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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발견과 경험

LIFESTYLE

캘리그래퍼에게 멋스러운 손글씨를 배우고, 낯선 도시에서 미술관을 누빈 피처 에디터들의 이런 문화생활.

최지웅 디자이너가 영화 장르에 적용해 그린 <노블레스> 로고를 에디터가 똑같이 따라 하며 응용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 사진 보라

손의 쓰임/ Editor 김재석
‘왕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말처럼 구차한 것도 없겠다. 굳이 저 단어를 붙여 한마디 하자면, 나는 ‘왕년에’ 글씨를 좀 예쁘게 썼다. 하지만 기자로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하루의 시작과 끝이 된 지금은, 말끝을 자연스럽게 흐리게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포털 사이트에 ‘손글씨’ 혹은 ‘캘리그래피’라는 단어를 입력해보면, 얼마나 많은 이가 손을 직접 움직여 쓴 (사실은 그린 것에 가까운) 글씨를 통해 가까운 과거를 추억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자판을 두드리면 새겨지는 폰트들이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의 어떤 형태라도 있는 것일까?
지난 연말, 지인들에게 카드와 편지를 쓰며 ‘참 글씨 못 쓴다’ 싶었고, 그래서 문득 캘리그래피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최지웅 디자이너가 떠올랐다. 아마 전 국민이 누구나 한 번쯤 어딘가에서 그의 손글씨를 봤을 것이다. 프로파간다의 홈페이지(propa-ganda.co.kr)에서 그가 작업한 캘리그래피를 확인하면, ‘아!’ 하고 외마디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많은 작품에 참여해왔다. 주로 영화, 드라마의 포스터 작품으로, 그의 흘려 쓴 손글씨가 들어간 포스터는 빈 벽에 하나쯤 붙여놓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최근 프로파간다에서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작업한 영화 로고 타이틀 레터링만 모은 아카이브 북을 출간해 ‘완판’시키며 큰 인기를 끌었다. 2014년 4월 <노블레스> 지면을 통해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기사로 연을 맺은 터라, 그에게 캘리그래피를 가르쳐줄 수 있는지 불쑥 연락을 해봤다. 뜻밖에 대답은 짧고 간단했다. “네. 사무실로 오세요.”
일일 선생님인 그의 지시에 따라 문구점에서 서예용 붓을 한 자루 사서 신사동에 있는 프로파간다 사무실을 찾았다. 사전에 전화 통화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하면 좋을지 논의한 끝에, 우리는 ‘노블레스’의 로고 타입을 영화 장르에 적용해 몇 가지로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테면 로맨틱 코미디 스타일의 ‘노블레스’, 슬픈 드라마풍의 ‘노블레스’, 웅장한 역사물의 제목 같은 ‘노블레스’ 말이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가 프로파간다에서 발표한 캘리그래피 작업의 시안과 즐겨 사용하는 재료를 꺼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작업한 것 중에서 최종 시안을 결정합니다. 개별 글자를 조합해 만들기도 하고요.” 그는 어떤 의도에서 이런 글씨를 쓰게 됐는지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그가 A4와 A3 종이에 크레파스, 사인펜, 먹과 붓을 이용해 몇 가지 타입의 ‘노블레스’ 로고를 척척 그려냈다. “우아하게 한번 해볼까요? 그리고 이건 아이 글씨처럼 귀여운 거예요. 글자 사이 간격을 넓혀서 약간 삐딱하게 그리면 귀여운 느낌이 나요. 요건 붓으로 아주 거칠고 힘 있게….” 태초의 신이 ‘말씀’에 따라 천지를 창조했듯, 그의 말에 따라 손을 움직여 더없이 적당한 모양의 캘리그래피를 만드는 장면을 입을 벌린 채 지켜봤다. 독자에게 그날 수업을 통해 완성한 결과물을 전격 공개하겠다는 나의 야무진 꿈도 깨지고 말았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의 사무실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손글씨, 그거 모양 예쁘게 잘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왕년에 나도 글씨 좀 썼는데….’ 하지만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등에 땀이 날 정도로 무안해졌다. 특히 한 번에 2개의 획이 나오는 펜으로 리본과 같은 선을 그리며 우아한 버전의 ‘노블레스’ 레터링을 만들 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한두 번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잘하네요!”라며 끝까지 격려해준 최지웅 디자이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온 저녁, 샤르자에 드리운 아름다운 석양

아랍에미리트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샤르자 아트 뮤지엄 입구

아랍 미술에 빠진 하루/ Editor 안미영
비행기를 타기 전 몇몇 지인에게 샤르자로 떠난다는 문자를 보냈을 때, 그들은 마치 우주로 떠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랍에미리트에서도 아부다비나 두바이가 아닌 샤르자에 가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아랍 미술의 중심지’라는, 나 또한 아직 확인하지 못한 수식어를 몇 번 사용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최소한 하루는 미술관만 둘러보는 시간을 갖겠다고.
그래서 출장 일정을 소화하고 하루 시간을 냈다. 우선 가장 큰 미술관으로 가보자는 생각에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15분이 채 되지 않아 그가 어디에 내리겠느냐고 물어왔다. 지도를 보니 그곳은 예닐곱 개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자리한 헤리티지 앤 아트 지구(Heritage & Arts Areas)였다. 그러니까 여기가 베를린에서 박물관이 모여 있는 박물관 섬(Museuminsel)이나 빈의 복합 문화 공간 뮤지엄 쿼터(MQ) 같은 문화 구역인 모양이다.
택시에서 내리니 먼저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중앙의 돔형 지붕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반짝이는 이 건물은 샤르자 이슬람 문명 박물관(Sharjah Museum of Islamic Civilization). 과학, 종교, 예술 등 분야별로 전시한 작품은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이슬람 캘리그래피, 세라믹, 화폐, 코란, 고지도, 조각, 천체관측 기구 등 5000점 이상의 공예품과 유물이 과연 박물관 이름처럼 이슬람 문명을 아우른다 할 정도로 방대한 컬렉션이었다. 한산한 공간은 진지하게 이슬람 문화를 느끼기에 충분히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아쉬운 점이라면 여행자의 시간이 한정적이란 사실이랄까.
유물을 봤으니 그림을 감상하고 싶어 발걸음을 샤르자 아트 뮤지엄(Sharjah Art Museum)으로 옮겼다.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만리 길을 걸은 심정으로 도착한 샤르자 아트 뮤지엄은 쾌적한 환경에 기대 이상의 전시로 방문객을 반겼다. 이쯤 되니 신기했다. 건물 안이나 밖이나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도시지만 미술관에만 들어서면 어마어마한 작품이 있고 활발한 전시가 개최 중이다. 1997년 개관한 샤르자 아트 뮤지엄은 아랍에미리트와 다른 중동 국가의 현대미술 작품을 상설 전시한다. 수세기 전 아랍 풍경을 묘사한 회화처럼 시대상을 드러내는 작품을 비롯해 아랍 정취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 많았다. 그리고 때마침 개최 중인 레바논 작가 칼릴 지브란의 드로잉 특별전에 다다른 순간, 내가 ‘전시운’이 꽤 좋은 여행자라는 걸 깨달았다. 지브란이 화가로서 예술 세계를 드러낸 귀한 작품이 마치 한 편의 문학작품처럼 이면의 스토리를 상상하게 했다.
뮤지엄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Sharjah Art Foundation)에 도착하자 빛의 전시 가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개최한 대규모 그룹전을 샤르자로 옮겨온 것인데, 같은 작품이라도 공간이 바뀐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고대 유적지를 거닐 듯 좁은 골목을 통과해 9개의 건물을 이동하며 보물찾기하듯 올라푸르 엘리아손, 제임스 터렐 등 아티스트 20명의 찬란하고 신비로운 설치 작품을 감상했다(이 전시의 참여 작가 중 세리스 윈 에번스와 카를로스 크루스-디에스의 작품은 현재 한남동 디뮤지엄에서 전시 중이다).
샤르자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대부분은 무료 관람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이니 무료로 감상하라는 의도이리라. 샤르자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작품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비로소 붉은 석양이 드리운 풍경이 펼쳐졌다. 낮의 태양이 강렬한 만큼 저녁의 석양은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컬러였다. 샤르자가 중동의 아트 허브란 말에 마음 깊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과 도시 풍경 모두 말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