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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거부한 여자

ARTNOW

창작의 열정에 일생을 바친 작가에게 여자냐 남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필자가 한국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함께 일하며 관찰한 여성 작가들의 단단하거나 말랑말랑한 어떤 세계에 관하여.

갤러리엠에서 열린 박미나 개인전 전경. djswpsrkdjeldptjandjtdmf djEjgrpdjEjgksdldbfh(언젠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어떠한 이유로),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200×450cm, 2015(왼쪽), And Sparkling Stars!, 색칠 공부 종이에 수채화물감, 28.5×77.5cm, 2015(오른쪽)

오민, A SIT, 싱글 채널 HD 비디오, 스테레오 오디오, 6분, 2015 협업: 권령은(코레오그래피), 홍초선(사운드)

내가 만난 작가 중 상당수는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잊고 살았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남자가 되었다 여자가 되기도 하며, 작업을 보고는 성별을 알 수 없도록 위장막을 치기도 했다. 또한 그저 ‘자신’이 되는 한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시간을 거리와 작업실에서 지냈다. 물론 갑자기 머리를 맞은 듯 현실의 남자와 여자를 둘러싼 괴로운 관습과 숱한 패턴에 맞서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순간 작가의 성별은 부차적 문제가 된다. 그러나 큐레이터로서 내 경험과 관찰은 100% 뒤집힐 수 있다. 여자라는 것이 과연 부차적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검색하면 모든 것이 나오는 세계에서 누군가의 성별은 고급 정보가 아니지만, 성별이 프로필 사진처럼 올렸다 내렸다 수시로 변경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여자 작가는 여자로서 세계의 반쪽을 보고, 남자 작가는 남자로 산다.
2015년 한 해를 시작하며 올해는 왠지 여성 작가에 관한 글을 많이 쓰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대화를 가장 오래한 작가도, 이메일로 꽤 긴 이야기를 주고받은 작가도 모두 여성이었다. 그들과의 대화가 ‘수다’일거라는 생각은 착각! 우리는 착착 굴러가는 바퀴처럼 계획을 세우고 돈과 시간에 관해 정확하게 말했으며 부족한 점을 메모해나갔다.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문장이나 뉘앙스를 풍기는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엄마이자 언니이자 연인이자 꼬마이자 할머니가 되거나, 이 모든 것을 거부할 그들에 관한 몇 가지 단서를 글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비밀스럽게 새겨 넣곤 했다.
나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인전을 연 이수경 작가를 보며 한 여자가 작은 책상 위에서 이질적 세계를 어디까지 멀리 펼쳐나갈 수 있는지 생각했다. 특히 딸의 숙제를 도와주며 작은 책상에서 드로잉을 했다는 말이 매우 멋졌다. 옥인 컬렉티브로도 활동 중인 이정민 작가와는 주로 현실의 부박한 장면에 신경 쓰는 작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온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봄이면 집 옥상에서 돌본다는 텃밭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대화도 했다.
여성 작가가 자기 반영적이자 다소 고백적이며 모름지기 소규모의 세계를 다룰 것이라는 낡디낡은 편견은 어떤가? 큐레이터로서 만난 수많은 작가 중 박미나는 가장 계획적이고 규칙적으로 그림 제작에 박차를 가한다. 덜 여문 환상이나 정확하지 않은 추측이 자리할 공간을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작가는 물감과 색연필을 비롯해 대량생산하는 오늘날의 도구를 철저하게 탐구, 조사해왔다. 또한 변수를 허용하지 않는 세밀함으로 시지각의 양태를 포착해간다. 지난여름 갤러리엠에서 열린 그녀의 개인전에는 양립하기 힘든 거대한 두 세계가 공존했다. 하나는 작가가 1998년부터 지속해온 ‘색칠 공부 드로잉’. 수집한 색칠 공부 이미지를 책상에 올려두고 몸풀기를 하듯 그려나가는 작은 사이즈의 연작은 모두 모였을 때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규모의 대작이 된다. 한편 전시장 가운데 있던 삼단화 ‘언젠가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어떠한 이유로’는 장식으로도, 서사로도 휘둘리지 않는, 회화가 그려낼 수 있는 당대의 형상과 색채를 위풍당당하게 구현했다.
물론 여자의 눈 특유의 독특함이 작업의 전체 기운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아기자기하다고 해야 할까, 어떤 대상을 더 깊이 본다고 해야 할까…. 최근에 본 여성 작가의 작업 중 (또 다른) 이수경 작가가 그린 여자 드로잉과 그녀가 제작한 인형은 이상한 게임을 구성한다. 그들은 소녀이거나 중간 지대의 어른이거나, 현실과 그렇지 않은 여러 지대를 오간다. 그녀는 자세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는 미세한 표정이나 어눌하지만 당당한 동작의 주체인 여자를 그리는데, 군더더기 없는 인물 드로잉은 말없이 말하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작가가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굿-즈>에서 판매한 프로필용 얼굴 이미지는 성별을 딱히 구분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과 표정이 흥미롭다. 그녀의 만들기는 어떤 면에서 매우 기계적이고 한편으로는 수공예적이다.
강서경의 작업에서도 자신의 주변에서 시작해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작업의 주요 출발점 중 하나인 구조물 ‘Grandmother Tower’(2013년)는 여자를 향한 수공예적 편견의 오랜 물질인 원 형상과 실을 자신이 구상한 구조물에 적용함으로써 다른 상태로 전환시킨다. 그녀의 할머니가 의지한 보조기에 색실을 감아 차가운 금속성에 위로의 가능성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내면의 서사와 그것을 숨기는 바깥의 시간이 함께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오민 작가는 극도로 계산되고 통제된 이미지와 리듬의 상태를 영상 화면 안에 조직해낸다. 피아노와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그녀는 퍼포머의 몸과 시간, 무대 공간의 축을 다각도로 통제하는 규율을 보여준다. 시청각에서 열린 기획전 < Move & Scale >에서 선보인 영상 작품 ‘A SIT’에서 여자 무용가는 머릿속으로 다음에 이어질 동작을 계속 떠올리는 마킹(marking) 행위를 통해 의자에 앉아서도 마음껏 미래의 춤을 춘다.
우리가 그동안 읽은 미술사책에는 수공예적 작품을 제작하거나 일기에서 출발한 자기 고백적 서사를 말하고, 자기 앞의 세계부터 구조하고 다듬어나간 여성 작가가 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현실에선 찾아보기 힘든 관습이며 패턴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 작가에게 ‘여자’라는 것은 편견이 아니라 게임의 도구다. 해석되고 설명되길 거부하면서 즐겁게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리듬체조를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주변에서 뭐라 하든 상관없는 집중도 높은 힘을 발휘한다.


이수경, 설현, <던전(개방회로)> 전시를 위한 몬스터 드로잉, 2015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현시원(독립 큐레이터, 시청각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