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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밖에’ 할 수 없는 전나영

LIFESTYLE

웨스트엔드의 서양 배우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은 전나영의, 여인과 소녀 사이를 여러 번 오간 유난한 인터뷰.

네덜란드 태생 교포 3세 전나영은 2013년 뮤지컬의 본고장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동양인 최초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판틴 역을 열연해 세계 무대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 이전에도 네덜란드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 여주인공 킴 역을 맡아 300번넘게 무대에 올랐다. 10월 21일부터 내년 봄까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판틴 역으로 처음 한국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배우 활동을 통해 삶의 전반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궁중음식연구원은 전통 식문화 연구의 종가로 창덕궁 옆 원서동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국엔 언제부터 있었어요? 7월 말에 왔어요.

공연은 10월 말이잖아요. 원래 그렇게 일찍부터 연습에 들어가나요? 연습은 8월 말부터 시작했지만, 한국에 적응하려고 한 달 일찍 들어왔어요. 종로3가 창덕궁 앞에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거기서 혼자 지냈어요.

한 달간 뭘 하며 지냈어요? 공연도 보고 여행도 가고 한국에 있는 친척도 만났어요. 아, 그리고 템플스테이! 경주 산골짜기에 ‘골굴사’라는 절이 있어요. 거기서 일주일간 템플 스테이도 했어요. 거기서 전에 배운 무술을 다시 배웠어요.

무술이요? 네. ‘선무도’라고 춤동작 같은 게 섞인 오래된 불교 무술이에요. 2011년에도 혼자 한국에 와서 그걸 배우고 돌아갔어요. 요가와 명상을 곁들여 공연을 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되죠. 대개 스님은 앉아서 명상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원래 스님들은 무예에 능한 사람이에요.

네덜란드에서 30년 가까이 살다 온 사람이 ‘무예’에 대해 얘기하니 뭔가 새롭네요. 그래요? 근데 그거야말로 진짜 ‘한국적인 것’ 아닌가요?

그렇죠.(웃음) 한국 <레미제라블> 판틴 역으로 확정됐다는 연락은 어떻게 받았어요? 마침 한국에 들어와 파주의 큰이모 댁에서 지내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가 봄이었나? 정말 이모를 껴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죠. “진짜 열심히 할게요, 이모”,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느님”이라고 소릴 지르며 좋아했어요.

근데 정말 그렇게 좋던가요? 사실 2013년에 <레미제라블>을 올린 웨스트엔드가 여기보다 더 큰 무대잖아요? 물론그렇긴 하죠. 하지만 전 제가 한국 무대에 서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해도, 제 안엔 한국인의 피가 흐르니까요. 실은 2012년 런던에서 한국 초연으로 무대에 올리는 <레미제라블> 오디션도 봤어요. 하지만 그땐, 제 음색과 맞지 않는 코제트 역 오디션을 보는 바람에 바로 떨어졌죠.

영어 무대에만 서던 이가 한국어 무대에 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그중 한국어 발음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고요. 발음에 따로 신경 쓰고 있나요?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과는 분명 발음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어렵다곤 생각하진 않아요. 무대에선 발음 외에도 신경 쓸 게 많으니까요.

그게 뭔데요? 감정 같은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주세요. 한국어로 <레미제라블>을 연기하다 보니 영어 공연에선 느끼지 못한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한 예로 극중 프랑스혁명에서 바리케이드가 무너지며 무기력해하는 시민들이 부르는 곡 ‘터닝’을 여기선 ‘흘러 흘러’라는 이름으로 불러요. 근데 얼마 전 연습 때 보니 “우리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얻기 위해 싸웠나”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 영어 공연땐 듣지 못한, 한 꼬마가 자신의 엄마에게 저편에 쓰러진 아이를 깨우라고 말하는 “가서 깨워”라는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물론 엄마는 깨울 수 없다고 하지만요. 그때 생각난 게 최근 이슈가 된 시리아 난민이었어요. 바닷가에 쓰러져 있던 그 꼬마 말이에요. TV에서 바다에 (죽은 채) 누워 빨리 깨우면 정말 일어날 것 같은 아이를 봤는데,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한국어로 공연하는 덕에 그간 느끼지 못한 감정도 느낄 수 있단 거죠? 맞아요. <레미제라블>은 우리가 지금 삶에서 실질적으로 느끼는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에요. 너무나 인간적이며,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얘기죠. 전 이 공연을 통해 뭔가 깊이 사랑하면 끝내 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요.

갑자기 눈이 슬퍼 보여요. 그런가요?(웃음) 제가 요새 다양한 감정을 연결하며 무대에 서는 연습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럴 거예요.

뮤지컬 말고 TV에서도 연기한 적 있죠? 네. 벨기에에선 시트콤도 했어요.

어떤 역이었는데요? 얘기가 좀 재미있어요. 어느 결혼 정보 회사의 늙은 히피 사장이 태국에 놀러갔다 거기서 태국 여자를 데려오는데, 그 태국 여자가 바로 저예요.(웃음) 심지어 그 태국 여자는 히피 사장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죠. 유럽에 와 ‘뽕 좀 뽑겠다’는 생각으로 억척같이 노는 역이에요.

얌전해 보이는 전나영의 이미지와는 다소 상반된 역인데요?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네. 실제 성격은 보이는 것과 달리 엄청 시끄러운 편인가요? 사실 엄청 밝아 눈부신 성격과 어두운 성격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그걸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다면 배우로서 굉장한 이점이겠죠. 맞아요. 그래서 매일 스스로 ‘내가 이걸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정말 원하는지’에 대해 수없이 질문해요.

성격 얘길 하니, 나영 씨가 오래전 한 인터뷰 기사가 생각나네요. 어릴 때 집안이 굉장히 보수적이었다고요. 정말 그랬어요. 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를 보내면서 나는 왜 친구들처럼 자유롭게 놀러 다니거나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없을까 생각했죠. 전 부모님보다 조부모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집안엔 항상 아시아 가정 특유의 보수성이 그득했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죠.

그 상황에서도 이렇게 배우가 된 건 놀라운 일 아닌가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너, 배우나 해라”라고 떠밀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원래는 배우보다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보수적인 집안이긴 해도, 어릴때부터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항상 달고 살았죠. 네 살 때 <서편제>를 보고 감동받아 아리랑을 따라 부르던 게 지금도 생각나요. 이후엔 <별은 내 가슴에>의 ‘강민(안재욱 역)’에게 푹 빠져 살았죠.

근데 정말 네 살짜리 꼬마가 <서편제>를 보고 감동받을 수 있나요? 네. 사실이에요. 얼마 전 네덜란드 집에서 찾은 제 그림 한 장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어요. 일곱 살 무렵 그린 것 같은데, 저를 동그랗고 큰 무대 한가운데에 그려놓고, 손엔 커다란 마이크를 쥐여(그려)주었더라고요. 물론 그 주변엔 사람들(관객)이 가득하고요.

보수적인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치곤 끼가 남달랐나 봐요? 그건 언젠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어릴때 할아버지가 하도 집에서 지독하게 피아노 연습을 시켜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같은 곡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속 반복해 치게 했죠.(웃음) 그때 할아버지가 제 재능을 찾아주신 게 아닐까요?

현재 국내의 <레미제라블> 관련 기사에선 ‘웨스트엔드 출신’ 전나영에 관한 얘기가 빠지지 않아요. 부담스럽지 않나요? 연습 전엔 그랬지만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사실 그걸 느낄 틈도 없고요. 아까 얘기한 것처럼 그저 ‘나는 어떤 배우인가?’, ‘내 삶에서 무얼 만들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요샌 바빠요.

아까 드레스 고를 때, 이 기회에 한국에서 자리 잡고 싶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지금 마음 같아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짜 그러고 싶기도 하고요.

(웨스트엔드 같은) 큰 무대에 서던 젊은 배우가 작은 무대에서 자리 잡겠다고 하니 당연히 놀랄 만하죠. 전 한국 뮤지컬도 웨스트엔드와 비등한 수준에 있다고 봐요. 한국이 더 수준 높다고 느낄 때도 있고요. 그리고 지금 한국 뮤지컬은 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가장 주목하고 있잖아요.

오랫동안 꿈꿔온 배우의 삶을 살고 있어요. 거기서 가장 중요한 ‘자세’가 뭘까요? ‘이것밖에’ 할 수 없다는 자세요. 전 정말로 지금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자세로 이 자리에 서 있어요.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패션 스타일링 에디터 김지수(kjs@noblesse.com) 사진 박경일 헤어 & 메이크업 브랜드엠 의상 협찬 에스카다, 지암바티스타 발리 소품 협찬 데일리스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