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탁의 결의
애초 이야기는 하나다. 하지만 여러 콘텐츠로 기획한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던지면, 다른 한 사람이 그것에 살을 붙인다. 기존의 협업을 저만치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협업을 선보이는 둘을 만났다.
‘원탁’으로 협업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김탁환(왼쪽)과 이원태
2006년 싱가포르의 밤, 여행을 떠나온 두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한방에 묵었다. 한 사람은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소설가 김탁환, 또 한 사람은 방송국에서 세상만사를 이야기로 만들던 PD 이원태였다. 김탁환은 애초 평론가로 살다 소설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를 펴내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이후 <불멸의 이순신>과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밀림무정> 등의 작품에 필력을 집중했다. 이원태는 MBC PD 출신으로 이전에 온갖 진기한 이야기를 모아 픽션으로 구성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아름다운 TV 얼굴> 등을 만든 전력이 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소리는 지겹도록 들어왔다.
동갑내기인 둘은 서로의 인생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금세 친해졌다. 또 둘 다 콘텐츠를 만들어온 전력 탓인지 이내 시끌벅적 떠들며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냈다. 훗날 김탁환이 소설로 낸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 <노서아 가비>다(배우 김소연과 주진모 주연의 <가비>라는 영화로도 제작했다). 둘은 이후에도 따로 또 같이 만나 일했다. 영상 문법을 잘 아는 이원태가 재미난 이야기를 던지면, 골방에서 소설을 쓰던 김탁환이 그것에 살을 붙였다. 마침 한국에서도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개념이 슬슬 떠오르는 시기였기에, 둘의 만남은 서로가 생각하기에도 트렌드의 정점을 달리는 듯했다.
2012년, 둘은 아예 정식으로 회사를 차렸다. 회사 이름은 ‘원태’와 ‘탁환’이 함께한다는 뜻인 ‘원탁’. 둘은 하나의 이야기가 성공하면 그걸로 영화도 만들고 드라마도 만들던 기존 방식을 잠시 미뤄두고, 애초부터 플랫폼별 특징에 따라 상품을 달리 만드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2014년 여름, 둘은 첫 결과물로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이란 이야기를 영화 시나리오로 먼저 써냈다. 조선의 밤을 지배한 검계의 대부 나용주와 권력의 정점인 왕의 결탁을 다룬 스토리다. 이는 영화(movie)와 소설(novel)을 합한 ‘무블(movel)’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했다. 시나리오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애당초 소설로도 전개가 가능하게끔 기획했다. 이런 시도는 사실 국내 콘텐츠 시장에선 유례없는 도전이었다. 두 작가의 공동 작업도 그렇거니와 출판과 영상을 포함한 원 소스 멀티 유스를 기획한 창작이라는 점도 그렇다. 근데 둘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일단 시장에서의 성적만 보면 별로 나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완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화 제작 계약을 맺었고, 가을엔 소설로도 출간돼 7000부 이상 팔려나갔다. “시나리오는 장면별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일종의 지도 구실을 하지만, 소설은 지도를 따라가며 디테일을 완성하는 과정이에요. 비슷한 듯해도 둘은 작법에서부터 차이가 나죠.” 김탁환의 말이다.
이들은 2016년 4월에 출간할 예정인 소설 <아편전쟁>을 이미 영화 판권 계약까지 마친 상태다. 판권 계약으로 따지면 타율 100%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타율이 좋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이원태가 말했다. “둘이 함께 떠올린 이야기 10개 중 9개를 버리니까요.” 덧붙여 그는 “실컷 공부해서 만들어놓은 이야기도 상당수는 버리고, 그 (버리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영화로 삼는다”고 실토한다. 이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큰돈이 들어가는 영화로 제작한다고 생각하면, 더 엄격해지고 바로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든다. 둘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걸까? “한 사람이 더 이상 못 쓸 때까지 쓰는 거예요. 다른 한 사람이 그걸 그대로 이어가고요. 사실 쓰는 사람은 작품 속에 몰입돼 큰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키보드를 놓은 사람은 다른 아이디어가 마구 생겨납니다. 뜻밖의 소재와 사건이 보이는 거죠. 그럼 그것을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글로 ‘털어내요.’ 근데 사실 작품 하나가 끝나면 그간 서로 고쳐 쓴 부분이 너무 많아 어느 부분을 누가 썼다고 하기도 뭐해요. 당연한 얘기지만, 중간에 소설이 바뀌면 시나리오도 변형돼요. 또 시나리오를 수정하면 소설도 새롭게 고쳐 씁니다.” 이렇게 말한 건 김탁환이다. 좀 더 덧붙이면, 둘의 작업에서 대중의 감각을 가늠하는 건 이원태다. 또 이원태의 한 줄짜리 발상을 다양한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세계로 바꾸는 역할은 김탁환이 맡는다. 한편 둘은 최근 개봉한 영화 <조선 마술사>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열하일기>의 여러 이야기 중 하나인 ‘환희기’에 박지원이 묘사한 청나라 저잣거리 마술사들의 이야기를 실마리로, 조선 마술사 ‘환희’가 ‘청명’ 공주와 사랑을 나누며 조선을 넘어 유럽까지 치닫는 활달한 이야기를 담았다. 원탁의 ‘무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이 이야기를 두 사람이 처음 떠올린 건 팀도 결성하기 전인 2010년이다. “<열하일기>에 보면 박지원이 청나라에 갔다가 마술 쇼를 보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눈이 확 뜨였던 거죠. 그 시대에 길에서 마술 쇼를 할 정도로 성행했다니, 그럼 조선에도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던진 얘기가 금세 작품으로 완성됐어요.” 이원태가 말했다.
사실 이 작품은 2011년 초 소설 초고가 나왔다. 한데 여러 가지 이유로 한참 묵혀놨다가 2014년에 꺼내 다시 1년을 만졌다. 영화는 2011년 원고를 토대로 발전시킨 거라 소설의 내용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러다 영화의 개봉을 앞둔 몇 달 전부터 웹 소설과 소설로도 공개해 인기를 끈 것. 특히 지난 9월 30일 연재를 마친 <조선 마술사> 웹 소설의 경우 첫 회를 시작하자마자 구독률 1위에 올라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고, 최종 구독 횟수는 7만 건을 넘어섰다. “모바일 웹 소설은 그곳만의 독법이 있어요. 재미있는 게, 한 회 분량에 흥미를 끄는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죠. 써놓은 소설을 단락별로 잘라 올리는 식으론 100% 실패해요.(웃음)” 김탁환의 말이다. 한편 이 작품은 한때 출판사(소설)와 모바일 플랫폼(웹 소설), 영화 제작사(영화) 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다시 말해 하나의 소스를 책과 웹 소설, 영화로 어떻게 탄생시킬 것인지 조율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던 것. 이는 장르와 매체 간 경계를 허물고, 이야기의 콘텐츠 확장을 시도한다는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학성 중심의 종이 책 소설과 대중성 중심의 웹 소설 시장 그리고 좀 더 넓은 층을 상대해야 하는 영화 시장은 창작자와 독자, 관객이 같은 듯 다르게 분리돼 있다. 아무리 이야기가 좋은 작가라 해도 그런 간극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한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여기 원탁의 김탁환과 이원태같이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를 만들어나가는 이들에겐 분명 새로운 소비자가 몰릴 거라는 것. 어쩌면 이런 결과야말로 진정 협업이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둘의 새로운 비즈니스를 기대한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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