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새에서 발견한 이야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기억을 다루며, 사유의 여백을 남기는 세 권의 책
한 해의 끝은 언제나 조용한 틈을 남긴다. 쉴 새 없이 달려오던 일상이 멈추면, 그 공백 속에서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잃어버린 기억, 흔들리는 관계, 미처 돌보지 못한 마음의 조각이 고요히 떠오른다. 연말의 독서란 어쩌면 그 조각들을 천천히 주워 담는 일인지도 모른다. 여기, 그 틈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언어로 시간을 이야기하는 세 작가가 있다. 그들의 문장은 기억을 더듬고, 불안을 응시하며, 회복을 향해 나아간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키냐르가 곧 장르’라 불릴 만큼 독창적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소설과 철학적 에세이 사이를 오가며 인간 존재와 시간, 기억의 본질을 탐색한다. <행복한 시간들>은 그의 장기 프로젝트 ‘마지막 왕국’ 시리즈의 열두 번째로, 그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인 기록이 담긴 책이다. 이번 작품에서 키냐르는 회귀하는 자연과 지속되는 우정을 주제로 인간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지 사유한다. “날짜는 역사의 최소 단위이자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그의 문장처럼,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항성의 회전처럼 반복된다. 그 순환 속에서 작가는 자연이 빚어내는 경이로움을 발견하며, “함께 침묵할 줄 아는 경이로운 우정”을 통해 행복의 또 다른 얼굴을 그린다. 1997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온 작가는 이후 존재의 심연과 기억의 파편을 파도처럼 펼쳐내는 글을 써왔다. 그 정점과도 같은 이 책은 세속의 연대기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 속에서만 가능한 몰입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편혜영의 세계는 현실의 단단한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균열에서 출발한다. <어른의 미래>는 겉보기엔 평온한 일상에서 조금씩 벌어지는 금의 틈을 따라간다. 그 틈은 가족의 대화 속에서도,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발견된다. 작가는 불안을 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인간이 ‘정상’이라 믿는 세계의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그의 서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총 11편의 짧은 이야기 속 인물들은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한 균열 앞에서 조용히 흔들린다. 그러나 그 불안의 끝에는 희미한 온기가 남는다. ‘신발이 마를 동안’과 ‘아는 사람’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연약한 인간이 서로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순간을 포착한다. 불안과 온기가 공존하는 이 책은 한 해의 끝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이에게 현실의 서늘함과 함께 미세한 회복의 가능성을 건넨다.
마지막으로 이원호의 <고래집>은 잊고 지내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시간의 이야기다. ‘카메라’, ‘고래집’, ‘쥐꼬리’, ‘금강령’ 네 편의 짧은 우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멈춰 있던 마음의 시간을 천천히 움직인다. 낡은 카메라를 든 노신사의 기억, 왕과 후계자의 선택, 금강산의 신령들이 모여드는 순간까지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부드럽게 넘나든다. 각 작품은 동화처럼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잃어버린 시간과 화해라는 하나의 주제가 담겨 있다. 작가는 두려움과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 틈을 어루만지며 ‘다시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한다. 이와 함께 브라이언 두들의 감각적 일러스트가 전시를 감상하듯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불안’이 아닌 ‘회복’의 온도로 우리가 놓친 시간의 의미를 조용히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