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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인, 왕정치

LIFESTYLE

한국에 가슴 벅찬 우승을 안겨준 ‘프리미어 12’를 끝으로 2015년 모든 프로야구 경기가 막을 내렸다. 시즌이 끝나면서 야구 팬의 한숨도 늘었다. 2016년 시즌이 개막하는 4월 전에는 경기가 없어서다. 이런 현상은 야구의 강호 일본도 마찬가지. 갑자기 한가해진 야구 팬과 달리 선수와 코치, 감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구단 프론트는 본격적으로 바빠진다. 겨울에 잘 준비해야 다음 시즌 승리로 보상받는다. 지금까지 19번의 리그 우승과 7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는 2014년과 2015년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3연패를 위해 다른 어떤 팀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의 왕정치(王貞治, 오 사다하루) 회장을 후쿠오카 야후오크 돔 구장에서 만났다. 상기된 표정으로 “한국 매체와의 첫 인터뷰”라고 소감을 밝힌 그에게 우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축하한다”는 말부터 건넸다.

“한국의 거포 이대호가 뛰고 있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회장은 누굴까요?”라고 물으면 십중팔구 “모른다”고 한다. 그럼 “세계 최고의 홈런왕은?” 이 질문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정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800개도 넘을걸요.”
왕정치, 배리 본즈, 행크 에런, 베이브 루스, 앨릭스 로드리게스. 이 순서는 최다 홈런 세계신기록 1등부터 5등까지다. 왕정치 회장 868개, 배리 본즈 762개, 행크 에런 755개, 위인전에도 등장하는 베이브 루스가 714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앨릭스 로드리게스가 687개다. 왕정치 회장이 보유한 통산 홈런 868개라는 수치는 2위 배리 본즈의 홈런 수보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행크 에런의 메이저리그 통산 홈런 기록인 755개보다 100개 이상을 훌쩍 앞서는 대기록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외다리 기법’이라는 독특한 타법으로 1959년부터 1980년까지 22년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매년 약 39.5개의 홈런을 친 셈이다. 보통 프로야구 4번 타자에게 감독이 기대하는 건 3할 30홈런이다. 그 때문에 그가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뛴 1980년(사실상 운동선수로서 생명을 다했다고 보는 마흔 살이던) 시즌에도 여전히 ‘30개의 홈런이나’ 친 왕정치가 은퇴 의사를 밝힌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달랐다. “3할을 치면 잘하는 선수라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7할을 미스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찬스가 왔을 때 치지 못한다는 뜻이죠. 제가 은퇴할 때 주위에선 ‘아직 홈런 30개는 칠 수 있으니 선수 생활을 더 해라’라고 말했어요. 저는 반대로 ‘내가 왜 30개 홈런밖에 못 치게 되었는가?’라고 자문했습니다. 연습으로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정신적 한계 같은 거였죠.”

왕정치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인 ‘외다리 타법’

고교 야구를 휩쓴 명투수
그의 겸손한 고백과 반대로 왕정치의 체력, 그리고 체격은 중학교 때부터 유명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바꾼 사람 중 한 명으로 꼽는 스승 아라카와 히로시가, 스미다 공원 이마도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고 있는 중학생의 왕정치를 보고 고등학생으로 착각할 정도로 체격이 컸다. 당시 아라카와 히로시는 마이니치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선수였는데 왕정치를 보고 “졸업 후 와세다 대학교로 진학하는 건 어떠냐?”고 하자 왕정치가 “그 전에 우선 고등학교에 가야 합니다”라고 답한 일화는 야구계에서 유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중학교 시절부터 체계적인 야구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다니던 혼조 중학교에는 일단 야구부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에서 학생들이 야구, 축구 같은 단체 스포츠를 즐기는 방식은 우리나라의 일명 ‘엘리트 교육 방식’과 다르다. 일본은 오히려 ‘국민 체육’에 가깝다. 대부분의 아이가 집 근처 운동장이나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야구를 배우고 시합을 하며 말 그대로 스포츠를 ‘즐긴다’. 멋들어지게 유니폼을 맞춰 입고 고가의 수업료를 지불하며 감독과 코치의 엄격한 레슨을 받는 우리나라의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혼조 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육상부과 탁구부가 있었다. 운동에 소질이 있던 그는 평일엔 육상과 탁구를, 주말에는 집 근처에서 친구들과 모여 야구 시합을 하곤 했다. “여러 운동을 한 경험이 고등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야구 선수를 하면서 꽤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육상을 통해 다리 근력을 길렀고 탁구를 통해 반사신경이 매우 좋아졌으니까요.”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1학년 때부터 감독의 눈에 띄었고, 2학년 때는 봄의 고시엔 대회에서 전국 우승과 여름 대회에서는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등 투수로서 전성기를 보냈다. 3학년 때는 2경기 연속 홈런을 치는 등 타자로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졸업을 앞둔 그는 대학과 프로의 갈림길에서 프로 진출을 결심했고, 그 전부터 그를 눈여겨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그를 재빨리 낚아챘다. 1959년에 계약금 1800만 엔, 연봉 144만 엔, 등번호 1번을 달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왕정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전설의 외다리 타법
이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고등학생 시절 명투수로 이름을 날린 그가 어떻게 세계 홈런왕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번의 계기가 있다. 그중 첫 번째가 195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을 만난 것이다. “야구는 투수가 공을 던짐으로써 시작되는 경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꼭 투수를 하고 싶었어요. 선수라면 대부분 그럴 겁니다. 근데 그게 잘 던질 수만 있으면 아주 즐거워요. 오타니 쇼헤이(1994년생, 니혼햄 파이터스 소속, 162km의 강속구를 던지며 이번 국제 야구 대회 ‘프리미어 12’에서 상대팀의 혼을 빼놓은 신진 투수)처럼요. 근데 저는 고1 때보다 고2 때, 그리고 고3이 되면서 점점 공이 안 좋아졌죠. 사실 고2 때부터는 투수로서 점점 하향세로 접어든 셈입니다. 반대로 타자로서의 기량은 점점 나아졌죠.”
이런 상황을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놓칠 리 없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공을 던진 건 딱 2주입니다. 2주 정도 던지는 걸 보더니 감독님께서 ‘너는 투수 하지 마라’고 하시더군요.” ‘투수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그는 곧바로 일루수로 전향했다. 첫 목표는 ‘3할’이었다. 날아오는 10개의 공 중 3개를 안타로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배트에 맞히기만 하면 거의 모든 공이 담장을 넘어갈 정도로 배팅에 소질이 있는 그였지만, 프로 투수의 공은 역시 달랐다. 그들의 예리한 변화구와 빠른 직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개막 전 경기에서는 안타를 좀 쳤는데, 개막하고 나니 상대 투수의 공이 빨라지고 예리해지더군요. 보통 개막 전 시범 경기에서 투수들은 신인 타자를 만나면 치기 좋은 공을 던져줍니다. 그렇게 몇 번 던져보면 이 타자가 어떤 공에 약하고 어떤 공에 강한지 파악할 수 있죠. 그리고 시즌 시작과 동시에 칠 수 없는 어려운 공을 던지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른 그는 첫 프로 데뷔 후 무려 26타석 연속 무안타라는 부진을 맞봐야 했다. 그러나 미즈하라 감독은 꾸준히 그를 기용했다. 계속 시합에 나가야 상대 투수의 공에 익숙해지고, 그러면서 서서히 컨택 능력도 길러지기 때문. 그 믿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4월 26일, 그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당시 고쿠데즈 스와로즈 소속 투수던 무라타 겐이치가 던진 공을 올려 쳐서 공식 경기 첫 안타이자 결승 2점 홈런을 치며 그동안의 부담감을 떨쳐냈다. 그러나 그는 그해 홈런 7개, 타율 1할 6푼 1리라는 저조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연봉에 비해 저조한 성적으로 관중의 야유를 받았지만 그는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시합 때마다 감독 옆자리에 앉아 궁금한 것을 물으며 배워나갔다. “다른 선배들이 감독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기 때문에 빈자리가 감독님 옆밖에 없었습니다.(웃음) 그러니 삼진을 당하고 들어와도 거기에 앉을 수밖에요. 당시 열여덟 살이었는데,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것저것 여쭈니 감독님도 저를 귀엽게 보신 것 같아요.”
홈런왕이 된 두 번째 계기는 1961년, 미즈하라 감독의 뒤를 이어 부임한 가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이 아라카와 히로시(중학생인 왕정치를 보고 고등학생으로 오해한)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타격 코치로 선임한 것이다. 프로 입단 후 몇 년째 성적이 나오지 않는 그를 본 가와카미 감독은 그 원인이 연습과 정신 상태에 있다고 판단, 아라카와 코치에게 왕정치의 개인 교습을 부탁했다. 아라카와 코치는 왕정치에게 “그렇게 휘둘러서는 피구공도 못 맞힌다”는 말로 승부욕을 자극했다. “아라카와 코치는 10년 정도 선수로 활동했어요. 자신이 선수로서 실현하지 못한 꿈을 저를 통해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본인의 모든 노하우를 저에게 전수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일반 배팅 코치가 공을 치는 방법만 레슨하는 데 비해 아라카와 코치는 전반적 연습 방법을 총괄적으로 훈련시켰다. 특히 러닝 연습을 많이 시켰다. “길게 뛰는 법, 짧게 뛰는 법 등 아주 다양한 훈련을 시키셨어요. 러닝 덕에 몸이 더욱 강해지고 샤프한 움직임이 몸에 배었습니다. 무엇보다 몸 상태를 어떻게 하면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를 전설의 타자로 만들어준 ‘외다리 타법(오른발을 들고 치는 기법)’도 아라카와 코치와의 합작품이다. 백스윙에서 시작하는 타이밍이 늦어 공을 칠 때 배트가 늦게 나오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던 중 외다리 타법(잇폰아시 타법)을 찾아낸 것. 1962년 시즌에서 방망이가 잘 맞지 않자 7월 더블 헤더 첫 번째 경기에서 외다리 타법을 시도, 5타수 3안타 4타점을 올려 팀에 승리를 안겨줬다. “잘 맞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도 안 맞아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식이었죠.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타법은 다음 경기에서도 적중했고, 계속해서 홈런이 나오자 그는 자신감을 얻으며 점점 자신이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후쿠오카 야후오크 돔 안에 있는 야구 박물관 전경. 왕정치 회장의 위업을 기리고, 야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개관했다.

베테랑이 살아남는 방법
외다리 타법은 그를 일약 성공가도에 올려놓았다. 1962년과 1963년 연속 홈런왕을 거머쥐었고, 홈런뿐 아니라 타점과 타율에서도 꾸준히 최고를 달렸다. 1964년에는 55개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그다음 해에도 놀라운 기록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타석에 선 그를 상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 시프트’라는 것이 생겨났을까! 오 시프트란 분석 결과 그가 치는 공이 주로 오른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 상대팀이 수비를 오른쪽으로 집중 배치한 것을 말한다. 왕정치의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의 ‘오’를 가져온 ‘오 시프트’라는 말을 야구 해설가들까지 사용했을 정도로 그에게서 파생된 고유 용어는 일반명사화되기 시작했다.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연속 홈런왕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오 사다하루 신드롬을 만들어낸 그는 “어떻게 수년간 꾸준한 타격감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연습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답한다. “외다리 타법으로 성공했지만 이 타법의 약점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아라카와 코치님이 새로운 연습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천장에서 실을 늘어뜨리고 그 끝에 잘게 자른 신문지를 붙인 후 가타나(일본도)로 그것을 베게 했어요. 신문이 천천히 돌아갈 때 엄청난 집중력으로 정확한 충격을 줘서 확 베어야 했습니다. 집중력과 임팩트, 둘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신문이 잘리지 않고 칼에 둘둘 말리거든요.” 아무리 스윙이 좋은 타자라도 적당한 때에 제대로 임팩트를 주지 않으면 공은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이 훈련은 바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저는 항상 배트와 공이 맞는 부분, 그 부분에 집중했어요. 이것만 제대로 하면 공은 알아서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선수는 ‘잘 맞히기’에 집중하기보다, 공을 멀리 보낼 생각만 하며 배트를 휘두릅니다. 그런 선수는 자기 마음만 펜스를 넘어가고 정작 공은 내야 땅볼이 됩니다.”
이러한 독특한 훈련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의 22년간 성적을 돌아보면 고된 연습과 맞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타이틀이 많다.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수위 타자 5회, 최다 출루 수 12회, MVP 9회,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9회를 비롯해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일본 프로스포츠 대상, 국민 영예상 등 수많은 타이틀과 수상 기록은 그가 마흔 살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공격과 수비에서 한 치의 게으름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돌아보면, 야구 선수는 서른 살이 넘으면서 본격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열여덟, 열아홉 살에 프로에 입단하면 코치나 감독이 모두 붙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친절히 알려주죠. 그런데 한 10년 지나 베테랑 선수가 되면 그때부터는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야구가 절실하지 않은 선수들은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야구는 기술입니다. 기술자가 꾸준히 기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낙오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인 때보다 서른 살 넘어서 연습을 더 많이 했다. ‘좀 더! 더!’라며 자신을 몰아붙였다. “베테랑이 되면 감독이나 코치도 편하게 말을 걸고 서로의 관계 또한 편해집니다. 그 분위기를 타고 선수가 자신에게 맞는 편한 연습만 하게 되면 기량은 점점 떨어지죠. 그러면 시합에 나가는 횟수도 줄고 결국 선수 생명이 끝납니다. 그래서 연습을 할 때는 늘 신인처럼 ‘내가 제일 어리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합니다.”

팬이 좋아하는 야구는 이기는 야구
1980년 11월, 그해 30개의 홈런을 치고도 은퇴를 결심한 그는 선수 생활을 접고 1981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조감독을 맡아 후지타 모토시 감독과 함께 그해 팀을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1983년에는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런 좋은 분위기에서 1984년 감독 자리를 물려받은 그는 그 후 3년간 우승권에서 먼 부진한 성적을 냈다. 그가 1959년 프로 데뷔 후 첫 시즌에서 7개의 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든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에게 끊임없이 신뢰를 보내는 미즈하라 감독이 있었고, 아라카와 코치에게 개인 과외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달랐다. 아무리 신인 감독이어도 감독은 감독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관객이 야유를 보내는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기댈 곳도 없었다. “우선 저부터 약해지지 말자고 했습니다. 감독과 코치에겐 내 선수가 잘 치고 잘 던지는 것이 자랑이고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 반대의 경우에는 더욱 실망감이 큽니다. 그것을 절대로 선수들에게 보여선 안 됩니다. 그리고 감독은 공평해야 합니다. 선수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선수 기용을 해야 하죠.”
감독 입장에서 어려운 건 이것 말고도 수십 가지다. 그중에서도 특히 투수 로테이션은 감독 고유의 결정권임에도 선수 보호 측면과 승패 면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 그래서 늘 예민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그러면 자기 팀 투수를 어디까지 배려하고, 어디까지 희생시켜야 하는 걸까? “투수는 이기기 위해, 팬들과 팀의 신뢰를 받기 위해 마운드에 오릅니다. 마운드에 오른 이상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을 던지다 보면 힘든 순간이 찾아오지만 벤치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안다면 열심히 던져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선수들이 화낼지도 모르겠지만(웃음), 시합을 보다 보면 좀 더 던져도 될 것 같은데 내려오는 선수도 종종 있더군요.”
간혹 투수 로테이션이 납득되지 않는 경우 야유를 보내는 관중이 있는데, 그는 그 또한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관중은 야구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시합의 승리를 가장 절실히 원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관중보다 감독입니다. 열심히 하는 선수를 위해서라도 가장 좋은 타이밍에 투수를 바꾸는 것이 감독의 역할입니다. 물론 가끔 투수 교체에 실패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순간 감독은 최선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1988년 리그 2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사임한 그는 NHK에서 해설위원을 하다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신) 감독으로 부임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명문 상승 구단에 비해 당시 다이에 호크스는 약소구단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는 감독이란 타이틀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선수와 코칭 스태프, 그리고 팀 전체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감독 부임 후 초반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는 선수단 버스에 달걀을 투척하는 ‘날달걀 사건’도 터졌다. 이는 그와 선수들이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는 계기가 됐고, 1999년 주력 선수들의 활약으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감독으로서 선수의 즐거운 얼굴을 볼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우승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경기마다 선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진지하게 시합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마침내 우승을 실현했을 때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해맑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으로서 최고의 보람을 느꼈죠.” 감독 취임 11년째인 2005년 1월 다이에 호크스는 소프트뱅크에 양도되었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개명했다. 다음 해에 열린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그는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아 쿠바를 10:6으로 누르고 일본을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며 일본 야구 팬을 뜨겁게 울렸다.

아직도 설레는 ‘야구’라는 두 글자
2006년, 위에 종양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해 위암이 발병했고, 석 달간 치료를 마친 그는 재기해 2007년 3위로 성적을 마감한 후 2008년 68세의 나이로 감독직에서 영예롭게 물러났다. 정확히 50년 야구 인생이었다. 그는 선수로 시작해 감독으로 은퇴하기까지 몸소 모범을 보이며 전 세계 야구인에게 여러 가지 방향으로 큰 자극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프로 정신’이다. “프로는 돈을 받고 야구를 하는 사람입니다. 구단에 대해, 팬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관중에게 더 좋은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 의미에서 제일 불행한 선수는 본인을 정말로 힘들게 훈련시키는 감독이나 코치를 못 만난 선수입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프로에 왔는데, 정작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죠. 마흔 살 넘어서까지 경기를 뛴 선수들을 만나보면, 가장 힘든 연습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합니다. 연습을 한다고 다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 연습도 하지 않고 잘하게 되는 프로 선수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 회장으로, 그리고 야구계의 원로로 세계를 무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그가 이제는 어떤 한 팀의 수장이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NPB, Nippon Professional Baseball)의 총재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저는 평생을 야구 현장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곳이 좋아요. 프로야구협회에는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이 협회와 현장을 연결하는 파이프 역할을 해야합니다. 야구는 사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스포츠거든요.” 여전히 매서운 눈매와 단단해 보이는 손을 지닌 그에게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을 물으니 너털웃음을 짓는다. “제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야구장에 오면 가슴이 두근두근 뜁니다. 늘 설레죠. 그 심장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일하고 싶습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강건호 사진 제공 소프트뱅크 호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