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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없는 음악의 시선

CULTURE

클래식, 국악, 대중음악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온 세 명의 뮤지션을 만났다. 크로스오버는 단순한 장르의 혼합이 아니라 각자 서사를 음악으로 빚어내는 일임을 증명하듯, 그들이 끝까지 지켜내는 올곧고 단단한 시선에 대하여.

해금 연주자  고수정 
독일 뮌헨을 기반으로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재즈를 접목한 독창적 연주를 통해 두각을 드러낸 해금 연주자 고수정. ‘유럽의 유일한 해금 연주자’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만큼 국악은 물론 해금이라는 악기가 상대적으로 낯선 이국 무대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사물놀이를 접하며 국악에 매료된 그는 장구로 서울국악예술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해금 전공으로 방향을 틀며 음악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사실 반발심도 있었어요. 타악이 좋아 국악의 길을 택했는데, 부모님이 장구를 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남자 연주자에 비해 불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 거죠. 그래도 장구를 치며 쌓은 장단 감각과 기본기 덕에 해금의 매력을 훨씬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이후 서울대학교 국악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이어가며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 잠시 활동하기도 한 그는 2021년, 재즈를 만나며 음악 세계에 조용히 파장이 일기 시작했다. 우연히 참여한 독일 재즈 워크숍에서 예상치 못한 음악적 해방감을 느낀 것이다. 정석과도 같은 국악 연주자의 길을 걷던 그에게 재즈는 생경하지만 짜릿한 감각으로 다가왔고, 이는 해금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게 했다. 마침 그 가능성에 주목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그레고어 휴프너(Gregor Huebner) 교수가 그를 뮌헨 국립 음악대학 현악기 재즈 즉흥연주 석사과정에 스카우트하면서 본격적으로 ‘해금 재즈 뮤지션’이라는 유일무이한 커리어를 시작했다. “워크숍에 갈 때만 해도 국악을 재즈 뉘앙스로 연주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Autumn Leaves’, ‘Moon River’ 같은 대표 재즈곡을 해금으로 연주하고, 즉흥연주에도 뛰어들어야 했죠. 다행히 해금은 가야금이나 거문고보다 조성 면에서 자유로워 다른 장르에 섞이기가 더 유연하다는 걸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게다가 해금 특유의 사람 목소리 같은 소리가 재즈의 정서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 따르면, 해금과 재즈가 만났을 때 조화를 이루는 이유는 두 장르가 공유하는 정서 ‘멜랑콜리’에 있다. 흑인의 억압된 역사에서 비롯한 재즈가 밝은 선율임에도 슬픔이 배어 있듯, 해금 역시 강렬하면서 구슬픈 음색으로 감정을 극대화한다. 이 두 감정선이 만나며 해금의 소리는 재즈라는 낯선 문맥 안에서 자연스러운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시도에는 음악을 하는 목적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 자리한다. “국악이나 클래식은 몇백 년 전 곡을 계속 연주하잖아요.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음악은 결국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재즈를 통해 평생 딱 열 명이라도 제 음악을 찾아줄 팬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뮤지션으로서 그가 꿈꾸는 모습은 일상에서 해금 연주를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연주자다. 누구나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통해 해금의 매력을 보여주고자 그는 익숙한 멜로디를 해금으로 재해석한 (2022)를 발표했고, 이어 독일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네 곡의 자작곡을 담은 (2024)를 선보였다. 두 앨범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낸 일종의 명함과도 같다. 비주류 악기를 연주하는 이방인으로서 몇 마디 설명보다 해금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인 셈이다. “사실 저는 스스로를 정통 국악 연주자나 크로스오버 연주자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고수정’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나아가 해금으로 모든 음악을 설득력 있게 연주하는 연주자, 해금이라는 악기에 가장 특화된 뮤지션이었으면 해요.”
고수정은 끊임없이 달려온 길에서 잠시 비켜나 올 한 해는 의도적으로 해금과 거리를 두고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악기에서 한발 물러선 순간, 오히려 해금을 향해 다시금 자석처럼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워냄을 통해 새로운 자양분을 얻고 성장한 시간의 끝에서 이제는 다시 힘차게 달릴 준비를 마친 셈이다. “두 장의 새로운 앨범을 구상 중이고, 2026년에는 국내 관객들을 더 자주 만나고 싶어요. 또 유럽 활동을 바탕으로 후학을 양성해보고 싶은 마음도 늘 한편에 품고 있고요.”

소프라노  심규연 
정통 클래식에서 출발해 창작 뮤지컬과 키즈 오페라, 그리고 대중가요를 자신만의 목소리로 재해석하는 유튜브 활동 등 소프라노 심규연의 행보는 단순히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언제나 마음속 깊은 결을 건드리는 존재지만, 처음부터 성악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작곡을 향한 열망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섰고, 입시라는 현실을 마주한 어느 지점에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만난 한 성악 선생님이 그의 방향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꿔놓았다. 심규연은 그 만남을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노래로 발걸음이 옮겨진 순간”이라 회상한다. 그렇게 노래는 그에게 선택이 아닌, 마음이 먼저 움직인 길이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사, 미국 맨해튼 음악대학 석사를 마친 뒤 미국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 오페라 연주자 과정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지 4년 차. 초반에는 오페라와 리사이틀 등 클래식에 집중했지만, 무대와 요청의 범주가 넓어지며 레퍼토리의 스펙트럼 또한 함께 확장됐다. 한 장르에 고정되기보다 어디에나 녹아들 수 있는 자신만의 음색을 활용해 보다 다양한 장르와의 융화를 추구하게 된 것. 따뜻하고 투명한 소리는 클래식의 넓은 울림 속에서도, 대중적 멜로디의 친근한 호흡 속에서도 자연스러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강한 자기주장보다는 상대와의 거리를 살피며 감정을 건네는 목소리. 심규연은 바로 그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음악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국 ‘표현’에 있다고 생각해요. 클래식은 여전히 제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자 고전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에요. 그 안에는 이미 완벽에 가까운 질서와 감정이 존재하지만, 저는 그 아름다움을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펼쳐보고 싶었어요. 활동을 이어가며 색을 조합하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색이 발현되고 표현의 영역도 확장되더라고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장르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클래식이라는 단단한 뿌리를 둔 심규연이라는 나무는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가지들을 통해 점점 더 무성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적 확장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영감이나 대담한 선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유럽의 언어로 노래하던 시절, 가까운 이들이 그의 음악을 이해하기보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듣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건넨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네 목소리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그 말을 마음속에 놓지 않은 채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작은 시도가 곧 음악의 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클래식이라는 근원을 두고 일상의 멜로디와 한국의 노래, 때로는 대중음악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는 작업이 그렇게 이어졌다. “제게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이란 완전히 새로운 장르를 만드는 일이 아니에요. 제가 지닌 낭만과 진심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와 감정이 만나 ‘대화’하는 음악에 가깝죠. 그렇게 음악은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되고, 결국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김윤아의 ‘야상곡’ 등의 커버곡은 많은 이에게 위안을 건네며, 동시에 성악가가 부르는 가요라는 장르적 경계를 부드럽게 넘어선 시도로 평가받는다.
지금 그에게 무대는 자신을 발견하는 장소이며, 음악은 마음의 기록이다. 음악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가장 진실한 형태로 담아내는 그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마주하고 또 다른 자신을 알아간다. 그렇게 음악이 그의 삶을 증명하기에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다양해진 시대에 심규연은 공연장을 넘어 더 많은 사람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계속 모색 중이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표현의 깊이를 탐구하는 데 집중한 시간이었어요. 또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 균형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고요. 앞으로는 ‘나의 무대’를 넘어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구상하는 토크 콘서트는 그 바람의 연장선 위에 있다. 클래식을 조금 낯설게 느끼던 이들도 편안하게 담소하듯 음악을 듣고, 노래 속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 이는 음악이 결국 사람을 향해 있다는 그의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형태이기도 하다.

소리꾼  김수인 
국악의 전통과 현대음악의 트렌드 사이를 유영하는 또 하나의 갈래를 연 뮤지션, <팬텀싱어 4>와 크로스오버 그룹 크레즐을 거치며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실험가, 완창과 창작을 통해 판소리의 뿌리를 단단히 세운 이야기꾼. 김수인은 전통과 현대, 판소리와 현대음악 사이에서 자신만의 길을 닦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한 편의 산수화를 마주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하는 뮤지션으로 평가받는다. 김수인에게 국악은 마치 호흡처럼, 미처 자각할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명창이었던 어머니(무형유산 보유자 김선이) 덕분에 집 안 곳곳에는 판소리의 울림이 머물렀고, 그는 자연스럽게 소리와 함께 성장했다. 유년 시절 작은 방 안에서, 길을 오가며 들려오는 소리의 흔적 속에서 자란 그는 판소리의 호흡과 정서를 자연스레 체득했고, 팝과 재즈, 클래식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이며 음악적 시야를 넓혔다. 그렇게 쌓아 올린 경험은 지금의 김수인을 이루는 단단한 근간이 됐다.
김수인의 음악 여정에는 몇 가지 결정적 변곡점이 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2020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일이다.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무대에 선 김수인은 창극단 선배 국악인과 함께 공연을 준비하며 단순한 노래를 넘어 소리를 대하는 태도와 내러티브를 엮어내는 법을 깊이 이해하게 됐다. 선배들의 무대를 보며 익힌 것, 이를테면 무대 전체의 호흡과 긴장, 한 음 한 음의 의미를 고려하는 경험은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판소리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3년이 흐른 뒤 호기롭게 결심한 <팬텀싱어 4> 출연은 대중과의 만남을 활짝 여는 계기이자 삶의 확장을 이뤄내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무대 위에서 대중가요와 국악을 결합하며 노래의 감정선과 판소리의 서사를 조화시키는 경험은 그에게 단순한 공연 이상의 깨달음을 안겨주었기 때문. 이후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결집한 크로스오버 그룹 크레즐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다양한 악기와 현대적 편곡 속에서 판소리의 한과 흥을 조율하는 동시에 장르 간 조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나갔다. “판소리의 뿌리가 단단해야 새로운 도전을 하더라도 빛을 발할 수 있어요.” 그는 거침없어 보이는 실험적 행보 역시 전통의 근간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10월, 김수인은 1년의 준비 끝에 460여 분에 이르는 ‘동초제 춘향가’ 완창에 도전했다. 완창은 하나의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오로지 소리와 북장단만으로 끌고 가는 점에서 연행자의 예술적 기량뿐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내구성을 검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판소리가 단순히 민속예술이 아니라 문학적 구조와 음악적 형식을 모두 갖춘 종합예술임을 증명하는 방식인 것. 완창은 국악인이라면 누구나 한 차례 겪어야 하는 성장통 같은 과정이지만, 동시에 김수인에게는 ‘소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특히 춘향가 속 ‘박석고개’ 대목을 소화할 때는 매번 고비를 맞았다고. 고민이 이어지던 당시, 그가 눈길을 돌린 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김창열 화백의 회고전이었다. 캔버스 위로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과 묵직한 여백의 울림을 감상하며, 마치 계시를 얻듯 완창에서 한순간에 모든 감정을 담아내야 하는 자신의 고민과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김창열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응축의 힘을 실감했어요. 한 번의 소리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완창의 지점을 이해하게 됐죠. 제 첫 완창이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지금 무엇을 갈고닦아야 할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와 함께 선전 차이니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경험을 통해 크로스오버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도 박차를 가했다. 중국 전통악기와 서양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진 무대에서 그는 장르의 경계 너머에서도 판소리의 정서를 유지하며 새로운 음향적 가능성을 탐색했다.
한 편의 내러티브를 펼치듯, 소리를 통해 이야기와 감정을 전달하고자 하는 젊은 소리꾼에게는 오래도록 품어온 하나의 목표가 있다. 예술 작품이 머무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판소리를 선보이며 시각예술과 음악이 서로를 비추는 장을 만드는 것. 언젠가 실현될 꿈을 품은 김수인의 소리는 쉴 틈 없이 새로운 결을 향하고 있다. 11월 말 국립창극단 주최로 진행되는 이날치 공연에서는 판소리의 문턱을 낮추고 관객과 장르의 거리를 좁히는 가교 역할을 자처할 예정이다. 전통과 현대, 판소리와 현대음악이 어우러지는 김수인의 발걸음은 오늘도 관객의 마음과 장르의 경계를 잇는 획을 이뤄가는 중이다.

 

에디터 손지수(jisuson@noblesse.com),이호준(hojun@noblesse.com)
사진 김제원
헤어 신도영
메이크업 안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