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지각변동
패션계에 역대급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샤넬과 디올, 보테가 베네타, 발렌티노 등 주요 하우스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대거 교체된 것. 이는 단순한 인사이동을 넘어, 동시대 아름다움의 지표가 되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비전을 재정의하는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자리에서 색다른 미를 직조해나갈 주역들을 짚어본다.
지난 한 해는 충격과 파격의 연속이었다. 3월에 피에르파올로 피촐리가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시작으로,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도 연달아 퇴임을 선언했다. 모두 업계의 대표적 여성 리더로, 브랜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던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정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10월에는 에디 슬리먼이 셀린느와 작별을 고했다. 2018년 이래 약 7년간 이어온 여정이다. 그는 재임 기간에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스타일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확장하는 한편, 매출 역시 3배 가까이 증가시키며 자신의 이름값을 증명했다. 연말에는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를 떠난다는 소식을 알렸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패션계에서 영원히 퇴장할 뻔한 갈리아노를, 메종 마르지엘라가 세간의 눈총과 부담 속에 영입한 지도 어느덧 10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속죄하듯 조용히, 또 집중력 있게 컬렉션을 지휘하며 메종 마르지엘라를 전위적이고 창조적인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올해 초에는 베르사체의 얼굴인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나며 무려 28년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실무에서 물러나지만 홍보대사로는 꾸준히 활동할 예정이다. 과거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수년, 길게는 10년 이상 브랜드를 이끌었으나, 최근에는 짧은 계약이 일반화되는 추세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어렵고, 브랜드 정체성에 적응하지 못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다. 패션계에 팽배한 ‘스타 디자이너’ 신화의 한계도 한몫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탁월한 창의성과 비즈니스 역량이 모두 요구되는 자리다. 감당해야 할 역할과 기대가 큰 만큼, 뒤따르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속 가능성이 낮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 속에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크게 위축된 만큼, 모기업의 실적 압박 또한 디자이너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빈 잔은 채워지게 마련. 떠나는 이가 있으면 돌아오는 이도 있다. 먼저, 피에르파올로 피촐리가 떠난 발렌티노에는 2022년 구찌를 떠난 알레산드르 미켈레가 합류했다. 기다렸다는 듯 9월에 곧바로 2025 S/S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역시나 특유의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무드로 가득했다. 첫 컬렉션 노트엔 “아름다움의 목적은 치유”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2023년에 알렉산더 맥퀸을 떠난 세라 버턴은 새롭게 지방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돌아왔다. 올해 3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그야말로 호평 일색이다. 자신의 장기인 테일러링과 드레이핑을 우아하게 펼쳐냈다. 지방시의 새로운 장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은 톰 포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돌아온 하이더 아커만이다. 디올에서 존 갈리아노와 함께 작업했고, 칼 라거펠트가 2010년에 샤넬의 이상적 후계자로 꼽은 명망 있는 디자이너의 귀환이다. 그 역시 지난 3월 첫 패션쇼를 통해 건재한 감각을 드러냈다. 한편, 에디 슬리먼 후임인 셀린느의 아티스틱 디렉터로는 폴로 랄프 로렌 출신의 마이클 라이더가 이름을 올렸다. 그는 피비 파일로 시절 셀린느의 디자인 디렉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미 7월 열린 2026 S/S 패션쇼를 통해 실력을 입증한 상황. ‘트리옹프’ 로고를 적극 활용하며 브랜드의 헤리티지에 경의를 표하는 매력적인 의상을 선보였다. 무려 6개월의 공백을 이어가 화제를 모은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 자리는 보테가 베네타 출신의 마티유 블라지에게 돌아갔다. 보테가 베네타의 공석은 라코스테와 카르방에서 활약한 루이스 트로터가 차지했다. 디올의 아티스트 디렉터로 조나단 앤더슨이 임명되면서, 그가 떠난 로에베의 빈자리는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가 채운다. 두 사람은 프로엔자 슐러에서 함께 작업한 사이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디젤에 있던 글렌 마틴스가 합류해 올가을 데뷔 컬렉션을 치른다. 펜디는 아직 킴 존스 이후 적당한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 정해진 바 없다.
Jonathan Anderson for DIOR
먼저 올해 1월, 킴 존스가 디올의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났다. 4월에는 로에베 출신 조나단 앤더슨이 디올 옴므로 이직한다는 발표가 났다. 이 상황에서 의외로 관심이 쏠린 건 여성복과 오트 쿠튀르를 책임지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행보다. 조나단 앤더슨이 그간 여성복에서 더 두각을 보였기에, 치우리도 디올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진 것. 그리고 한 달 뒤, 디올 하우스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사임과 조나단 앤더슨의 총괄직 확정을 발표했다. 앤더슨은 창립자인 크리스찬 디올 이후 남성복과 여성복, 오트 쿠튀르까지 전체를 총괄하는 최초의 디자이너다. 그렇다면 단일 아티스틱 디렉터 체제를 이끌어갈 디올의 새로운 수장, 조나단 앤더슨은 누구인가. 그가 처음 패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2008년 론칭한 그 자신의 브랜드 JW 앤더슨을 통해서다. 남성복 소재를 여성복 패턴에 적용한 그의 작품은 젠더 해체주의를 개척했다는 평과 함께 런던 패션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후 2013년, 29세의 나이에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그는 세간의 평가와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머쥐며 LVMH 그룹의 전폭적 신뢰를 얻었다. 그의 마지막 로에베 컬렉션인 2025 S/S 패션쇼에서는 LVMH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를 비롯한 많은 명사가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조나단 앤더슨은 동시대 최고의 창의적 재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비할 데 없는 예술적 감각은 디올 하우스 역사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가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될 것입니다”라고 베르나르 아르노는 그의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지난 6월 공개한 디올 맨 2026 S/S 패션쇼는 조나단 앤더슨의 비전을 확인할 수 있는 첫 무대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컬렉션은 전임자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대담하고 신선했다. 과거의 실루엣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앤더슨은 컬렉션에 대해 “격식을 재구축하고”, “옷 입는 예술의 기쁨을 기념한다”고 전했다. 상업성을 겨냥한 다양한 액세서리도 눈에 띄었다. 그의 방식은 성공적으로 관객을 설득했고, 앞으로 펼쳐질 디올의 세계를 기대하게 했다. 조나단 앤더슨의 디올 여성복 패션쇼는 오는 10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공개한다. 내년 1월에는 그가 커리어 최초로 선보일 오트 쿠튀르 패션쇼도 예정되어 있다.

샤넬의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Matthieu Blazy for CHANEL
무려 36년간 샤넬을 이끌어온 칼 라거펠트가 떠난 후,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 자리는 결코 완벽히 채워지지 않을 구멍 난 항아리처럼 보였다. 샤넬에 37년간 몸담으며 라거펠트의 오른팔 역할로 헌신한 버지니 비아르가 후임으로 꽤 적절한 선택이긴 했다. 그는 하우스 고유의 스타일에 활동적이면서 여성 친화적인 이미지를 더했고, 실제로 매출도 증가했다. 다만 왕관의 무게가 지나쳤던 것일까? 일각에서는 라거펠트 시절의 활력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라는 아쉬운 목소리도 새어 나왔다. 그리고 작년 6월, 버지니 비아르가 약 5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했다. 수많은 추측과 논란이 이어졌다. 마침내 샤넬이 발표한 왕관의 새 주인공은, 올해 41세인 마티유 블라지다. 마티유 블라지는 셀린느에서 피비 파일로와 일했고, 이후 캘빈 클라인에서 라프 시몬스와 합을 맞췄다. 얼마 전까지는 보테가 베네타에서 활약했다. 2020년 다니엘 리의 오른팔로 메종에 합류했다가 2021년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것. 지난 3년은 그야말로 그가 날개를 펼친 시간이었다.
마티유 블라지는 2022 F/W 데뷔 컬렉션부터 브랜드의 장기인 가죽 노하우를 현대적으로 활용해 호평을 받았다. 쇼에 등장한 니트와 데님 아이템은 실제로는 가죽으로 만들어 트롱프뢰유 기법을 활용한 제품이었다. 물고기 모양 손잡이를 단 ‘사르딘(Sardine)’ 백을 성공시키며 상업적 감각도 보여줬다. 보테가 베네타는 경기침체기인 2024년 상반기에도 매출 상승에 성공하며 케어링 그룹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냈다. 샤넬 회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티유 블라지를 환영했다. “그의 대담한 개성, 창조에 대한 혁신적이고 강력한 접근 방식, 그리고 장인정신과 아름다운 소재에 대한 헌신은 샤넬을 흥미진진한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샤넬의 아티스틱 디렉터는 매년 두 차례 기성복과 쿠튀르, 프리 컬렉션은 물론 ‘메티에 다르’와 ‘코코 비치’, ‘코코 네주’까지 10여 개의 컬렉션을 지휘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브랜드 마케팅을 총괄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마티유 블라지는 새로운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지, 오는 9월 파리 패션 위크가 그의 첫 시험대다.

구찌를 이끌어갈 뎀나 바잘리아.
Demna Gvasalia for GUCCI
너무 짧았다. 지난 2023년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사바토 데 사르노가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임을 표명한 것. 그는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탐구하고 클래식 아이템을 부활시키며, 맥시멀리즘을 대표하던 알렉산드르 미켈레 특유의 구찌 스타일을 말끔히 지워냈다. 새로운 바람을 기대하는 이도 많았을 터다. 하지만 눈에 띄는 재정적 성과가 따라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더 큰 한 방이 필요할지 모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새롭게 구찌의 지휘봉을 쥐게 된 이는 발렌시아가 출신인 뎀나 바잘리아다. 2021년부터 성을 버리고 뎀나로 활동하고 있다.
뎀나는 1981년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종교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배경에서 소수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독일을 거쳐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2014년에 동생, 친구들과 함께 베트멍이라는 브랜드를 설립한다. 베트멍은 독특한 스타일로 화제를 모았고, 브랜드의 성공에 힘입어 그도 2015년에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되었다. 그가 합류한 후, 발렌시아가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파격적 디자인 라인을 바탕으로 신선하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확보한 것이다. 2021년에는 구찌와 흥미로운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르 미켈레가 ‘해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발렌시아가의 코드와 실루엣을 차용한 것. 미켈레 특유의 화려한 스타일에 뎀나의 아방가드르한 실루엣을 접목한 의상, 발렌시아가의 그래픽을 적용한 ‘재키’ 백 등이 그 예다.
발렌시아가에서의 10년은 두 브랜드의 모회사인 케어링 그룹의 운영진에게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케어링 그룹의 회장 겸 CEO 프랑수아-앙리 피노는 “뎀나의 창의적 힘은 구찌에 꼭 필요한 것”이라며 그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구찌 CEO 스테파노 칸티노 역시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뎀나의 창의적 접근 방식에 항상 감탄해왔습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합류를 환영했다. “브랜드의 상징적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포용하는 그의 능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뎀나는 구찌를 새로운 패션 권위와 지속적인 문화적 연관성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글 윤정은(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