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조용한 쇼맨
‘얼굴 없는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가 구현한 익명의 패션 철학.
‘얼굴 없는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다. 디자이너의 스타성과 명성이 곧 컬렉션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자주 볼 수 있기에,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마르지엘라는 런웨이가 끝난 후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관객에게 인사하지 않는 것은 물론, 공식 행사에서 인터뷰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독특한 행보에는 디자이너는 오롯이 자신의 디자인만으로 주목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담겨 있다. 유명해지는 것을 거부한 채 익명성을 유지하며 활동하는 그 특징은 메종 마르지엘라의 라벨에서도 나타난다. 눈에 띄는 로고를 사용하는 대신 브랜드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일련의 숫자를 나열해 특유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것. 네 모퉁이에 흰색 스티치로 고정된 라벨은 숫자 0부터 23까지 있으며, 해당하는 숫자에 동그라미로 표시해 각 컬렉션과 라인을 표기한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로 드리스 반 노튼, 월터 반 비렌동크 등 ‘앤트워프 식스(Antwerp Six)’ 여섯 명과 함께 1980년대 아방가르드 패션을 이끌기도 했다. 20세기 말,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고조되던 시기에 이성적·합리적 사고에 반기를 든 ‘해체주의’가 패션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옷의 솔기와 시침선을 그대로 노출하고, 의복의 구조를 분해한 뒤 다시 조합해 새로운 실루엣을 탄생시키는 마르지엘라의 독특한 디자인은 해체주의 패션의 대표 사례로 주목받았다. 그는 졸업 후 1984년 장 폴 고티에 하우스에서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를 거쳐 1988년 동업자 제니 메이렌스와 함께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를 설립했다. 고정관념을 깨고 획기적이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컬렉션을 선보인 것이다.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이래로 매 시즌 다양한 소재와 컬러를 통해 출시하는 타비 슈즈.
첫 컬렉션인 1989 S/S 시즌에는 모델들이 마스크를 쓰고 등장해 관객의 시선이 의상에 집중되도록 연출했다. 또 흰색 천 위를 워킹하는 모델들의 빨간 발자국을 남기도록 의도했는데, 이는 발가락이 갈라진 독특한 형태로 현재 메종 마르지엘라의 시그너처 아이템 ‘타비(Tabi)’ 슈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타비 슈즈는 일본 전통 나막신인 게다를 착용하기 위해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이 분리된 양말 타비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처음 발표할 당시에는 생소한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이후 다양한 스타일과 소재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지금은 하우스를 대표하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마르지엘라는 오래된 의상이나 원단을 재활용하고 재구성하는 개념을 통해 패션계에 지속가능성을 접목했다. 기존 아이템을 리사이클링해 재탄생시키는 과정을 거쳐 환경적 측면을 고려하는 동시에 개성과 미적 감각을 완연하게 보여주는 컬렉션을 공개했다. 이후 마르지엘라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여성 컬렉션을 함께 디자인했는데, 파격의 아이콘이던 그가 클래식한 프랑스 브랜드의 디렉터가 된 것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면서 유연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에르메스 하우스의 전통을 이어갔다. 20여 년간 전통적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컬렉션을 공개해온 마틴 마르지엘라는 2009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메종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쇼를 마지막으로 패션계를 떠났으며, 마르지엘라 디자인팀이 이후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부재가 이어지던 2014년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 수장으로 임명됐다는 파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2015 S/S 시즌을 시작으로 정교한 테일러링과 드레스메이킹에 초점을 맞춘 독창적 디자인을 선보였으며, 메종 마르지엘라의 정체성을 새로운 언어로 풀어나갔다. 2024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쇼’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화제를 모아 하우스의 대중화를 이끌어냈고, 재도약에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은퇴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마르지엘라에 대한 궁금증이 이어지던 2019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In His Own Words)>라는 다큐멘터리와 함께 등장했다. 이 외에도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시각예술 아티스트로서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2022년 한국에서도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하며 50여 점의 작품과 함께 예술성을 드러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마틴 마르지엘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유명해졌고, 수수께끼 같은 그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었다. 그리고 오는 7월 메종 마르지엘라의 또 다른 챕터가 시작된다. 지난 1월 글렌 마틴스가 메종 마르지엘라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 것. 오는 7월 2025 F/W 파리 오트 쿠튀르 주간을 통해 첫 컬렉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Y 프로젝트와 디젤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우스의 창의적 가치를 새롭게 구현할 글렌 마틴스의 메종 마르지엘라가 자못 기대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틴 마르지엘라는 무대 뒤로 사라졌지만 그의 패션 철학은 여전히 굳건하며, 새로운 시대에 맞춰 재해석되고 있다.
에디터 김유정(yj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