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애 ‘을’이 된 이유
지금 어떤 30대 남자는 얼마나 더 쪼그라진 삶을 사느냐의 문제로 연애 ‘을’이 되기도 한다.
내 여자친구는 운다. 어제도 울었고, 그제도 울었다. 아무래도 눈을 보며 대화로 풀어도 부족한 문제를 울고불고 어물쩍 해결하려는 것 같다. 한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길 대략 열 번쯤 반복하다 최근 가까스로 결혼한 친구는 말했다. “그런 앤 결혼하고도 똑같다. 정리해버려. 아니면 하자는 거 다 들어주든가. 우리 알지? 요새도 싸울 때 헤어지자는 말 하는 거. 걔 정말 갑질 장난 아니네.” 경험이 묻어나는 친구의 조언. 하지만 한 귀로 흘려보낸다. 거기엔 인생의 쪼그라짐까지 경험하며 사는 너와는 결코 같은 노선을 밟지 않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연애에서의 ‘갑질’? 그런 거라면 나도 할 말은 많지. 그간 내 연애 ‘갑질’에 나가떨어진 여자만 모아도 ‘아육대’는 가능하다고.
20대 시절, 사실 난 연애 권력에서 늘 ‘갑’이었다. 내게 관심을 표하는 여자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다 커피 몇 잔, 영화 두어 편 같이 보며 그녀를 내 영역에 들일지 말지 결정했다. 메뉴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 여자의 입맛보다는 ‘내 기분’이 중요했다.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보다 “나도 좋아해”라는 답을 더 자주 했다. 마침표 대신 말줄임표가 이어지는 대화. 사랑에 닿을 듯 말 듯 모호한 관계. 원래 갑의 연애는 상대의 마음을 일부러 읽지 않음으로써 얻게되는 ‘무책임함’이 생명이다. 비참하게 여자 앞에서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여자를 결코 애태우지 못하는 행동은 연애에 활기를 주지 못한다고 난 생각했다.
전근대적이라고? 확실히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난 남자가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에게 다짜고짜 “시간 좀 있습니까?”라고 묻던 시절, 여자들이 뭐 이런 무례한 녀석이 다 있나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못내 끌려가 차 한잔 마시던 시절, 그 모든 것이 결코 예의 없거나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던 오래전의 어떤 마초적 연애에 낭만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런 일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연애는 사회적 지위와 부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취 가능했던 ‘아재’들의 ‘추억팔이’일 뿐이다.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이 함께 만든 ‘성숙(成熟) 사회’에 가장 적합한 나 같은 초식계 남자들에게 이전의 그런 연애는 과분하다. 심지어 데이트와 결혼에 상대가 얼마를 쓰느냐의 문제로 일부 남자의 자국 이성 혐오증이 극에 달한 요즘 같은 시기라면 더더욱.

이런 연유로 난 지금 반자발적 ‘을’이 됐다. 여자친구도 늘 날 갑인 듯 따랐지만, 결정적 순간에 권력을 쥐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관계를 맺어주길 바랐다.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년엔 꼭 결혼하래”나 “네가 나를 가볍게만 여기는 것 같아 서운해”라는 이단 콤보 뒤엔, 여자라는 생명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생화학 무기인 눈물 공격이 이어졌다. 물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시간이 더 필요할 뿐.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건 통하지 않았다. 영국 속담에서 여자의 눈물과 강아지의 절룩거림을 믿지 말라고 했는데, 여자친구는 정말 발목을 다친 강아지 같은 얼굴로 울며 모든 문제를 나의 불찰과 불성실로 돌려버렸다.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을이 된다지만, 이건 문제가 좀 달랐다. 이런 연애라면 상대로 인해 늘 쪼그라진 삶을 사는 자가 을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이런 문장을 읽기도 했다. “철저히 을이 돼라. 지금 당장 그녀를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의 본질에 집중하라.” 안 그래도 을이라 고생인데 뭐? 더 철저한 을이 되라고? 이건 반 컵 남은 물을 “반밖에 없네”라고 하지 않고, “반이나 남았네”라고 하는 자기 위안이나 다름없는 말 아닌가. 아마 이 글을 쓴 남자는 매일 밤 전 여자친구의 인스타그램이나 들추는 찌질한 녀석이거나, 그녀의 모호한 카톡 하나에 쪼르르 달려나가 그 밤 또다시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차는게 일상인 녀석일 확률이 높다. 아, 그런데 다시 자세히 살피니 이 글은 사실 을을 호구로 여기는 생각부터 바꾸라고 말하고 있었다. 대개 사랑이 대상과의 문제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자기 욕망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또 자신의 욕망을 성찰할 때 대상과의 문제도 풀 수 있다고. 그 밤, 난 심한 어지럼증을 호소하다 이불을 심하게 걷어찬 채 깊은 잠에 들었다. 새벽 1시. “나 누웠어.” 언제부터인가 여자친구는 자신의 상태를 카톡 메시지로 알려왔다. 그게 무엇이 됐건 나의 모든 일과를 지금 당장 종용하겠다는 울림. 기초 화장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보냈을 그 메시지에 답하지 않으면 또다시 울었다. “나 자?”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듯한 빠른 동작으로 나도 누웠음을 알리는 전화를 건다. 이제 막 컴퓨터를 켠 것도 숨기고, 실은 샤워조차 안 했다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그러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절대 끝나지 않을 사랑과 결혼에 대한 칠흑 같은 대화. 그리고 갑을 또다시 울리는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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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에도 을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을의 연애는 여기에‘고달프다’라고
적는 것보다 훨씬 더 고달프다.
이건 단순히 누가 상대를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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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권력 게임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연인 사이에도 을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을의 연애는 여기에 ‘고달프다’라고 적는 것보다 훨씬 더 고달프다. 이건 단순히 누가 상대를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결혼과 서로에 대한 관심 문제로 한없이 쪼그라진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을’일 확률이 아주 높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일러스트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