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내면을 마주하는 법
자신의 감정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 그 깊이를 흑과 백 사이의 무수한 농도로 기록하는 작가 무나씨. 겹겹이 쌓인 선과 차분히 비워둔 여백은 단순한 화면을 넘어 마음의 가장 미세한 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다가오는 12월, 스페이스K에서 열리는 개인전 〈우리가 지워지는 계절에〉를 앞두고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다.


아래 갤러리 바지우(Galerie Vazieux)에서 열린 〈미묘〉전 전경.
처음 예술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중고등학교 시절 요절한 천재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며 전율을 느끼고, 러시아 소설 속 인물 이야기에 심장이 뛰던 기억이 있어요.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주인공을 보며 ‘나도 저렇게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그런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과 함께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싶다고 느꼈을 때 제 안에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선명히 자리 잡은 것 같아요. 그때의 기억이 작가님을 예술의 길로 이끌었군요. 작가님은 본명이 아닌 작가명을 쓰고 계시죠. 불교 용어인 ‘무아(無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요.
불교에서 영향을 받긴 했지만 사실 제가 담고 싶은 의미가 꼭 불교적 맥락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일기를 쓰다가 문장이 전부 ‘나’로 시작하는 걸 보고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조금 비워내고, 나를 초월한 무언가를 창작해보자는 다짐의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짓게 됐어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을 쓰면서 오히려 나라는 이미지가 점점 더 강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결국 내가 없는 이야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만 제가 관계 맺는 세계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옅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하고 있어요.
오랜 시간 먹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계시죠. 이 재료에 끌리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일종의 감각적 쾌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주 짙은 검은색을 칠할 때 느껴지는 시각적 만족이 있어요. 불분명한 것들이 분명하게 나뉘는 그 순간의 쾌감이랄까요. 반대로 물에 희석된 검은색이 종이 위에서 예측할 수 없이 번져나갈 때 느껴지는 모호함과 약간의 두려움 역시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 색으로 무한히 다른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단순함이 좋아요. 종이, 붓, 먹, 그릇 등 몇 가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흑과 백으로 그려낸 세계 속 인물들은 서로 마주하거나 외면하며 묘한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이들은 작가님이 경험한 관계 속 감정에서 비롯한 존재일까요?
네, 맞아요. 제 마음속에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저와 관계된 존재겠죠. 아주 가까운 가족부터 직접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누군가까지도요. 제가 그 관계를 떠올리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제게는 그림의 소재가 됩니다.
관계 속에서 느낀 추상적 경험을 하나의 장면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작업은 어떤 과정을 거쳐 시작되나요?
어떤 낯선 경험을 하게 되면 우선 아내와 그 이야기를 나눕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되고 조금 더 또렷해져요. 이후에는 그 경험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감정과 관련된 동작, 성질, 질감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고 간략한 문장으로 만들어보려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면 그때 비로소 그림이 시작됩니다.
그림이 시작된 뒤에는 수많은 선이 켜켜이 쌓이죠.
쉽게 그린 작품을 관람할 때는 저 역시 쉽게 그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작품을 통해 작가가 얼마나 긴 밤을 지새웠을지 짐작할 수 있으면 그만큼 감동하게 되고, 오랜 시간 감상하게 되죠. 온 마음을 다해 그렸다는 것을 그림 속에 담고 싶어 이러한 작업 방식을 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온전히 그림 앞에 머물게 하는 선을 긋는 과정이 저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몰입의 시간을 견디려면 체력과 마음의 균형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작업 중 특별히 지키는 루틴이 있을까요?
새벽 요가를 시작한 후로 매일 오랜 시간 작업하는 것이 조금은 수월해졌습니다. 작업 중에는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들을 때도 있고 아내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결국 선을 반복해서 긋는 그 행위 자체가 저에게는 명상과도 같아요. 그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자연스럽게 평온해집니다./p>
무표정한 인물들, 절제된 여백 그리고 흑백의 색감까지 작가님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이런 회화적 작품 세계를 확립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대학교 졸업 전시를 1년 앞두고 방학 내내 제 취향을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좋아하는 이미지를 수집해 그것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무엇인지, 내가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었죠. 제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은 그때 정리한 것들이 이어진 결과일 거예요.

오른쪽 희미, 한지에 먹과 아크릴, 91×65cm, 2025.
다가오는 12월 스페이스K에서 개인전 〈우리가 지워지는 계절에〉가 열리죠. 이번 전시에서 특히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요?
이번 전시는 제가 작업할 때 스스로 감정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침잠해 들어가 하나의 감정을 마주하고, 그 감정에 오롯이 몰두하며 생각하는 과정을 관람객과 함께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서로 다른 감정의 성질을 탐구한 그림들이 있고, 동시에 그 감정에서 천천히 벗어나 해방되는 과정에 대한 작품도 함께 존재합니다. 신작 중 ‘내 마음의 동굴로 기어 들어가는 마음 동굴’이라는 작품에 가장 마음이 가요.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하나의 정신적 동굴처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전시장 전체가 관람객이 각자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아요. 이번 전시가 관람객에게 어떤 시간으로 다가가길 바라나요?
밤이 깊어지는 계절에 누구나 해결되지 않은 감정 때문에 흔들릴 때가 있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이번 전시가 잠시나마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한 문장이 있다면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하고 신비로운 것이며,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