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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처럼 버는 남자들

MEN

예부터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쓰라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정승처럼 버는 남자들도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게.

슈트 Beyond Closet, 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시계 Archimedes, 카메라 Sigma DP2.

미소녀를 찍는다
로타(포토그래퍼)

지난해 가을쯤이었다.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젊은 여성이 평범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사진이었는데,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면서 야하게 느껴졌다. 사진가의 이름은 로타.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교복이나 트레이닝복 차림의 여성을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고, 불과 반년 사이 유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10만 명. 그의 첫 사진집 <Girls>는 사진집으로는 이례적으로 1만 부가 넘게 팔렸다(무라카미 다카시가 그의 SNS 게시물에 직접 ‘좋아요’를 눌렀을 정도다). 일본 소년 만화 <H2>나 <전영소녀>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의 사진에는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남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가 많다. 페티시와 롤리타, 아찔함과 설렘 사이의 어딘가. 사춘기 남학생들이 처음 여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쯤의 미묘한 시선이 그의 사진에 녹아 있다. 그 덕분에 ‘미소녀 전문 포토그래퍼’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그의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은 사진 너머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진을 봤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진 이후의 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힘.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계속 찾아보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모델을 선정하는 기준?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순수하면서 귀엽고, 보는 이를 두근거리게 할 수 있는 여자면 되죠. 물론 미성년자는 안 됩니다.” 그는 이후에도 미소녀 시리즈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고,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 그의 사진이 궁금하다면 검색창에 ‘로타’라는 이름을 쳐보면 된다. 꽃잎이 활짝 피어나는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사진이다.

슈트 본인 소장품, 안경 Rimrock, 타이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와인 Textbook Merlot by CSR Wine.

마시는 게 일이다
설원국(와인 평론가)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와인 산업은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그 규모에 비해 와인을 평가하는 시장은 황폐하기만 했다. 좋은 소믈리에야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와인을 감별할 수 있는 로버트 파커 같은 전문 평론가는 전무했다. 대부분이 해외 평론가들의 평을 옮겨오기 바빴다. 설원국은 한국에서 국제 와인 품평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와인을 마시고 평가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한 해에 전 세계 10개 대회에서 초대를 받을 정도다. 그의 어머니는 주류 수입이 개방된 1988년부터 와인을 수입한 1세대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와인을 자주 마신 그는 2010년경 우연히 독일의 와인 품평회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어졌다. 한 품평회에 직접 이력서를 보내 응답을 받은 이후 전 세계에서 활동하며 와인 평론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자신의 미각을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참석한 평론가들과 전혀 다른 평가를 내놓으면 한국을 우습게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 제품을 보는 시각은 비슷했다. 해외의 유명 평론가와 자신의 평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세계 각국의 와인 매거진에서 평론 의뢰도 쏟아질 정도다. 좋은 와인을 마시며 돈을 번다니, 이렇게 꿈같은 직업이 또 있을까. “물론 저를 부러워하는 분들이 많지만, 쉽게 버는 것만은 아니에요. 매 순간 최대한 예민하게 반응하고 느껴야 하니까. 유럽의 품평회에 가면 심사위원들의 성적표를 매겨서 보내줘요. 저도 매번 평가받는 거죠. 그리고 살이 쪄요. 와인이 칼로리가 꽤 높거든요. 하하.”

스웨이드 재킷 Comodo Square, 시계 Givenchy by Gallery O’clock.

세상의 모든 차를 탄다
이근욱(테스트 드라이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것,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싶은 것은 남자의 본능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차를 좋아한다. 하지만 한 해에도 수백 종이 쏟아져 나오는 차를 다 타보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신차를 보며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다. 이근욱은 ‘한국타이어’ 소속 테스트 드라이버다. 자사 타이어를 장착하는 대부분의 차를 시험 단계에서 타고 트랙을 돈다. 해당 자동차 브랜드의 공장 근처에서 테스트를 진행하다 보니 해외 출장은 일상이다. 매년 최소 3개월 이상을 해외의 트랙에서 보낸다. 이 남자가 한 해에 테스트하는 차량은 최소 40종.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이어가 건네는 말을 온몸으로 예민하게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이어는 말하자면 자동차의 발목이다. 해당 차량의 성격을 충분히 반영해야 하고, 안락함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긴박한 상황에서도 충분한 접지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이어의 극한을 테스트해야 하기에 사고 위험도 배제할 수 없지만 전 세계 수많은 차종을 가장 먼저 경험할 수 있어 업무 만족도는 높다. 직접 경험한 수많은 차량 중 가장 맘에 든 차를 묻자 포르쉐 마칸을 꼽았다. 워낙 좋은 차라 테스트 내내 기쁜 마음으로 임했단다. 좋은 타이어의 기준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순정 타이어가 가장 좋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테스트 드라이버들이 몇 년간 엄청난 테스트를 거친 뒤에야 장착하니까요. 그 차의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하는 타이어라고 할 수 있죠.” 그는 지금 국내 레이싱 리그인 KSF 참가를 꿈꾸고 있다. 일을 통해 쌓은 경험을 개인적 성취로 이어가려는 마음이다. 아마 곧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드라이버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셔츠 Dolce & Gabana, 시계 Givenchy by Gallery O’clock

향기를 만든다
김승훈(메종 드 파팡 대표)

사람의 인생은 때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곤 한다. 김승훈은 어릴 때 스노보드 선수였다. 운동을 그만둔 뒤 일반 회사에 다니다 우연히 향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연을 맺게 됐다. 향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직접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고 싶어졌고, 그렇게 한국에는 드문 향수 전문 숍 ‘메종 드 파팡’을 오픈했다. 그렇다고 실험용 플라스크 같은 걸 들고 직접 향수를 만드는 건 아니다. 하나의 컨셉을 정하고, 그걸 해외에 있는 조향사에게 맡긴다. 컨셉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다. 시 한 줄처럼 막연한 추상의 단계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그걸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외의 조향사와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향수를 만들어나간다. 조향이 워낙 폐쇄적인 산업이라 시작이 쉽진 않았지만 신뢰가 쌓이면서 조금씩 단계를 밟아왔다.
늘 다양한 향기에 취해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많은 분들이 조향을 아트나 음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는 IT업계와 비슷하다고 얘기해요.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쏟아야 하는 시간과 비용이 크고, 제품이 나온 뒤에도 리스크가 상당한 편이에요.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죠.” 김승훈은 올해 자신의 이름을 건 향수를 런칭할 예정이다. 그의 말대로 ‘집요한’ 성격이라 아직 완전히 맘에 드는 향을 만들지 못했다. 아직 작은 회사라 유통 같은 것도 걱정이다. 하지만 그 꿈을 접지는 못한다. “기존의 향수들이 소비자의 수요를 다 채워주긴 힘들어요. 거대 브랜드의 향수가 채우지 못하는 작은 틈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향이란 결국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장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