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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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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개의 착점(着點)으로 나뉜 바둑판, 이 치열한 전장에서 수많은 기사가 자신만의 바둑을 두며 떠오르거나 사라져갔다. 한국 바둑사에서 가장 우뚝한 7인의 이름을 모았다.

구글은 왜 많은 기사 중에서 이세돌을 상대로 골랐을까? 구글이 중국에서 사업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 중국 기사들은 제외했다고 하더라도 왜 지난 2년간 한국 랭킹 1위 자리를 지킨 박정환이 아니라 이세돌이었을까? 언론에서 추측한 것처럼 이세돌의 스타일, 바둑 용어로는 ‘기풍(棋風)’이 특별했기 때문일까? 알파고와의 제4국을 승리로 이끈 제78수는 정말 ‘신의 한 수’였을까? 이세돌이 아니었다면 인정사정없는 기계에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했을까? 역사에 ‘만약’이 존재하지 않듯, 이미 끝나버린 알파고와의 대국에 대해 이런 의문을 품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좀 더 의미 있는 질문을 해보자. 과연 이제껏 인간이 당연히 여기던 ‘기풍’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일까? 이세돌 같은 초일류 고수뿐 아니라 대한민국에만 300명쯤 있는 프로 기사 대부분은 지금까지 바둑판 위의 형세를 판단할 때 “누가 유리한지는 기풍이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라고 말하길 좋아했다. 기존의 바둑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결과가 나오면 개별 기사의 스타일을 들먹였고, 심지어 이세돌이 알파고에 진 것은 그가 본인의 스타일대로 바둑을 두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바둑판 위의 많은 곳이 결정되지 않은 초반이나 중반의 수들은 정밀한 계산에 근거한 분석에 의해 도출되기보다는 ‘기세’나 ‘흐름’ 같은 애매한 개념에 기반해 두었다. 1202개의 CPU(중앙제어장치)와 176개의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사용했다는 알파고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세나 흐름을 타지 않는다. 스타일도 없고, 기풍도 없고, 취향도 없다. 어쩌면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변명일 뿐, 애초부터 바둑은 정밀한 계산에 의해 정답을 도출해낼 수 있는 분야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분하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우리 모두 인간인 것을. 그리고 그 덕분에, 정답을 알 수 없다는 한계 덕분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바둑을 둔다. 맞는지 틀리는지는 둬봐야 안다. 우리 인생처럼.

이세돌한 줄기 불꽃처럼
현재 중국의 1인자인 커제 9단이 이세돌과의 대결을 앞두고 “이세돌이 승리할 가능성은 5%도 안 된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지만 자신감으로 보면 이세돌이 훨씬 선배다. 이세돌은 만 서른이 되기 전인 2012년 출판한 자서전 <판을 엎어라>의 첫머리에서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단언했다. 그 젊은 나이에 자서전을 내는 것도 그렇지만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엄청난 자신감의 발로다.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자신감이 아닐까? 이번 알파고와의 대결에서도 많은 명언을 남겼지만, 그 전까지 이세돌의 가장 유명한 말은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였다. 이세돌은 중요한 대국에 앞서 절대로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위대한 중국 기사를 꼽으라면 여전히 1, 2위를 다툴 녜웨이핑 9단도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했다. 다른 개인 종목의 경우 코치가 선수의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투지를 북돋아줄 수 있는 데 반해 바둑은 철저히 혼자서 분투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녜웨이핑 본인도 전성기에 지금 형세가 어떠냐는 질문에 “이제부터 내가 흑으로 두면 흑이 이기고, 백으로 두면 백이 이긴다”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알파고와의 대국이 있기 약 5개월 전, 각종 세계 선수권전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둔 이세돌은 바둑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마흔까지는 정상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나이 만 33세, 앞으로 7년이니 짧지 않은 세월이다. 수학적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기계와 달리 인간은 자신에 대한 예측을 반영해 변화하는 존재이니 그의 이런 꺾이지 않는 자신감이 기폭제가 되어 정말 마흔까지 정상을 지켜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창호신이라 불린 사나이
알파고와의 대국이 있던 기간 중 이세돌 다음으로 언론에서 많이 언급한 기사는 이창호였다.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를 갈릴레오나 뉴턴에 비유하는가? 조훈현은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창호와의 첫 대국에서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홉 살짜리 꼬마가 벌써 자기 바둑을 둘 줄 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이후 이창호의 ‘자기 바둑’은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창호는 자기가 둔 바둑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사들은 대국을 한 후 처음부터 다시 놓아보는 복기를 통해 공부하는데, 이창호는 그날 자신이 둔 바둑도 다시 놓아보지 못했다. 평범한 기사들도 다른 사람이 둔 수백 판의 기보를 외우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둔 수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잘 모르겠다”거나 “그 수도 좋은 것 같다” 등으로 대답했다. 더 답답한 것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으려 하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일류 기사들은 자신이 왜 이창호에게 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별것 아닌데 괜히 겁먹어서 그렇다”, “이창호는 가만히 있는데 상대가 제풀에 무너지는 것 같다”, “제자랑 두니 조훈현이 평소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다”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없었다. 그들은 그냥 졌고, 이창호는 입단 후 십수 년간 거의 매년 승률 80% 이상의 기록을 세우며 국내 기전, 국제 기전 할 것 없이 모든 기전을 휩쓸었다. 그렇게 강한 조훈현이 맥없이 무너지자 답답한 마음에 조치훈이 “제자라고 너무 봐주는 거 아니냐”고 했다가 “네가 창호랑 둬보지 않아서 그래”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얘기는 실화다. 직접 합을 겨루어보지 않고 기보만 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힘, 이창호는 그런 힘을 가진 존재였다.

조훈현섬광 같은 바둑
작고한 바둑 칼럼니스트 이광구는 “조훈현과 마주치면 언제나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어떤 섬광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조훈현이 무협지에 나오는 경신술과 같은 빠른 걸음으로 휙 스치고 지나가면 전류에 손이 닿은 듯한 짜릿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거짓말 같은 얘기지만 정말 그런 것이 느껴진다. 보통 진정한 고수는 자신의 내공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훈현에게서는 시도 때도 없이 내공이 발산된다. 그가 입단한 건 만 9세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입단 후 6개월 만인 1963년 2단 승단, 6개월 뒤 일본으로 유학 가 1966년 다시 입단, 1967년 2단, 1969년 3단, 1970년 4단, 1971년 5단으로 승단했고, 승률도 90%에 육박했다. 병역 문제로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이후 매년 5~6개의 기전에서 우승, 1980년에는 국내 타이틀 9개를 석권했고, 1982년에는 한국 최초로 9단으로 승단하는 동시에 10개의 타이틀을 거머쥔 전관왕, 1983년까지 6년 연속 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 수상, 1986년 11개의 타이틀 전관왕을 달성했다. 1989년에는 4년에 한 번씩 개최해 바둑 올림픽이라 불리는 응씨배세계바둑선수권에서 우승해 김포공항에서 한국기원이 있는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1992년 통산 124회 타이틀 획득으로 세계기록 수립, 1993년에는 패왕전 우승으로 한 기전 최다 연패 기록인 16연패 수립, 1994년 후지쓰배 우승으로 세계 대회 사이클링 히트 달성, 현재까지 통산 160회 타이틀 획득 등 업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다. 느리고, 말이 없고, 복기도 못하고, 바둑 이외에는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제자 이창호와는 정반대로 조훈현은 빠르면서도 정확하고,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거의 모든 두뇌 게임에서 지는 법이 없었다. 이창호에게 지면 왜 졌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조훈현에게 지면 모든 기사가 쉽게 수긍한다. 그냥 강하고, 그냥 뛰어나다.

조치훈인생을 건다는 것
<목숨을 걸고 둔다>는 1981년 출간한 조치훈의 자서전이다. 그 제목처럼 그는 종종 목숨을 걸고 바둑을 뒀다. 네 살에 바둑에 입문해 여섯 살에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난 조치훈이 처음으로 목숨을 건 것은 열한 살 되던 해에 열린 프로 입단 대회였다. 한국 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남철이 삼촌이고, 친형도 프로 기사였으며, 스승은 그 유명한 기타니고, 기타니 문하생들의 200단 돌파 기념 축하연에서 당시 일본 1인자인 린하이펑에게 5점 접바둑을 두어 이긴 것으로 입문기를 치렀다. 그야말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수재 소년이었던 조치훈은 그러나 유학 5년째에도 입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치훈을 옆에서 보살피던 형 조상연은 이번에도 입단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지만 조치훈은 만일 이번에도 입단하지 못한다면 창피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심 덕분일까, 그해에 조치훈은 입단에 성공했고 그가 세운 일본 최연소 입단 기록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마지막이다, 더 이상 뒤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1983년 조치훈은 일본 상금 랭킹 1위 기전인 기성전에서 ‘괴물’이라는 별명을 지닌 후지사와 슈코에게 도전한다. 후지사와는 오직 기성전을 위해 산다고 할 만큼 1년 내내 술과 도박에 빠져 지내다 기성전 시즌만 되면 모든 것을 끊고 바둑에만 전념하는 방식으로 1기부터 6기까지 6연패를 하고 있었다. 7기 역시 후지사와가 첫 3판을 모두 이겨버린다. 하지만 막판에 몰려야 힘이 나는 조치훈은 이후 파죽의 4연승으로 기성 타이틀을 획득한다. 이때부터 3연패 후 4연승은 조치훈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조치훈은 1986년 기성전 도전기에서 다시 한 번 목숨을 걸고 대국을 한다. 대국을 열흘 정도 앞둔 시점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었지만 일본 기원의 관례상 대국을 미룰 수 없었다. 의료진은 당연히 기권을 권유했지만 조치훈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두 눈과 한 손만 있으면 바둑을 둘 수 있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역사적인 휠체어 대국을 강행한 조치훈은 바둑에 인생을 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사람이다.

서봉수야인의 노래
앞서 소개한 기사들의 이력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일류 기사들은 대개 아주 어린 나이에 바둑에 입문하고 열 살을 전후해 프로 기사가 되었다. 조훈현과 조치훈이 네 살, 이세돌은 다섯 살에 입문했고, 이창호도 일곱 살에 바둑을 배웠다. 하지만 서봉수는 달랐다. 그는 15세에 처음으로 바둑을 접했고, 17세에 입단에 성공한다. 동갑인 조훈현, 세 살 아래인 조치훈이 일본에서 유학한 반면 서봉수는 유학 경험도 없고, 심지어 프로 기사에게 사사한 적도 없다. 1972년 조남철을 누르고 당시 최연소 명인이 된 순간부터 줄곧 ‘순국산’, ‘된장 바둑’, ‘잡초’, ‘야전사령관’, ‘야생의 표범’ 등의 별명으로 불린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바둑이 성장하는 속도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기원에서 바둑을 두는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가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대만에서 열린 동양 3국 청소년 바둑 대회에 참가해 우승했고, 그로부터 1년 뒤 프로에 입단했다. 명인전에서 우승을 거둔 것은 입단 후 1년 8개월이 지난 19세 때였다. 비록 그 모든 기록은 이후 이창호에 의해 깨졌지만 당시만 해도 이는 한국 바둑 사상 최연소 우승, 최단기간 우승, 최저단 우승 등 각종 기록의 산실이었다.
이후 1970년대는 서봉수의 시대일 뻔했다. 동갑내기 조훈현이 군대 문제로 (하필 서봉수가 명인을 획득한 바로 그해에) 귀국하지만 않았다면. 어쨌든 서봉수와 조훈현은 숙명의 라이벌로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바둑계를 주름잡았고, 비록 언제나 2인자였지만 서봉수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전성기인 1970년대 중반 서봉수가 한 말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이후 특히 뇌리에 남는다. “만일 바둑의 신이 있다면 그의 눈엔 승부수니 기세니 하는 따위의 애매한 말은 가소로울 것이다. 이런 말은 수읽기가 완벽할 수 없기에 생겨난 말에 불과하며 신의 눈으로 본다면 오직 정수와 실수만 있을 뿐이다.” 마치 40년의 세월을 초월한 듯한 이 말이 ‘순국산 잡초’ 서봉수의 입에서 나왔다니 놀랍지 않은가!

유창혁한 줄기 바람처럼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TV 대국 해설로 다시 한 번 전국적 관심을 모은 유창혁은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와 함께 4인방으로, 이창호의 독주 시기에는 유일한 대항마로 인정받던 기사다. 1984년 만 18세에 입단, 1988년 무적에 가깝던 조훈현을 꺾고 대왕전에서 우승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50대에 접어들어 예전만 못하지만 준수한 외모에 날카로운 공격을 주 무기로 하는 기풍 덕에 ‘일지매’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다.
사실 그는 서봉수만큼은 아니지만 야인 출신이다.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도 아니고, 일본 유학파는 더더욱 아니고, 부모나 형제 중 바둑을 잘 두는 사람도 없고, 유복한 집안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만 10세인 1976년 어린이 국수전에서 우승한 것, 그리고 1979년 성인 대회인 학초배에서 우승한 것은 그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학초배 우승 직후 “목표가 없어졌다”며 돌연 바둑계에서 사라졌다가 3년 뒤 다시 홀연히 나타나 아마 국수전에서 우승한 것, 아마 국수 자격으로 출전한 세계 아마 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아마 최강이던 일본 기사를 물리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일지매’라는 별명은 그의 외모나 기풍보다는 이러한 그의 이력에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비록 국내 대회에서는 이창호에게 많이 밀렸지만, 유창혁은 특히 세계 대회에 강했다. 1993년 제6회 후지쓰배에서 조훈현을 꺾고 우승해 그때까지 일본 기사가 독식하던 타이틀을 처음으로 한국에 가져온 이래 1996년 응씨배 우승, 2000년 삼성화재배 우승, 2001년 춘란배 우승, 2002년 LG배 우승 등으로 세계 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이처럼 세계 대회에 강한 그인 만큼 현재 담당하고 있는 국가 대표팀 감독직은 그에게 꼭 맞는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박정환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이세돌의 27개월 연속 랭킹 1위 기록을 깨고 28개월째 한국 랭킹 1위에 올라 있는 박정환이지만 생각만큼 그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 월간 <바둑>의 김정민 기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4형제 중 3명이 하버드에 들어간 상황에서 고3이 된 막내”라고. 선배 1인자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이 세 사람이 획득한 타이틀 수의 합이 약 350개. 올해 만 23세가 된 박정환이 짊어져야 할 1인자의 무게다.
기록으로 보았을 때 박정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6세에 우연히 바둑에 입문, 7세에 수많은 프로 기사를 배출한 바둑 명문 권갑용도장에 들어간다. 보통 사람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에 프로 기사를 인생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만 10세에 한국기원 연구생에 들어가 곧바로 1조로 직행한 것도 놀라운 기록이다. 한국기원 연구생 1조는 총 120명의 연구생 중 가장 기량이 뛰어난 12명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1조 연구생이 웬만한 프로 기사보다 잘 둔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뚫고 13세에 입단, 2009년 바둑대상 신예기사상 수상, 2010년에는 17세의 나이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해 금메달리스트로서 병역 특례를 받았고, 같은 해에 최연소 9단 승단, 이듬해에 후지쓰배 우승, 2015년 LG배 우승, 국내 대회 통산 15회 우승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한국의 바둑 팬은 이 정도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중국의 1인자, 1997년생 커제 정도는 꺾어줘야 하지 않을까? 현재까지 두 기사의 전적은 3 대 3. 올해 최소 네 번의 대국이 예정되어 있어 바둑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남치형(명지대학교 바둑학과 교수) 일러스트 이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