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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의 숨결 속으로

ARTNOW

살아생전 유럽의 현대미술 작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은 최초의 미국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잭슨 폴록. 그가 아내 리 크래스너와 함께 지내며 드리핑 기법을 ‘완성’한 이스트햄프턴의 자택과 작업실에 다녀왔다.

이스트햄프턴의 자택 주변을 한가로이 산책하는 잭슨 폴록과 그의 아내 리 크래스너

누군가를 사후에 기억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그리 공평하지 못하다. 이런저런 추측과 가십 등으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의 조각이 짜 맞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신과 같은 예술 작품이 남아 있고, 그가 온 힘을 다해 작품을 생산한 작업실이 존재한다면 조각 맞추기는 조금 수월해지기도 한다. 미국 표현주의 대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부인 리 크래스너(Lee Krasner)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크래스너의 유언에 따라 설립한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Pollock-Krasner House & Study Center)’는 두 사람의 집과 스튜디오를 복원, 지금까지도 그들을 기억하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작업 중 잠시 쉬면서 휴식을 취하던 작업실 의자

작품인지 나무 바닥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작업실 내부. 폴록이 떠나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끝자락인 이스트햄프턴에 자리 잡았다. 맨해튼에서 자동차로 3시간가량 걸리는 거리. 지금은 미국 동부 최고의 주말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두 사람이 정착한 당시만 해도 이스트햄프턴은 그저 조용한 시골에 지나지 않았다. 폴록과 크리스너는 1945년 뉴욕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했다. 이들은 같은 전시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고, 폴록의 가능성을 알아본 크래스너가 매니저를 자처하고 나서 폴록이 뉴욕 예술계에 자리 잡도록 도왔다. 이들이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을 만난 것도 이즈음이었다. 페기 구겐하임과 계약을 맺으며 이 가난한 예술가 부부는 매달 얼마간의 생활비와 집 계약금을 구할 수 있었다.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는 미국 교외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2층집이다. 하지만 처음 이들이 이곳에 왔을 당시엔 그야말로 처참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오디오 가이드에 녹음된 크래스너의 목소리는 물도, 화장실도 없이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추위에 떨던 당시를 회고하며 웃는다. 물론 지금은 그때의 원시적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현관 입구에 걸린 작은 현판과 앙증맞은 벤치를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니 넓게 트인 공간이 주방과 거실, 작은 사무실로 나뉘어 있었다. 본래 1층에 있던 방들은 폴록이 직접 벽을 부수어 터버렸다고 한다. 실내는 여느 가정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방에 있는 작은 주전자와 요리용 장갑, 양념통은 이제 막 폴록과 크리스너가 아침을 먹고 나간 듯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 길들어 있고, 맞은편 벽면의 피아노 위엔 폴록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폴록은 이곳으로 이사한 뒤 자연과 가까운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걸 매우 기뻐했다. 거실 벽에 조각처럼 전시한 닻은 어느 날 바닷가를 산책하던 폴록이 발견해 크래스너와 함께 집까지 어렵게 운반해온 것.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조각 못지않은 존재감이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작은 사무실 겸 서재에 들어서자 책장을 채운 책과 LP판, 그리고 오래된 LP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에드 해리스(Ed Harris)가 열연한 영화 <폴록>을 본 사람이라면 폴록과 크리스너가 재즈 음악을 즐기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폴록보다는 크래스너가 아방가르드한 재즈 음악을 더 즐겼다고 한다. 소파 앞 커피 테이블엔 장장 4페이지에 걸쳐 폴록에 대해 소개한 <라이프>가 놓여 있다. 하루아침에 폴록을 미국 최고의 예술가로 널리 알린 그 유명한 기사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면 두 사람의 침실과 작업실로 쓰던 손님용 방, 작은 사무실 그리고 화장실이 보인다. 그들이 함께 쓰던 침실은 지금은 오롯이 크래스너의 흔적을 담고 있다. 폴록이 죽고 30여 년간 크래스너가 혼자 이곳에서 산 탓이다. 침실엔 그녀의 수집품인 조개껍데기와 생활용품이 오밀조밀 정리돼 있고, 잠옷이 침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 폴록과 만나기 전 옛 연인이 그려줬다는 크래스너의 초상화엔 강인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옆의 작은 방은 폴록이 새로운 야외 작업실로 옮기기 전 작업하던 공간이다. 폴록에겐 새 작업실을 마련한 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 이 좁은 공간에선 그의 드리핑 회화를 완성할 수 없었을 테니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폴록은 이곳에서 그를 세기의 작가로 만든 ‘드리핑 기법’을 완성했다.

집을 나와 잔디밭 건너편에 보이는 작업실로 향했다. 본래 낚시 장비를 보관하던 헛간을 1946년 폴록이 작업실로 개조했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방문객을 위한 덧신이 준비돼 있었고, 입구 한쪽에서 물감과 안료 그리고 작업복이 눈에 들어왔다. “폴록이 입던 작업복인가요?”라고 묻자 스태프는 “크래스너 것이 아닐까?”라며 웃었다. 작업실은 빛이 잘 드는 높은 천장에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였다. 무엇 하나 거치적거리는 것 없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작업하기 좋은 공간. 벽에 가지런히 전시한 사진과 패널은 폴록과 크래스너의 일생을 간결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데 이곳에 정착하고도 처음 몇 년간은 경제적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든든한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이 1947년 유럽으로 떠나면서 새로 계약한 갤러리의 지원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곤궁하던 1947년부터 1950년까지 폴록은 이곳에서 드리핑 기법으로 대변되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완성한다. 그는 막대기나 붓, 혹은 구멍 뚫린 깡통을 이용해 바닥에 펼쳐놓은 캔버스에 물감을 뿌려나갔다. 뿌린 물감이 사방에 쌓이며 캔버스 전반에 추상 이미지가 나타났다. 우연한 효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오랜 경험을 통해 매우 치밀하게 계산한 구성이다. 폴록은 이 공간을 수없이 오가며 그의 걸작을 완성해나갔을 거다. 마룻바닥엔 오래전 그가 뿌린 물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크래스너가 세상을 떠난 후 복원 전문가들이 마루 위를 덮고 있던 포장을 걷어냈고, 이 놀라운 흔적을 발견했다.

폴록과 아내 크래스너가 뉴욕을 떠나 자리 잡은 이스트햄프턴의 주택.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폴록은 자연과 가까운 환경에서 살게 된 걸 매우 기뻐했다. 실내는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말해주는 듯 무척 단조롭다.

예술로 교감했던 폴록과 크래스너

한편 1949년 8월에 발행한 <라이프>가 ‘잭슨 폴록, 그는 생존하는 미국 최고의 예술가인가?’라는 제목을 달고 특집으로 그를 소개하며, 그의 작품은 평단과 대중의 인정을 한꺼번에 받게 된다. 이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모든 작품이 팔려나가는 성과를 거둔다. 작가로서 폴록의 성공은 현대미술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왔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독보적 평론가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그토록 지지하던 평면 회화의 전형과 같은 것으로, 미국 회화의 선진성이 유럽의 전통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잭슨 폴록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미국 최고의 작가가 됐고, 본인도 자신에게 찾아온 부와 명성을 맘껏 즐겼다.
하지만 작가로서 성공이 언제까지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진 않았다. 그를 시기하거나 배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작품을 원하는 컬렉터나 갤러리의 압박은 심해졌으며, 미디어 앞에서 취해야 하는 가식적 행동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했다. 점차 폴록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을 잃고 퇴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오랜 시간 고생한 알코올중독에 다시 빠져들었다. 힘든 건 폴록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작업을 제쳐두고 폴록을 도와온 크래스너도 심신이 무너지는 폴록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폴록은 아내 외에 다른 여자들을 곁에 두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이 화가 루스 클리그먼(Ruth Kligman)이었다.

폴록이 죽기 전 애인 클리그먼과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낸 자연석 벤치

작업실과 집 사이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 멀리 시원한 호수가 보이는 그곳엔 거대한 자연석을 쌓아 만든 벤치가 있다. 폴록이 죽던 그날 수영복 차림의 클리그먼과 함께 앉아 사진을 찍은 그 장소. 사진은 영화 <폴록>에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당시 폴록은 작품 활동을 포기한 채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혼 생활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내 크래스너는 서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파리로 떠나버린 상태. 그사이 폴록은 클리그먼을 빈집에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다. 1956년 8월 11일, 종일 술에 취해 있던 폴록은 클리그먼과 그녀의 친구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지만, 파티 장소 앞에서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다시 집으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폴록이 몰던 차는 집까지 거리가 2km도 남지 않은 지점에서 나무와 충돌하고 만다. 폴록과 클리그먼의 친구는 즉사하고, 클리그먼만 살아남았다. 폴록의 나이 겨우 44세였다.
이 비극적 소식을 유럽에서 전해 들은 크래스너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오직 상상만 가능할 뿐이다. 크래스너는 1984년 6월 19일 죽기 직전까지 이 집에 머물며 화가로서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폴록의 명성과 화가로서의 성취를 보다 의미 있게 하고자 애썼다. 폴록의 많은 작품을 미술관에서 소장하도록 힘썼고, 죽기 직전 ‘폴록-크래스너 재단(The Pollock-Krasner Foundation)’을 설립해 젊은 작가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돕게 했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한 폴록-크래스너 하우스 & 스터디 센터도 미국의 랜드마크로 지정돼 오늘날까지 그들을 찾는 많은 사람을 반기고 있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황진영(큐레이터, 아트 어드바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