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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이 만들어낸 아름다움

FASHION

황금빛 이삭은 풍요와 행운, 재생과 연대를 아우르는 시대의 상징이다.

밀 이삭에서 영감을 얻은 2016 레 블레 드 샤넬 하이 주얼리 컬렉션 페트 데 모아송 네크리스 Chanel High Jewelry

Chanel 2025 Haute Couture Collection

Chanel 2010 S/S Collection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작 ‘이삭 줍는 여인들’ 속 황금빛 들판에 흩뿌려진 이삭은 단순한 농경 풍경을 넘어 인간 존재를 지탱하는 풍요와 재생의 은유로 기억된다. 고대에는 데메테르와 케레스의 속성을 상징하며 공동체의 번영을, 프랑스 왕가와 나폴레옹 시대에는 권위와 질서의 표징을 의미했다. 하이패션과 주얼리의 역사에서 이 모티브는 권력을 드러내는 장엄한 코드이자 개인적 행운을 부르는 부적으로 두 갈래 서사를 이어왔다. 바로 이 교차점에서 이삭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변주되며, 오늘날 단순한 장식이 아닌 시대의 가치와 이상을 담아내는 코드로 자리한다.

 CHANEL 
가브리엘 샤넬에게 밀은 태어난 날과 맞닿은 운명적 모티브였다. 추수감사절에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좋은 기억을 간직한 까닭에 밀을 “나의 선한 밀”이라 부르며 행운의 표식으로 여겼다. 지금도 아카이브로 남은 캉봉가 아파트, 라 파우자의 집, 리츠 호텔 스위트룸 곳곳에서 실제 밀 다발과 브론즈 조형, 그림으로 밀에 대한 그녀의 애착을 확인 가능하다. 샤넬에 이삭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창조의 힘을 북돋우는 부적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하우스의 상징적 기호다. 이 개인적 상징은 후대에도 이어졌다. 2010년 칼 라거펠트는 그랑 팔레를 거대한 헛간으로 탈바꿈하고, 의상 곳곳에 이삭 모티브를 활용했으며, 모델의 헤어와 의상에 꽂힌 밀 이삭은 농경의 도상학을 유희적 장면으로 재현했다. 2016년 샤넬 하이 주얼리 하우스는 ‘레 블레 드 샤넬’ 컬렉션에서 밀의 성장 주기를 따라 62점의 주얼리를 선보이며 풍요와 재생의 서사를 보석에 새겼다. 그리고 2025 F/W 오트 쿠튀르 쇼에서 샤넬은 다시 한번 이삭을 소환했다. 목선과 스커트 밑단을 따라 흩날리는 시퀸과 비즈, 페더는 밀 까락의 빛을 형상화하고, 주얼 버튼에는 섬세한 밀 이삭 부조를 새겼다. 피날레에 등장한 웨딩드레스는 목선을 따라 정교한 자수로 이삭을 수놓았으며, 모델의 손에는 꽃 대신 황금빛 이삭 부케가 들려 있었다. 에크루와 화이트로 이루어진 절제된 팔레트 속에서 빛나는 까락은 샤넬이 오래도록 지켜온 행운과 풍요의 기호를 오늘의 시선으로 되살렸다.

Celine 2025 Vivienne Collection

 CELINE 
마이클 라이더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해 처음 선보인 셀린느의 비비엔느 컬렉션은 과장된 혁신보다 구조와 균형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라이더는 건축적 감각을 바탕으로 테일러링의 직선과 드레이핑의 곡선을 병치하며 새로운 미학적 균형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이삭 모티브는 핵심 장치로 활용됐다. 금사와 비즈, 자카드를 교차해 직조한 텍스타일 위에서 이삭 패턴은 대담하게 확장되며 견고한 직선 위에 유기적 리듬을 더했다. 군더더기 없는 미니멀한 실루엣에 곡선의 흐름이 겹치자 옷은 단순한 구조를 넘어 움직임과 생명력을 품은 존재로 변모했다. 화려한 수식 대신 절제된 세련미로 완성된 이삭 모티브는 전통적 권위를 현대적 감각으로 전환하며 하우스의 유산과 라이더의 시선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DIOR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디올에서 활동하던 시절, 2021 리조트 컬렉션을 통해 이삭을 공동체적 풍요와 연대의 상징으로 풀어냈다. 무대는 그녀의 고향과 인연이 깊은 이탈리아 남부 레체의 두오모 광장. 현지 장인들이 제작한 루미나리에 장식과 토속 자수, 직물, 그리고 오케스트라와 무용단이 어우러진 광장 런웨이에 이삭은 다채로운 방식으로 등장했다. 시스루 드레스의 자수로, 자카드와 프린트 패턴 속에서, 혹은 가방 속 소품으로 각기 다른 형태로 변주된 이삭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적 풍요와 결속의 기호로 표현되었다. 치우리는 특히 여성의 전통적 수공 기술을 집안일이 아닌 창의적 노동으로 재조명하며 이 모티브에 여성성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아냈다.

쇼메의 뮤즈 조세핀 황후.

메종만의 정교한 금세공 기술로 밀 이삭의 입체감과 생동감을 표현한 레피 드 블레 드 쇼메 시크릿 워치 Chaumet

귀리와 양별꽃이 바람에 살랑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2025 주얼스 바이 네이처 하이 주얼리 컬렉션 오트 앤드 필드 스타 이어링 Chaumet

 CHAUMET 
자연의 주얼러로 불리는 쇼메에 이삭은 늘 영감의 원천이었다. 조세핀 황후가 애정을 보인 이삭 티아라는 그녀의 우아함과 권위를 동시에 상징하며 메종 아카이브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시대를 거듭하며 쇼메는 이 곡물의 곡선을 자연의 생명력과 여성적 섬세함으로 재해석했다. 2025 하이 주얼리 컬렉션 ‘주얼스 바이 네이처’에서 쇼메는 귀리 이삭 실루엣을 옐로 골드와 다이아몬드로 표현했다. 마디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관절 구조(articulation)를 적용한 네크리스는 바람에 흔들리는 이삭 줄기의 리듬과 생동감을 전했다.

 BOUCHERON 
부쉐론은 창립 이래 줄곧 자연의 찰나에 주목해왔다. 꽃과 잎사귀, 동물과 보석의 결을 포착한 2025년 까르뜨 블랑슈 ‘임퍼머넌스’ 컬렉션에서는 일본의 와비사비 정신을 바탕으로 순간의 아름다움을 영속의 형상으로 승화했다. 이삭 또한 부쉐론의 손끝에서 단순한 장식을 넘어 삶의 순환과 변화를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징표로 자리했다. 이번 컬렉션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클레어 슈완은 이삭을 빛과 어둠의 교차 속에 새겨 넣었다. 블랙 DLC 티타늄으로 뻗은 줄기와 화이트 골드, 다이아몬드로 구현된 이삭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순간을 붙잡듯 유연하게 반짝인다. 여기에 나비와 애벌레, 시클라멘꽃이 더해진 장면은 자연의 소멸과 재생, 그리고 변화를 담아낸 작은 우주처럼 펼쳐진다. 또 브로치, 헤어 오너먼트, 브레이슬릿으로 변형 가능한 멀티웨어 구조는 지속성과 변화를 동시에 품은 예술적 오브제로 완성됐다.

Boucheron

Dior 2021 Resort Collection

Dior 2021 Resort Collection

 

에디터 이주이(jyle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