경우도 1세대, 2세대 페미니스트 작가는 수많은 편견과 그들의 젠더, 즉 남성을 보필하며 한 가정의 살림을 책임지는 ‘여성’의 역할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통념 탓에 가정을 꾸린 후 작업을 중단하거나 가정생활과 작품 활동을 양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는 다른 직업과 비교해 예술을 통한 재화 가치 생산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창작 활동을 위한 고민과 노력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여성의 삶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20세기 중·후반의 페미니즘 경향은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과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에 기반을 둔 자전적 작품이 주를 이뤘다. 당시 선보인 작품들은 미술계뿐 아니라 관람객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고, 오늘날 페미니즘 미술을 떠올릴 때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가 되었다.
본질주의와 해체주의에 기반을 둔 과거의 페미니즘이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포스트-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같은 오늘날의 여성 미술에 대한 대규모 기획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미술계 역시 이에 걸맞은 젊은 여성 작가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을 보여주는 정금형, 장파 같은 신진 작가는 여성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적극적인 전환을 꾀했고, 더 이상 페미니즘의 주제가 여성의 경험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싱가포르 출신 작가 밍 웡(Ming Wong)은 남성 작가인 본인을 대상화해 타자인 여성으로 치환하고 이를 기록하면서 고정적 젠더의 틀을 깨는 일련의 퍼포먼스·영상·사진 작품 등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을 반영해 보다 다각적인 관점을 제시하자는 취지로 <판타시아>전 연계 프로그램인 ‘에디터톤(Edit-a-thon)’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키미디어(Wikimedia) 재단은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여성 관련 콘텐츠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인식에 따라 ‘에디터의 마라톤’, 에디터톤(Edit-a-thon)을 통해 다양한 주제의 문서 생산과 함께 여성의 참여를 독려해왔다. 이에 미술계에서는 지난해에 ‘아트 앤 페미니즘(Art+Feminism)’ 캠페인을 통해 여성과 예술을 주제로 한 에디터톤 행사를 진행했고, 올해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에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주와 유럽 등지의 미술관과 대학교, 도서관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70여 개의 에디터톤을 통해 900여 개의 예술과 페미니즘 관련 문서를 생성하고 수정했다. 해당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위키피디아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문서를 단시간에 생산하는 에디터톤은 다양한 분야의 여성 인물은 물론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문서를 빠른 속도로 생성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그 취지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반영한 적절한 시도라고 판단, 에디터톤을 진행했다. 그 결과 하루 동안 ‘여성’, ‘아시아’, ‘예술’과 관련한 위키피디아 항목이 42개나 신규 등록되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2015년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향적 사고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를 확장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적 움직임이 눈에 띈 한 해였다. 미술계 역시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여성 작가의 다양한 관점과 작품을 통해 오늘의 여성 미술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냈고, 시대에 맞는 쟁점을 부각시켜나가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경험하며 살아가지만, 우리가 믿고 있던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할 때 좀 더 균형 잡힌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다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해진 현대미술계에서 여성 작가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형성되고 내일의 현대미술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홍이지(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