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공예가 향하는 길
장인의 얼을 기리며 한국 공예에 대한 애정을 전하기 위해 재단법인 예올과 샤넬이 4년 연속 선보여온 ‘예올×샤넬 프로젝트’. ‘올해의 장인’과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최종 선정된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을 만났다. 두 사람이 품은 공예 정신과 궁극적 가치에 대하여.

왼쪽 주조 기법으로 완성한 이윤정의 주석 가구.
오른쪽 종이로 만들었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박갑순의 작품.
공예는 기능과 실용, 그리고 아름다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예술이다. 전통적 기술을 잇는 동시에 동시대 언어로 새롭게 풀어내야 하는 과제를 늘 안고 있다. 한국 공예의 가치를 알리고 계승하는 데 앞장서온 재단법인 예올과 샤넬이 2022년부터 함께 선보여온 ‘예올×샤넬 프로젝트’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예올은 ‘예’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장인을, ‘올’에서 현재와 미래를 잇는 젊은 공예인을 매년 선정한다. 샤넬 역시 쿠튀르의 근간인 장인정신과 공예적 미학을 철학으로 삼으며,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재해석에 힘을 실어왔다.
올해로 4년째를 맞은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보유자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이다. ‘올해의 장인’에 선정된 박갑순은 버려진 한지와 풀로 새로운 쓰임을 빚어내는 지호 공예를 20년 넘게 이어왔다. ‘올해의 젊은 공예인’ 이윤정은 금속의 물성과 과정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작가다. 두 사람은 상반된 재료를 다루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물성에 구애받지 않은 공통언어를 발견했다고 전한다. 10월 11일까지 예올 북촌가에서 이어지는 전시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은 두 공예가가 함께 발견한 무언의 요소를 목도할 수 있는 자리다. 버려진 종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지호와 단단한 금속을 녹여 유연하게 빚어내는 주조를 통해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조화롭게 드러냈기 때문. 여기에 디자이너 양태오가 총괄 기획을 맡아 공예라는 언어로 자연 치유와 삶의 통찰을 풀어냈다.

위쪽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서 새로운 시도에 나선 이윤정 금속공예가.
아래쪽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박갑순 지호장.
올해 예올×샤넬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셨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감회가 궁금합니다. 박갑순 처음엔 솔직히 망설였습니다. 개인전 준비로 바쁜 상황이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예올×샤넬 프로젝트의 근간은 전통문화를 존중하며 계승하려는 의지라는 점, 양태오 디자이너와 김영명 이사장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제 작업을 새로운 맥락에서 소개할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죠. 이윤정 오래전부터 예올을 알고 있었어요. 매년 장인과 젊은 공예인을 매칭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죠. 직접 참여하게 되었을 때 ‘이제 1년은 예올×샤넬 프로젝트에 집중하자’는 각오가 생겼고, 긴 호흡으로 작업하며 많은 걸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게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박갑순 젊은 작가와 협업한다는 것 자체가 기대됐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기운을 받는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에요. 이윤정 저 역시 선생님의 작업에서 종이의 두툼함과 무게감을 새삼 느꼈습니다. 금속은 종이보다 훨씬 무겁지만, 동시에 유연하게 다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서로 다른 재료지만, 같은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시 주제이자 전시명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을 각자 언어로 풀어주신다면요?박갑순 지호는 버려진 종이를 다시 삶아 새로운 쓰임을 찾는 공예입니다. 마감도 감물이나 우뭇가사리 같은 자연 재료로 하죠. 하나의 공예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실로 자연스럽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에는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더 우월하다는 믿음을 담았습니다. 이윤정 저는 이번 주제를 ‘위계 없는 관계’로 해석해봤어요. 못과 액자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구분할 수 없듯,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제 작업은 늘 이런 태도에서 출발했고,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에도 그러한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종이와 금속은 얼핏 재료의 물성이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협업 작품으로 두 물성의 기묘한 합일을 이뤄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협업이 이루어졌나요?박갑순 지호로 괴목의 질감을 재현한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이윤정 작가의 금속 꽃이 거기에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썩어가는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는 풍경을 함께 만들었죠. 이윤정 또 하나는 지호로 만든 하부와 제가 제작한 금속 뚜껑의 조합입니다. 세 가지 하부에 맞춰 뚜껑을 제작했는데, 제가 가장 마음에 든 조합이 선생님이 선택한 것과 같았어요. 그 순간 ‘우리가 통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종이와 금속은 다르지만, 몰드를 활용하는 제작 방식이 비슷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요.
박갑순 지호장님의 경우 지호 공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 그 업을 이어온 철학은 무엇인가요?박갑순 1999년 전주에서 한지 공예 강좌를 들으면서 처음 지호를 접했습니다. 닥죽을 물에 풀고 색을 입혔는데, 전통 항아리와 똑같은 빛깔이 나는 걸 두 눈으로 마주하고는 이내 매료됐죠. 금 간 항아리를 지호로 재현하는 걸 시작으로, 요강이나 세숫대야 같은 생활 용기를 만들며 선조들의 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지호 공예를 이어온 제 철학은 간단합니다. 버려진 종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지호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왼쪽 얇으면서도 독특한 텍스처를 지닌 이윤정의 주석 가구 시리즈.
오른쪽 일상의 작은 사물인 ‘못’을 테마로 한 이윤정의 작품 시리즈.
말씀하셨듯, 지호 공예의 핵심은 ‘재활용’과 ‘새활용’에 있다고 보입니다. 이러한 점이 오늘날 환경과 지속가능성 맥락에서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박갑순 조선시대에는 물자가 귀해 버려진 종이도 다시 삶아 썼습니다. 지호 공예는 바로 그런 시대정신의 산물입니다. 지금은 여러 갈래의 환경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죠. 지호는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 창의적 새활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에서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공예라고 생각해요.
협업품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은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습니다.박갑순 저는 민화 속 동식물에 큰 매력을 느낍니다. 호박은 풍요를, 호랑이와 까치는 액운을 막고 길조를 상징하죠. 그래서 단호박, 늙은 호박, 애호박을 실물 거푸집으로 빚어냈고, ‘호작도’ 속 호랑이와 까치를 작품으로 풀어냈습니다. 호랑이 입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구조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연상시키죠.
이윤정 작가님께 묻습니다. 금속공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의 창작 여정은 어떠했나요? 이윤정 대학에서 금속을 전공으로 택한 것이 계기였어요.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배우다 보니 금속이 제 성향과 잘 맞더군요. 특히 단단한 금속이 열에 녹아 유연해지는 상태에서 일련의 매혹을 느꼈습니다. 소재가 전하는 유혹이 단단함에서 유연함으로,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는 과정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요.
‘못’ 같은 작은 개체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윤정 저는 주연과 조연을 나누는 방식에 다소 회의적인 사람입니다. 못이 없으면 액자는 세워지지 않듯, 모든 존재는 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크기나 눈에 띄는 정도로 중요도를 나누지 않고, 모두가 주연일 수 있다는 시선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주조라는 기법을 깊이 탐구했다고요. 어떤 실험과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나요?이윤정 기존에는 공장이나 장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작업실에 작은 주조 환경을 만들고, 융점이 낮은 주석을 선택해 직접 시도했습니다. 얇고 넓은 형태를 주조만으로 구현하려다 수많은 실패를 겪었죠.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금속의 물성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전시에 출품한 주석 가구는 기능성과 조형미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지향했나요?이윤정 주석은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성질을 띱니다. 가구로 만들면 그 물성이 사용자의 손길에 의해 드러나죠. 저는 기능성과 조형성을 담으면서, 사용자가 만지고 길들일수록 점차 변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두 분이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박갑순 전시를 통해 많은 분이 지호의 가치를 확인하고, 버려진 종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을 살펴보며 젊은 세대가 이 문화유산을 어렵게만 여기지 않고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해요. 이윤정 저는 만지고 쓰는 행위에서 오는 공예의 순수한 즐거움을 이번 전시에서 함께 경험하셨으면 합니다. 나아가 공예 작품이 누군가의 삶 속에서 쓰이고, 그것이 제게 다시 힘을 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공예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라고 믿거든요.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한 박갑순의 작품들.
에디터 이호준(hojun@noblesse.com)
사진 샤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