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내가 되는 시간
배우로 오랜 시간 대중을 만나온 하지원은 이제 화가로 캔버스 앞에 서서 고뇌한다.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또 표출하는 시간으로, 이는 그녀의 작품에 고스란히 축적된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요. 최근까지 드라마 〈클라이맥스〉를 촬영했어요. 그리고 페어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하고, 연말에 도쿄에서 열릴 개인전도 준비하고 있죠. 올해 뷰티와 패션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갤러리도 운영 중이라 바쁘네요. 그래서 회사에 출근도 자주 하는 편이에요.
이번에 우리는 배우가 아닌 예술 작가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우로서 하지원과 작가로서 하지원은 어떻게 공존하나요? 배우로 살면서 시나리오 속 인물, 주변 환경이 그 인물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관계있는 인물들이 서로 어떻게 변화를 만들며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그 과정을 탐구했어요. 그림을 그릴 때는 반대로 하지원 아닌 ‘전해림’이라는 진짜 내가 실재하는 세상에서 나를 객관화해 살펴보고 그 이야기를 캔버스에 옮겨오죠. 이는 20년 넘게 배우로 생활한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고 생각해요. 그 시간이 없었다면 캔버스를 마주 보는 지금의 전해림도 없을 테니까요.
맨 처음 붓을 잡게 된 계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사실 배우라는 직업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저에겐 되레 신기한 일이에요. 그 시간을 건너뛴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어릴 때 품은 창작에 대한 열정이라든지, 순수한 즐거움 등이 그림을 그릴 때 나오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은 주어진 환경과 주변 사람에 의해 정해진 것을 제 몸으로 경험하는 거잖아요. 다양한 인물의 삶을 제 작업처럼 여기며 그 삶에 ‘참여’하는 거죠.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그런 기분 아시나요? 계속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많은 것이 셧다운되었죠. 그림을 배운 지 1년 정도 됐을 때고, 많은 것이 멈추다 보니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할 시간도 생겼죠. 그때 ‘왜 나는 배우를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정신이 번쩍 나는 거예요. 내가 사는 현실에서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지, 이 세계의 나를 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면서 작업에 매진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그 작업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나요? 연기와 회화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원래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심한 편이었어요. 사실 요즘도 그런 업앤다운이 있긴 해요.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진 점이라면, 캔버스 앞에 서면 차분히 그 엉킨 것들을 풀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현장에서 주변을 잘 못 봤어요. 경주마처럼 제가 맡은 역할,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해 앞만 보고 달렸거든요. 신기하게도 작업을 시작하고부터는 촬영 현장을 좀 더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공간에 대한 인지력이 달라졌나 봐요. 조명을 들고 있는 스태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조감독님, 안절부절 못하는 막내 연출가와 스태프들 모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인물 한 명 한 명을 명확히 관찰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재밌어요. 배우로서 제가 일하는 현장을 다른 시각과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정말 큰 변화인 것 같아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에서 출발했지만,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정말 많이 고심했는데, 이런 지점 때문에 전시를 통해 많은 사람과 작품에 대해 나누고 싶어졌어요. 예술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기도 해요. 그래서 더 무거운 책임감도 느껴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스크린과 캔버스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데, 사실 활동 범주를 구분 짓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요. 결국 하지원, 나아가 전해림이라는 사람의 일이잖아요. 연기를 보는 관객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 모두에게 그냥 나라는 사람, 그 사람이 하는 행위로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 매체가 무엇이 되든 말이죠.
최근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나 모티브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혹은 가장 많이 떠올리는 이미지요. ‘아, 이걸로 다음 작업을 해봐야겠다’ 싶은 소재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인간은 정말 복잡한 존재예요. 항상 궁금해서 탐구하고, 경험하고,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앞서죠. 인간의 여러 면모 중에서도 감정을 이해하는 게 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 그것에 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인간, 인간관계 속에서 더 심하게 발현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그 감정의 근원을 추적해보고 있어요. 그걸 좇다 보면 결국 좋은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한 삶은 누구나 꿈꾸는 거잖아요. 결국 인간과 감정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하고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네요.
작업실에서의 하루는 어떤가요? 자유로운 상황에서 좋은 작업이 나온다고 믿어요. 제가 흔들릴 때 그린 작품은 그마저도 어딘가 안정적이지 않아요. 사람들도 보면 딱 알아채더군요. 그래서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하는 편은 아니에요. 어떤 날은 하염없이 캔버스와 기싸움만 하다가 가는 날도 있고, 어떤 날은 전율을 느끼며 작업에 몰두하기도 하죠. 보통은 세포와 근육이 반응하는 느낌이 들 때 좋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위 캔버스 앞에 선 하지원.
아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을 전개한다.
캔버스를 마주할 때 아직도 설렘을 느끼나요? 그럼요. 항상 두근거리고 설레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이제 그림을 그린 지 6~7년 됐어요. 고정된 것을 그리지 않고, 인간의 감정, 순간의 에너지 등을 포착하기 때문에 캔버스를 마주할 때마다 제 감정 역시 올라온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몰입하게 되는 거죠. 설레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작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상상이 안 되네요. 어떨 때는 제가 어떻게 붓을 움직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신나서 몰입한 적도 있을 정도이니 저에게는 그 설렘과 두근거림이 작업의 원동력입니다.
앞으로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작업 형태나 장르가 있나요? 지금은 평면 작업을 주로 하고 있지만, 다양한 매체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음악도 만들고, 몸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도 시도해볼 수 있겠죠. 아까 언급했듯이 사람들이 저를 배우나 작가로, 이분법적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음에는 어떤 것을 보여줄까?’, ‘어떤 일을 벌일까?’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래서 정말 모든 장르, 어떤 형태라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마지막에는 굳이 힘들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게 어떤 관계로 만나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APY 갤러리(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