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지고, 다시 피고
“동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절대 경지에 도달한 말은 말이 없다.’ 이게 뭐냐. 말은 마음의 찌꺼기란 의미와 통합니다. 여기서 다시, 말에도 찌꺼기가 있습니다. 그게 글이에요. 말을 흐르는 대로 놔두면 되는데, 그걸 붙잡아두려고 글을 써요. 그런데 글이라는 것처럼 불확실한 것이 없어요. 오류투성이거든. 그래서 글은 말보다 순수할 수가 없고, 말은 마음보다 순수할 수가 없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마음이지요.” <서세옥>전이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산정(山丁) 서세옥 작가를 만났다. 그와 보낸 2시간을 전할 방법은 ‘글’뿐. 그러나 여든일곱의 그가 내뱉은 강인한 단어와 두려울 것 없는 청년의 문장은 ‘말’을 뛰어넘어 당신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불확실한 메시지, 작가적 사상의 결여, 표면에 치중한 변화, 과잉의 재료와 기교가 넘쳐나는 현대미술의 홍수 속에서 서세옥 작가의 수묵 작품은 우리에게 군더더기 없는 어떤 핵심 같은 걸 보여준다. 처음과 시작을 이루는 한 획의 붓질, 그것이 만들어내는 점과 선, 동그라미, 다시 이것이 모여 만들어내는 ‘사람’들. 조형적 기초가 되는 이 단순한 요소 안에 우주를 함축하는 서세옥 작가의 작품은, 판독하기 어려운 요상한 언어로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게 하는 여느 젊은 작가들과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무엇보다 서세옥 작가가 선보이는 작품의 근원에는 우주에 대한 성찰과 경의가 담겨 있다. 아니, 담겼다는 것으론 부족하다. 그의 작품은 그것을 마치 종교처럼 숭배한다. 시작과 끝이 모두 그곳에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며, 그가 지금껏 사람 키만한 붓을 잡고 휘갈겨대는 절대 에너지의 보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서세옥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는 늘 ‘사람’, ‘자연’, ‘우주’, ‘회귀’, ‘에너지’를 함께 언급한다. 이러한 오묘하고도 그럴듯한 항목이 작품의 배경을 이룬 탓에 서세옥 작가의 ‘점의 변주’, ‘사람들’과 같은 작품에서는 담백한 미학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응축된 ‘사람’들, 기가 막히게 조형적으로 배치한 ‘점’들, 한 사람, 두 사람, 열 사람이 모여 촘촘히 선을 이룬 ‘사람’들은 관객의 감정과 상상을 극대화한다. 우리가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된 듯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내가 작품 속에서 옆 사람과 손잡고 군무를 추는 것 같고, 내가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같이 숨이 차는 착시와 환상. 그런 맥락에서 서세옥의 작품은 어떠한 텍스트보다도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그가 앞서 내뱉은 “말은 마음의 찌꺼기요, 글은 말의 찌꺼기”라는 말은 바로 이런 부분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아닐까?
2014년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기별 대표작 100점을 소개하는 특별전이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다. 1월 13일까지 열리는 1부 전시에서는 1960년대 묵림회를 통해 추구한 색다른 동양화 작품과 1970년대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생동감 넘치는 ‘사람들’ 시리즈 약 50점을, 1월 12일부터 3월 6일까지 이어지는 2부 전시는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작품으로 구성한다. 전시가 한창인 서울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념의 세뇌에 대한 혹독함, 꽃이 피고 지는 이치, 우리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것들에 관해 그는 한참을 이야기했다. 듣고 보니 그것은 곧 작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람, 닥종이에 수묵, 86×77.7cm, 1980년대 ⓒ서세옥 Suh Se Ok
이번 전시는 선생님이 기증하신 작품으로 꾸몄습니다. 11월부터 시작한 이 전시는 1, 2부로 나누어 내년 3월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전시장을 돌아보신 소감이 어떤가요? 화가가 작품을 그리고 나서 자기 작품에 마지막으로 사인을 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그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죠. 사회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전시를 보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작가는 거의 없을 겁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100% 만족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선생님은 1960년에 묵림회를 만들어 동양화 혁신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비록 몇 년 안 가 해체되었지만 전통 재료를 이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한 시간이었습니다. 묵림회를 결성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신 건 무엇인가요? 우선 지금껏 많은 언론에서 묵림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왜곡되고 과장된 것이 무척 많아요. 예를 들면 묵림회 창립 멤버를 ‘미술계 청년 작가들’로 알고 계시는데, 아닙니다. 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묵림회는 그때 내가 가르친 제자들과 졸업생을 모아 만든 겁니다. 지금은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내가 서울대 미대 1회 졸업생이니 미술 인구가 현저히 적었죠. 지금처럼 미술대학 졸업생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시대가 아니라, 많은 작가를 모아 크게 일을 벌인 미술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1회 졸업생이셨으니 미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가 지금과는 정말 많은 차이가 났겠어요. 당시 기성 화단 작가들이 모여 전국 총회를 하는데 몇 명이 모인 줄 아세요? 60명도 안 되는 작가가 모였어요. 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까지 다 합쳐서. 서울대 미대도 모든 전공을 합쳐서 정원이 12명이었어요. 나중에 내게 실기 지도를 받은 졸업생들을 모아보니 불과 10여 명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들과 함께 창립한 것이 묵림회입니다.
묵림회 발족 동기는 앞서 말씀드렸듯 ‘동양화 혁신’에 있었는데, 그러한 동기가 대두된 배경에는 아무래도 시대적 상황이 깔려 있을 듯싶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상황과 모든 것이 연결됩니다. 우리 세대는 세상에 나온 순간 이미 일본의 노예였어요. 식민지였으니까 곧 노예죠. 일본 군화 아래 우리의 문화가 짓밟히고 이름까지 바꿔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미술계도 자연스럽게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미술계의 99%가 모여 있는 집단, 그리고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1%의 집단이었죠.
극단적일 정도로 심하게 기우는 판도였네요. 그렇게까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본은 우리 의식의 뿌리부터 일본화하려고 했어요. 우선 먹고살 수 없도록 했어요.‘배가 부르면 딴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논리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문화 말살 정책을 폈는데, 그중 하나가 ‘조선미술전람회’였어요. 지금 청와대 앞에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그 옆에 건물을 하나 짓고 미술관이라 이름 붙였어요. 조선총독부는 1년에 한 번씩 그곳에서 조선미술전람회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출품하면 몇 명을 뽑아 상을 주는 거죠.
미술 인구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주로 어떤 작가가 수상을 했나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일본식 그림, 일본식 조각이 아니면 절대로 입선을 안 시키는 거예요. 심사위원이 모두 일본인이니까 자기의 화풍, 경향을 본뜨지 않은 작품은 무조건 탈락인 거죠. 우리나라의 전통 그림은 세계 미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유산입니다. 일본인은 그 유산을 없애는 데 중점을 뒀어요. 전람회 초기만 해도 우리 작가들이 우리 화풍으로 그린 그림을 출품했는데, 매년 떨어지니까 어떡해요. 급기야 많은 화가들이 점차 일본 화풍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입선도 하고 상도 받았죠.
점의 변주, 한지에 수묵, 166.3×126.5cm, 1962 ⓒ서세옥 Suh Se Ok
조선미술전람회는 23회까지 이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사이 전람회에서 한국 화풍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는 게 맞겠군요? 그야말로 ‘일본 그림 전람회’가 됐어요.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건 우리나라 작가들이 인문학적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세계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창구도 없었다는 겁니다. 아시아 한구석 조그마한 나라, 그것도 나라를 잃어버린 처지가 되다 보니 민족의 자존, 민족 미술의 양식을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자진해서 일본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라고.
그런데 그걸 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정신적 . 이념적으로 세뇌를 당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이 흐려질 것 같아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예술가들은 종국엔 ‘일본 문화가 우리 문화보다 훨씬 우수하지 않느냐’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정치 . 경제 분야에서 친일 세력이 생겨나자 미술과 문학계에서도 친일 세력이 꿈틀댔죠. 그게 나중엔 99%를 차지했습니다. 나머지 1% 만이 타협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키려고 노력했죠.
그 1%에 선생님도 포함되신 거군요. 묵림회의 발족 동기인 ‘동양화의 혁신’에는 왜색 짙은 미술에 대한 반발이 근본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네요. 동양화의 혁신이라고 하면 보통 장르의 확장이나 기법의 변화 정도를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죠. 그 와중에 해방이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우리 것을 되찾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미술계에서도 우리의 풍토, 우리 민족의 체질과 정신에 맞지 않는 일본 미술을 뿌리째 뽑아 정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조금씩 대두되었어요. 우리의 위대한 역사와 전통을 복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하늘과 땅을 열어보자, 이런 게 필요하지 않았겠어요? 근데 99%에 달하는 집단이 그 운동을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니었어요. 그들은 이미 충분히 살 만했거든. 나를 포함해 1%의 사람들이 새 시대를 이끌겠다고 나섰으니 주변 반응이 어땠겠어요. 반발이 무척 심했어요. 기름을 짊어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 악조건 속에서 열 명 남짓의 회원을 데리고 새로운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묵림회가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묵림회를 결성하고 전시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아는 작가라고는 나 하나예요. 해방 후 정부에서 조선미술전람회의 형식을 똑같이 모방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거기서 내가 국무총리상을 받았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이름은 알았죠. 미술계에서는 나를 경계하면서도 주목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대학 졸업생들을 모아 새롭게 실기를 가르치면서 수차례 전시회를 해나갔어요.
전시회의 반응은 어땠나요? 미술계에서는 우릴 경계했지만 당시 언론인 중에는 의식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우리 전람회를 보고 “이런 통쾌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다들 난리가 났어요. 묵림회가 미술계의 초점이 되면서 전람회 때마다 기자들이 와서 박수를 쳐주고 격려했어요. 전람회 기간이 아닐 때는 “묵림회는 지금 전람회 준비 중이다”라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그 덕분에 용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발족 4년 만인 1964년 겨울 전시를 마지막으로 해산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단체라는 건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출발할 때보다 쪼그라들고 못쓰게 되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특히 문학 운동과 미술 운동이 그렇습니다.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가 오래되면 이념은 간데없고 친목회가 되는 경우가 많아요. 4년 되던 해에 총회를 소집하고 “우리가 여덟 번의 전람회를 하는 동안 묵림회의 기초 정신을 수립하고 서로 교감했으니 각자 그 길을 지켜나가며 더 넓은 곳에서 발전시키자. 건투를 빈다” 하고 박수 치고는 헤어졌어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의 작품을 보면 기존 문인화를 벗어나 새로운 형식의 동양화를 시도하신 것이 눈에 띕니다. 특히 ‘점의 변주’와 같은 작품은 먹의 농담과 붓질의 강약이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세련된 조형성이 인상적이라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후 선보인 ‘사람’ 시리즈 또한 화면 구성이 놀랍도록 완벽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건 이러한 조형미를 뛰어넘어 작품이 던져주는 ‘공감’이란 키워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중을 이토록 공감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동양과 서양 미술의 시작점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책을 보면 출발은 모두 똑같아요. ‘고대에 인간이 야생동물을 잡아와 먹은 후 배가 부르니 뒹굴거리다 옆에 있는 돌멩이로 바위에 그날 잡아 먹은 동물을 그리면서 원시미술이 시작됐다’는 겁니다. 그림의 시작이 유희, 장난, 시간 때우기에 있다는 거죠. 동양에선 아니에요. 동양 미술의 시작은 무한한 우주에서 출발합니다.
우주의 어떤 힘에서 그림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철학적이면서도 왠지 과학적인 느낌도 듭니다. 물론 단박에 이해하기는 어렵지만요. 동양인은 예로부터 명상을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식의 기초는 고요한 내면에 있고, 명상을 통해 그 순수한 내면 의식으로 몰입하게 되죠. 명상은 지금도 여전히 동양에서 많이들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상을 하면, 우리를 둘러싼 이 덩어리들을 하나의 우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우주를 사람들은 무엇으로 보느냐, 공간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사실 공간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옆자리가 지금 빈 것 같죠? 그게 아니에요. 거기엔 거대한 에너지가 꽉 차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사실 과학적으로도 공기에는 무게가 있기 때문에 지금 제 옆이 비어 있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긴 하네요. 그럼 선생님이 말씀하신 에너지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나요? 생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도 있지. 동양에서 고대에 누가 명상을 하다가 그 순결하고 때 묻지 않은 생명, 아름다움의 에너지에 점을 하나 찍었어요. 점을 하나 딱 찍는 순간 우주는 ‘와장창’ 하면서 표현할 수 없는 큰 진동이 일어났어요. 이것은 사실 아득한 상고의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점이 탄생한 거예요. 점을 하나 둘 찍다 보니 선이 돼요. 수직과 수평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한번 돌려보니 이 선이 출발점에서 만나요. 영원한 선이 하나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그림의 시작이에요. 영원한 출발점도 없고 귀납점도 없죠. 절대 생명과 아름다움과 에너지가 충만한 우주에 둥근 원을 인류가 하나 그렸다는 말은 배불러서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유희에 출발점을 둔 서양 미술과는 매우 다르죠.
동양미술의 시발점이 된 에너지와 점, 선, 원이라는 개념을 듣다 보니 선생님의 그림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캔버스는 흔히 빈 공간이라고 말하지만 선생님에겐 에너지로 차 있는 우주일 것이고, 그 우주에 점, 선을 이용한 조형을 통해 큰 폭발을 일으킨 거라고 이해 해도 되겠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또한 한 작품에 붓의 획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도 출발과 끝이 따로 없다는 부분을 그림을 통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영원히 돌고 도는 것, 그것은 소통의 본질이기도 하죠. 그래서 선생님의 그림이 관람객에게 특별한 설명 없이도 크게 와 닿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중간에 선 긋기를 좋아해요. 너와 내가 대립 관계가 아니고 하나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행복하고 평안해요. 화가의 눈, 화가의 생각, 화가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 밑바탕돼야 합니다. 이처럼 동양 미술은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선생님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소화했다는 느낌을 주죠. 일본의 한 시인에게 들은 말이에요. 바다 경치가 끝내주는 가고시마에 갈 일이 있었대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정말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겠지?’ 하면서 갔답니다. 해변에 서서 눈부시게 푸르고 광활한 가고시마의 바다를 보는데 시가 안 나오더래요. 대신 “아, 가고시마~” 이 말만 되풀이하다 왔답니다. 사람이요,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말이 안 나오는 법이에요. 말이란 게 필요 없어지죠. 그림도 그래요. 어느 경지에 가면 시작과 끝, 그 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는 것만 보이지 자질구레한 것은 안 보이거든.
두 사람, 닥종이에 수묵, 39.8×45cm, 2004 ⓒ서세옥 Suh Se Ok

사람들, 닥종이에 수묵, 42.3×52cm, 1999 ⓒ서세옥 Suh Se Ok
선생님의 작품에는 출발도, 끝도 없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요. 사람이 죽으면 “언덕 위의 흙으로 돌아가서 너무 슬프다” 이런 말을 해요. 그건 아주 서양적인 발상이에요. 사람이 죽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태어나요. 봄이 되면 왜 꽃이 피죠? 화려한 색깔을 자랑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그게 아니고 꽃이 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열매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꽃의 시듦을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죠. 다시 풍성한 열매가 달릴 텐데. 그럼 겨울이 되어 열매가 떨어지면 슬퍼해야 하는가? 그 열매에서 씨가 떨어지고 그 씨가 다시 꽃을 피울 테니 슬퍼할 이유가 없어요.
연결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모든 것이 돌고 돌아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내면 좋을 텐데 한국 화단에서는 선생님의 다음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뒤를 이을 동양화가가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겠죠. 많은 사람이 저에게 질문을 해요. “우리나라에 전통 동양화라는 것이 선생 대에서 끝나지 않겠소? 선생이 화단에 등장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자리를 잘 잡았는데 선생 다음에 누가 계승하는 사람이 있소? 이제 문닫는 것 아니오?”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책에 “서세옥 작가를 이을 다음 자리에는 아무도 없지 않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라고도 썼더라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가운데 실존하는 시간이에요. 우리 다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고 봐요. 그 시대에 나오는 춤, 노래일 수도 있는 일이죠. 서글프게 생각하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갑자기 아드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는데, 선생님의 ‘사람들’ 시리즈를 보면 수백, 수천 명의 군중이 등장하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 ‘바닥’과 공통점이 보입니다. 서도호 작가 작품과의 연결성을 혹시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의학적으로 우리는 일단 DNA가 같아요.(웃음) 그림 그리는 아비에게 그림 그리는 자식이라…. 아무래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분리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걔가 하는 일은, 지금 그리는 일보다 만드는 일이 더 많아요.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시대처럼 더 이상 그림으로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만들고 찍고 설치하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죠.
선생님은 무엇보다 지필묵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시대가 바뀌고 예술가들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작가들이 붓 대신 컴퓨터와 카메라를 가까이 하는 것이 걱정되진 않나요? 아주 좋은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점점 그림이 없어지고 있어요. 손가락만 까딱하면 색이 칠해지고 영상이 만들어지고, 더 이상 붓을 들 이유가 없어지고 있어요. 아마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질 겁니다. 내가 웃긴 이야기 하나 할게요. 눈이 하나뿐인 원숭이가 사는 동네가 있는데, 두 눈 달린 원숭이가 갔더니 병신이라고 놀리더랍니다. 꼼짝없이 병신이 된 거죠. 그렇지만 두 눈 달린 원숭이가 병신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확실합니다.
더 이상 붓을 들지 않는 시대가 오더라도 붓을 든 사람이 푸대접받는 세상은 되지 않아야 한단 뜻이겠죠? 오래된 것과 새것은 결코 둘로 나뉘지 않아요. 둘은 언제나 사이 좋게 꼬리를 물고 다닙니다. 하늘에서 번쩍 하고 내려오는 난데없는 새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Profile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생. 1949년 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으며 1960년 묵림회 창립을 주도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칸 국제 회화제에 참여해 이름을 알렸고, 도쿄 우에다 화랑 개인전(1979년), 뉴욕 버룩 칼리지 미술관 개인전(1985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1996ㆍ1997년),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특별전(200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선정(2005년), 도쿄 메종 에르메스 개인전(2007년), 미국 휴스턴 미술관 특별전(2008년)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여전히 한국화단의 거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정근(인물) 취재 협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