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곳으로 간다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으려면 때론 되레 멀리 떠나야 한다. 각계각층의 아홉 사람이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낼 장소에 대해 말했다.

박은숙(아트스페이스벤 대표)의 평창
몸이 지치면 늘 강원도 평창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거기서 차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누워 있으면 성가신 고민이 전부 사라져버린다. 그 순간만큼은 속세에선 완전히 벗어난 느낌이랄까. 지난여름에도 그곳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진 행복한 기억이 있다. 올해 마지막 날에도 나는 당연히 평창으로 떠날 것이다. 모임 일정이 대충 마무리되면, 진짜 마무리를 위해 그곳으로 달려갈 거다. 푸른 바다와 광활한 자연. 다가오는 새해를 차분하게 맞이하는 장소로 평창만 한 곳도 없다.

김창옥(김창옥휴먼컴퍼니 대표)의 천마산
몇 해 전 서울을 떠나 남양주로 이사했다. 강의나 방송 활동을 하기엔 서울이 편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뒷산을 좇다 결국 집을 옮겼다. 남양주시 중앙에 위치한 천마산은 그야말로 자연의 보고다. 봄과 여름엔 꿩의바람꽃·중의무릇·애기괭이눈 같은 야생화가 피고, 가을엔 작살나무·칡·미국자리공 열매가 지천에 널려 있다. 겨울엔 또 모든 것이 걷히고 곧게 뻗은 나무만 남아 사색하기 좋다. 이곳에 온 이래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뒷산을 산책한다. 특별히 뭔가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냥 일상이 되어버렸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 위한 장소로 내겐 천마산이 제격이다.

장은령(첼리스트)의 발리
지난해에 난생처음 발리에 갔다. 그곳의 해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름도 모르는 토실토실한 생선 요리와 차가운 맥주 한 잔에 금세 마음이 열렸고,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그 도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지난 15년간 줄곧 독일 베를린에서 시간을 보낸 나에게 발리는 휴양지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유럽의 차분한 도시에 익숙해진 내가 느낀, 뒤늦은 문화 충격이라고 할까? 빽빽한 연주 일정과 강의로 바쁜 지금도 나는 발리만 생각한다. 기다려라. 에메랄드빛 바다와 파란 하늘, 고요한 분위기.

강제윤(시인)의 여서도
여서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도와 제주 사이 바다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돌과 바람의 왕국이다. 이 섬은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 주변에 바람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홀로 우뚝 서 있으니, 사람이 사는 집뿐 아니라 농경지도 모두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오래된 돌담과 돌집들이 온전히 남아 있는 이곳은 마치 사라진 잉카나 이스터 섬의 거석 문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난 이 섬에 갈 때마다 어느 먼 시간 속 나라에 속해 있는 듯한 감동에 휩싸인다. 지도 상엔 존재하지 않을 이 섬 왕국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고단한 디스토피아를 떠나 지도에 없는 나라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신지혜(CBS 아나운서)의 파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되면 되레 마음이 차분해진다. 감정의 기복을 한 꺼풀 벗겨낸 듯 의외로 담담해지는 것. 올해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사실 파리는 그간 나의 이런저런 선입견 탓에 그리 ‘사랑스러운’ 도시는 아니었다. 따사로운 볕을 맞으며 마음을 치유하는 나에겐 더더욱. 그런데 지난여름 그곳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그만 ‘파리앓이’가 시작됐다. 그 새침하고 매혹적인 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저 냉랭한 이웃, 손님에게 퉁명스러운 가게 점원들과 함께 나는 파리에서 외롭고 자유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올해의 마무리는 파리에서 하고 싶다.

박시현(골프 선수)의 제주도
제주 바다는 늘 신비롭다. 오묘한 에메랄드빛을 품고 늘 같은 듯 다른 얼굴로 넘실거리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 북서부 끝에 자리한 협재 해변은 좀 더 이채롭다. 은빛 조개껍데기 가루가 백사장에 섞여 있어 언제 찾아도 눈부시다. 프로 골퍼가 되기 전 3년간 제주도에서 훈련했다. 그래서 내게 제주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대자연과 음식, 골프장 등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곳. 12월 31일엔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몸보신도 하고, 바다의 향기를 제대로 느끼고 돌아올 것이다. 아, 몸보신은 당연히 ‘몸국’으로 시작할 생각이다.

이원국(이원국발레단 대표)의 무대
지난 8년간 매주 월요일에 대학로 성균소극장 무대에 섰다. 국립발레단 은퇴 후 제일 먼저 한 생각은 ‘발레를 예술인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든 보고 즐길 수 있는 대중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관객이 많든 적든 나를 무대로 이끈 것도 그 바람 때문이었다. 작은 공연장엔 어린아이부터 중년 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객이 다녀갔다. 어느덧 무대엔 나와 동료들의 땀이 배었고, 발레는 이제 쉽고 재미있는 문화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도 난 이곳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이곳에서 사랑하는 팀원, 소중한 이들과 연말을 보내고 싶다.

박모과(빠르크 대표)의 태국 그 집
2009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태국에서 살았다. 당시 살던 곳이 방콕 시내 중심부에 있는 쏘이카셈싼 3(Soi Kasemsan 3). 태국의 실크 산업을 세계적으로 발전시킨 그 유명한 짐 톰슨의 자택(Jim Thompson’s House) 바로 옆집이었다. 태국 실크의 중흥을 이끈 짐 톰슨은 20여 년간 그곳에 거주하며 정원을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꾸며놓았다. 물론 내 방 작은 발코니에선 그의 정원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태국을 떠나온 지 벌써 4년이 됐다. 지금도 그곳이 사무칠 정도로 그립다. 레스토랑의 문을 닫고 레스토랑 식구들과 딱 일주일 동안만 그곳에 다녀오고 싶다. 그곳에서, 오래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며 꿈꾸던 좋은 것에 관해 얘기하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김형진(워크룸 프레스 대표)의 안드로메다
2009년 12월 29일, 지구를 떠난 지 3년 만에 뉴호라이즌스는 지구보다 명왕성에 더 가까워졌다. 2014년 12월 6일, 절전 모드에서 깨어난 뉴호라이즌스는 그로부터 7개월 후 드디어 명왕성 곁을 통과했다. 지금 뉴호라이즌스는 ‘떠나는 탐사’ 3단계에 접어들어 궁수자리를 향해 날고 있다. 2015년의 마지막 날, 난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생수병과 사진기, 수건 한 장을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그 문이 열리면 난 그것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의 등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나는 고등어잡이 어부처럼 소리치며 그것의 등에 올라탈 것이다. 저 멀리 사자를 겨누고 있는 궁수도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엔 무한한 어둠. 거기엔 앞과 뒤, 위아래가 없다. 카운트다운도, 새해 인사도 없다. 날이 바뀌어도 태양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안드로메다로 간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임해경 (hkl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