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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이루는 실험

ARTNOW

전통적 회화에서 산업 재료, 비물질의 영역까지,
재료를 매개로 예술을 이룬 실험의 궤적을 따라간다.

Robert Rauschenberg, Copperhead-Bite VI / ROCI CHILE, Silkscreen Ink, Acrylic and Tarnish on Copper, 245.6×123.8cm, 1985. Photo by Ronald Amstutz. Courtesy of Thaddaeus Ropac  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The Robert Rauschenberg Foundation.

Robert Rauschenberg, Hawk-Eyed(Copperhead), Silkscreen Ink, Enamel, and Tarnish on Copper with Bronze Frame, 123.8×245.7cm, 1989. Photo by Cho Hyun Jin. Courtesy of Thaddaeus Ropac  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The Robert Rauschenberg Foundation.

로버트 라우션버그

올해 로버트 라우션버그가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추상표현주의가 선도하던 미술계에서 회화, 조각, 오브제를 결합한 ‘콤바인(Combine)’이란 독창적 형식을 만들어 ‘경계를 허문 예술가’란 평을 받는 그는 전통적 매체의 구분을 흐리며 오늘날 복합 매체 예술과 하이브리드 예술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라우션버그의 콤바인 페인팅은 1950년대 중반부터 시도한 작업으로 전통적 회화의 평면성을 탈피하고 조각의 3차원 요소와 일상의 사물, 현실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결합하면서 회화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대표작으로 1955년부터 1959년 사이에 선보인 ‘모노그램(Monogram)’을 꼽을 수 있다. 박제한 염소 몸통을 폐타이어에 끼우고 콜라주 작업을 진행한 캔버스 위에 올려 완성했다. 베개와 이불이 덮인 침대를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물감을 뿌린 ‘침대(Bed)’(1955) 역시 대표작으로 꼽힌다. 침대를 그리는 대신 캔버스로 사용함으로써 회화의 프레임을 확장한 것. 이를 통해 라우션버그는 예술가가 사용하는 재료, 오브제에 맥락을 부여하고,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회화에 도전하며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라우션버그는 이후 실크스크린 회화를 통해 대중문화 이미지를 차용하며 회화와 인쇄, 사진의 경계를 허물었고, 1960년대 후반에는 퍼포먼스와 협업, 기술 매체로 영역을 넓혀 예술의 매체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했다. 그의 예술은 언제나 경계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위였다. 그는 예술이 삶과 동떨어진 고유한 영역이 아니라, 일상의 재료와 감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 태어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라우션버그의 실험은 회화가 더 이상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는 사고의 틀임을 보여준다.

안젤름 키퍼. Photo by Charles Duprat.

2022년 9월 1일부터 10월 22일까지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 개인전 〈지금 집이 없는 사람〉 전시 전경. Photo by Chunho An.

Anselm Kiefer, The earth’s atrot ! The sun’s a scream ! The air’s a jig ! The water’s great !, Emulsion, Oil, Acrylic, Shellac, Gold Leaf, Sediment of Electrolysis and Charcoal on Canvas. 12 feet 5 9/16 inches×37 feet 4 13/16 inches, 2023. Private collection. Photo by Charles Duprat.

안젤름 키퍼

안젤름 키퍼에게 회화는 평면의 한계를 넘어 물질로 이루어진 사유의 장이었다. 그는 유화와 아크릴 위에 납, 볏짚, 재, 모래, 금박, 유리 같은 물질을 중첩하며, 재료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가 되도록 만들어왔다. 화면 위에 쌓이고 타오르며 남은 흔적은 단순한 질감이 아니라 역사와 신화, 인간의 기억이 침전된 지층이다. 그의 회화는 그려진 이미지보다 물질의 궤적이 먼저 말하는 회화다.

키퍼에게 재료는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기억의 매개다. 작가가 직접 “작가로서 전환점이 됐다”고 언급하기도 한 작품 ‘마르가레테(Margarethe)’(1981)와 ‘슐라미트(Sulamith)’(1983)는 독일 전후 세대가 마주한 역사적 죄의식과 기억의 무게를 불과 재의 흔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불에 그을린 볏짚과 회색 재가 화면 위에서 대조를 이루며 두 여성의 이름을 소환한다. 작가는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이를 차용했다. 금빛 볏짚으로 덮인 ‘마르가레테’의 화면은 희미한 구원의 가능성을, 검게 그을린 ‘슐라미트’의 공간은 소멸된 기억의 잔해를 상징한다. 타고 남은 재료는 이념이나 이성보다 깊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

이후 작품 ‘오시리스와 이시스(Osiris and Isis)’에서 키퍼는 신화와 연금술을 결합해 물질의 변환을 탐구했다. 납 판을 여러 구획으로 나누고, 구리 선을 매달아 도자기 파편을 연결해서 회로를 연상시키는 구조를 만들었다. 고대 신화적 서사와 현대 산업적 재료가 하나의 표면에서 공존하며 인간의 지식, 기술, 신앙이 맞닿는 지점을 시각화한 셈이다. 무겁고 독성 있는 납은 죽음과 변형의 상징이 되고, 깨진 도자기와 구리 선은 단절과 재생의 가능성이 된다. 이 작품은 물질이 스스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키퍼 특유의 ‘연금술적 회화’를 보여준다.

안젤름 키퍼의 회화는 파괴와 생성, 소멸과 부활의 순환을 재료의 물리적 변화로 시각화한다. 불타고 부서지고 녹아내리는 물질의 변화 과정은 인간의 역사와 기억의 흔적으로 치환된다. 그는 회화를 색과 형태의 평면으로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에게 회화란 흙과 금속, 불과 재가 만나 만들어내는 사유의 표면이며, 시간의 층이자 감정의 풍경이다.

2023년 9월 4일부터 11월 4일까지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 도널드 저드 개인전 전시 전경. Photo by Artifacts.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Donald Judd Art. ©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텍사스 마파에서 촬영한 도널드 저드, 1993. © Laura Wilson.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Donald Judd Art. ©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도널드 저드, 무제, 목판화 20개 세트: 한지 위에 카드뮴 레드, 카드뮴 옐로우, 카드뮴 오렌지, 울트라마린 블루, 세룰리안 블루, 코발트 블루, 퍼머넌트 그린, 비리디안 그린, 검은색, 알리자린 크림슨 목판 채색, 각 60x80cm, 1992~1993/2020. 1992~1993/2020. Photo by Timothy Doyon.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Donald Judd Art. © Judd Foundation/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도널드 저드

도널드 저드는 산업 재료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끌어올린 작가다. 그는 회화나 조각의 전통적 구분을 거부하고 금속, 플렉시글라스, 합판 등 공업적 재료를 사용해 오직 형태와 공간의 관계를 탐구했다. 표면의 질감이나 작가의 손길은 철저히 배제하고, 대신 반복 · 비례 · 구조의 논리로 이루어진 미니멀한 조형이 남는다. 그의 작품은 감정이나 서사 대신 물질이 놓인 방식 자체가 의미가 되는, 순수한 구조의 언어다.

저드에게 재료는 감정이 제거된 차가운 물질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실체다. 그는 1965년 발표한 글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에서 조각도, 회화도 아닌 제3의 형태를 선언하며 예술의 본질을 ‘형태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확장했다. 산업 재료는 그에게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의 언어로 작용했다. 기계적 생산 방식을 통해 제작한 그의 작품은 오히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순수한 인식의 경험을 남겼다.

대표작 ‘무제(더미)(Untitled(Stacks))’(1965~1969)는 스테인리스스틸과 플렉시글라스로 제작한 동일한 직육면체를 벽에 수직으로 배치한 연작이다. 각 모듈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며, 그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작품의 일부로 작동한다. 일정한 규칙과 구조 안에서 빛의 반사, 공간의 깊이, 색의 투명도가 미묘하게 변주되며 감각적 긴장이 발생한다. 또한 ‘무제(진행)(Untitled(Progressions))’ 시리즈는 형태의 반복과 비례의 계산을 통해 질서와 시간, 리듬의 문제를 조형화했다. 단순한 형태 속에 남겨진 여백과 균형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절제된 서정으로 작용한다.

결국 저드의 조형 세계는 물질의 논리 위에 감각의 틈을 남겨, 산업 재료로 구축한 예술이 어떻게 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공장에서 제작한 금속 구조물 안에 인간의 인식과 지각의 가능성을 심어 산업의 언어로 감각을 사유하는 새로운 조형 질서를 완성했다.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Couple), 1993. Photo by Tony Prikryl. Courtesy of Aspen Art Museum.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 1989/1990. Courtesy of The Hammer Museum.
Felix Gonzalez-Torres, Untitled(Fear), 1991. Photo by Alex Delfanne. Courtesy of Hauser & Wirth.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는 일상적이고 산업적인 재료로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투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사탕, 전구, 인쇄용 종이 같은 공산품을 사용해 사회구조와 개인의 감정, 사랑과 상실을 극도로 절제된 형태로 표현했다. 일상의 재료를 예술의 언어로 치환한 그의 작업은 차가운 물질 속에서 따뜻한 감정을 호출하며, 관람자가 개입하는 순간 완성된다.

곤잘레즈-토레스에게 재료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무제(로스)(Untitled(Lose))’에서 사탕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다시 채워지는 과정은 기억과 재생을 상징한다. 또 다른 대표작 ‘무제(완벽한 연인)(Untitled(Perfect Lovers))’는 2개의 동일한 벽시계를 나란히 걸어놓은 작품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미세한 어긋남이 발생하며 결국 멈추게 된다. 완벽하게 동일한 듯 보이지만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두 존재, 연인 혹은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또 다른 작품 ‘무제(아메리카 #1)(Untitled(America #1))’는 수천 개의 백열전구가 반복적으로 점등하고 꺼지며, 공동체의 에너지와 소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내년 2월 14일까지 홍콩 데이비드 즈워너에서 열리는 개인전 〈Somewhere Better than This Place / Nowhere Better than This Place〉는 이러한 감정적 구조를 도시의 공간으로 확장했다. 관람객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사탕과 인쇄물은 도시의 리듬 속으로 스며들며, 사적 감정과 공적 공간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인쇄물 더미 위에 “어딘가 이곳보다 나은 곳”과 “이보다 나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문장을 병치한 ‘무제(Untitled)’(1998/1990)는 곤잘레즈-토레스가 평생 탐구해온 이중성, 즉 부재와 존재, 희망과 체념의 개념을 간결하게 응축한다.

이렇듯 펠릭스 곤잘레즈-토레스의 예술은 물질의 차가움으로 감정을 말하고,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한다. 재료는 사라지는 동시에 남아 있는 것,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감정의 물질이다. 작가는 그렇게 산업의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반추했다.

2025년 6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James Turrell: The Return〉 전시 전경. Photo by Studio_kdkkd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aceGallery. © JamesTurrell. Photo by Studio_kdkkdk. Courtesy of the Artist and PaceGallery. © JamesTurrell.

타이틀

제임스 터렐

공간을 빛으로 조각하는 예술가 제임스 터렐은 물질 대신 지각을 다룬다. 그는 물리적 형체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빛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 ‘인식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물질을 제거하고, 오직 감각만으로 구축한 ‘공간의 경험’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물질적 예술의 정점에 있다.

터렐의 작업은 관람객이 보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전환한다. 공간에 은은히 스며드는 빛의 밀도, 시선의 움직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색의 진동이 작품을 구성한다. 올해 페이스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The Return〉에서는 이러한 빛의 실험을 도심으로 옮겨 관람객이 직접 빛의 흐름 속에 머무는 경험을 선사했다. 이처럼 작가는 물질이 지배하던 예술의 장식적 언어를 넘어, 재료가 ‘지각’과 ‘경험’으로 바뀌는 지점을 제시한다. 빛이 형태가 되고 공간이 지각의 캔버스가 될 때, 우리 역시 그 안에서 ‘보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의 공간에 들어선 관람객은 빛의 방향, 색의 농도, 깊이를 감각하며 시각의 불확실성을 체험한다. 경계가 사라진 색면 속에서 우리는 ‘보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식 행위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예술의 영역이 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터렐에게 비물질은 부재가 아닌, ‘지각의 존재 방식’이다. 그는 빛이라는 비물질적 매체를 통해 인간의 감각을 예술의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그가 구축한 빛의 공간은 단순한 시각적 체험을 넘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되묻는다. 눈으로 보는 것은 곧 세계를 규정하는 행위이기에, 터렐의 작품은 관람 행위 자체를 사유의 장으로 만든다. 결국 그의 예술은 빛을 통해 인간의 지각을 드러내는 동시에, ‘보는 자’로서 존재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Olafur Eliasson, Midnight Sun, Convex Mirror, Stainless Steel, Monofrequency, Lights, Transformer, ø 120cm, 2017. Photo by Jens Ziehe.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Seoul. © 2017 Olafur Eliasson.

Olafur Eliasson, 숨결의 지구(Breathing Earth Sphere), 2024. Photo by Kyungsub Shin. Commissioned by Shinan County. © 2024 Olafur Eliasson.

올라퍼 엘리아슨

올라퍼 엘리아슨은 물질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조각가보다 물질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작가다. 그는 빛, 그림자, 색, 안개, 얼음 등 비물질적 요소를 재료로 삼아 자연의 현상과 그 감각을 시각화한다. 순간적으로 형성되고 사라지는 감각의 층위를 드러내는 그의 작업은 ‘보는’ 경험 자체를 예술로 제안한다.

그동안 선보인 엘리아슨의 작업은 관람객의 지각과 참여를 통해 완성되었다. 작품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관람자의 움직임과 시선,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된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 인공 태양을 띄운 ‘날씨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2003)는 이러한 비물질적 실험의 대표적 사례다. 관람객은 인공 안개와 빛으로 구성된 공간에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새롭게 자각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또 그의 ‘그린 리버 프로젝트(Green River Project)’(1998)는 또 다른 방식의 비물질적 개입이다. 환경에 무해한 수용성 염료로 강물을 녹색으로 물들이는 행위를 통해 물질적 조각 대신 자연 그 자체를 재료로 삼고, 작은 변화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 작업이다.

엘리아슨에게 비물질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지각의 확장이다. 그는 물리적 재료를 넘어 자연과 인간, 공간과 경험의 관계를 탐구하며 예술의 영역을 감각과 인식의 차원으로 넓혀왔다. 이를 통해 물질 이후의 시대에 예술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물질이 사라진 자리에 감각과 인식이 새롭게 구축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엘리아슨의 비물질적 조각은 관람자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을 재구성하고, 예술이 다시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제시한다.

  • 정송(아트 칼럼니스트)
  •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 사진 데이비드 즈워너, 타데우스 로팍, 페이스갤러리,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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