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장악한 신낭만주의
구찌가 변하고 있다. 새로운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 그리고 이 도시의 모던 로맨티스트들과 함께.
모델들이 구찌 2016년 크루즈 컬렉션을 입고 유유히 첼시 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노블레스> 9월호 표지를 장식한 사진 속, 뒤엉켜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무심한 표정의 한 여인. 가방을 열고 있다.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알록달록 꽃무늬의 빨간색 블라우스에 주름치마를 입고서. 포토그래퍼 글렌 러치퍼드(Glen Luchford)가 촬영한 이 사진 속 긴 머리 여인은 오묘한 매력으로 자꾸만 시선을 붙잡는다. 촌스럽기는커녕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조용히 (하지만 그 파장은 센)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을 제시하는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의 작품이다.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그가 이름을 걸고 처음 발표한 구찌 여성 컬렉션 데뷔작. 발표 당시 “가장 신선하고 아름다운, 철학적 감성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컬렉션”이라는 호평을 받으면서, 그간 디자이너로서 잘 알려지지 않은 그에 대한 의구심과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그는 현재 전 세계 프레스와 패션계의 열렬한 지지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
허를 찌른 선택
이쯤에서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 중 어느 날 유독 반짝여 보는 이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별처럼 유유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남자 말이다. 그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아카데미아 디 코스튬 에 디 모다(Accademia di Costume e di Moda)에서 수학한 후 펜디에서 시니어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2002년부터 구찌 디자인 오피스에 합류해 현재까지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 이력을 살펴보면 그다지 이색적인 면도, 도드라지는 부분도 없다. 10년 넘게 구찌에서 톰 포드에 이어 프리다 지아니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며 묵묵히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워왔을 뿐. 그런 그에게 올해 그 열정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일 운명적 기회가 찾아왔고, 그의 천부적 감각이 구찌의 2015년 F/W 컬렉션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빈티지한 무드와 중성적 로맨티시즘이 컬렉션 전체를 관통하며 그의 데뷔 쇼를 마주한 이들을 흥분케 했다(에디터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하늘거리는 리본을 장식한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남자 모델이나 커다란 뿔테 안경과 베레모를 쓴 채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형형색색의 엠브로이더리 장식 니트와 섬세한 레이스로 연출한 드레스, 소매 부분에 퍼를 덧댄 더블브레스트 코트, 캥거루털 장식 뮬을 신고 나타난 여자 모델 등…. 이전의 구찌 스타일(흐트러짐 없이 잘 차려입은 섹시 우먼을 연상시키는)은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새로워진(어딘지 모르게 나른하고 편안하면서 세련미와 개성이 묻어나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식 구찌 컬렉션의 등장은 참신함과 놀라움 그 자체였고, 한동안 정체된 구찌 특유의 감도에 다시 청신호가 켜진 듯했다. 구찌의 헤리티지를 종전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해석한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창의력이 익숙함에 빠져 있는 우리의 허를 찌른 것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을 바탕으로 진중하고도 파격적인 시도를 선보인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이끈 구찌의 긍정적 변화가 다음 컬렉션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부풀린 것은 물론이다.

2016년식 뉴 로맨티시즘을 제시한 구찌 크루즈 컬렉션




섬세한 레이스와 엠브로이더리, 참신하고 기발한 컬러 조합, 로맨틱한 플라워 브로치, 앤티크한 볼드 링, 여성스러운 리본과 플리츠 디테일, 잠자리, 타이거 모티브 장식 등… 크루즈 컬렉션 곳곳에 서정적이면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개성 강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우리가 그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
지난 6월 4일, 그의 첫 크루즈 컬렉션이자 구찌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RTW 작품인 2016년 구찌 크루즈 컬렉션 쇼에 초대받아 뉴욕 첼시 거리를 찾았다. 밀라노가 아닌 뉴욕. 뉴욕은 구찌가 글로벌 하우스 브랜드로서 첫발을 내딛은, 의미 깊은 곳이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브랜드의 초석을 되돌아보자는 의미에서 그의 첫 구찌 크루즈 쇼를 펼칠 장소로 뉴욕을 선택했다. 게다가 이번 크루즈 쇼는 특별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구찌가 쇼를 통해 처음 선보이는 크루즈 컬렉션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본격적인 쇼 시작에 앞서 SNS를 통해 포토그래퍼 코코 카피탄(Coco Capitan)과 함께 작업한 뉴욕의 감성 사진을 공개해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예술적 감성을 강조하며, 쇼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 점도 이색적이었다(쇼가 끝난 뒤에는 글렌 러치퍼드가 실내·외 그리고 길거리를 가로지르는 모델들의 모습을 포착한, 크루즈 패션쇼의 생생한 현장과 뉴욕 거리의 감성을 담아 특별 제작한 단편 필름을 공개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오전 10시 30분, 쇼를 위해 일부를 통제한 첼시 거리. 빈티지한 감성의 프린트가 눈에 띄는 패브릭 의자와 다양한 패턴의 페르시안 카펫이 깔린 오래된 차고를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실내·외를 오가는 독창적인 진행 방식의 크루즈 캣워크가 포문을 열었다. 낡은 벽돌과 시멘트 바닥, 채광창 등 산업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와 어우러져 더욱 강렬하고 개성 넘치는 장면이 펼쳐졌다. 언뜻 F/W 컬렉션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흡사 F/W 컬렉션의 두 번째 에피소드 같은 느낌의 의상들. 성별의 구분이 무의미한 특유의 중성적 무드가 여전히 컬렉션 전반에 흘렀고, 빈티지 감성을 담은 뉴 로맨티시즘 역시 이번 크루즈 컬렉션을 수식하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하지만 수줍음 많은 천재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우리가 그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층 섬세해진 디테일과 탁월한 감각의 컬러 조합, 여기에 구찌의 심벌 다시 보기를 더해 이번 크루즈 컬렉션의 개성을 십분 살린 것! 먼저 크리스털 자수 장식부터 리본, 레이스, 패치, 브로케이드와 트롱프뢰유(tromp-l’oeil)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정교한 수작업을 통해 완성한 디테일을 살펴보면 때로는 입체적으로, 때로는 타투처럼 자연스럽게 의상과 가방 곳곳에서 빛나며 시선을 멈추게 한다. 그뿐 아니라 퀼트를 활용해 스웨이드와 퍼, 가죽, 메탈릭 소재 등 다채로운 소재를 자유자재로 변형한 점, 자칫 산만해 보일 수 있는 만개한 꽃과 잠자리, 뱀 그리고 호랑이를 적재적소에 수놓아 동시대적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 점도 우리가 그의 남다른 감각과 감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에 힘을 실어 구찌의 아이콘인 웹과 GG 로고 장식에 팝아트적 요소를 가미해 태피스트리 스웨트 셔츠, 레이스 이브닝 가운, 벨트 등에 적용한 점도 주목할 만한 부분! 이렇듯 여러 세대가 어우러진 문화를 반영해 세대를 가로지르는 스타일로 선보인 이번 크루즈 컬렉션 또한 미켈레 특유의 자유롭고 순수한(그래서 가장 대담할 수 있는) 감성을 버무려 더욱 매력적이었음을 밝힌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 남의 시선에 얽매여 꾸민 거북하고 불편한 차림보다는 미숙할지언정 자신의 감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미켈레가 패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가 펼칠 미래의 구찌 컬렉션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섬세한 레이스와 엠브로이더리, 참신하고 기발한 컬러 조합, 로맨틱한 플라워 브로치, 앤티크한 볼드 링, 여성스러운 리본과 플리츠 디테일, 잠자리, 타이거 모티브 장식 등… 크루즈 컬렉션 곳곳에 서정적이면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개성 강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섬세한 레이스와 엠브로이더리, 참신하고 기발한 컬러 조합, 로맨틱한 플라워 브로치, 앤티크한 볼드 링, 여성스러운 리본과 플리츠 디테일, 잠자리, 타이거 모티브 장식 등… 크루즈 컬렉션 곳곳에 서정적이면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개성 강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Alessandro Michele’s Favorites in Gucci 2016 Cruise Collection
“진정 동시대적인 사람들은 그 시대와 완벽히 일치하지도,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지도 않는다. 동시대성이란 반시대적이다.” 이탈리아 철학자의 말을 빌려 ‘동시대성’이라는 철학적 감성을 강조하며 구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 현재 ‘구찌 우먼’을 뛰어넘는 세련된 ‘구찌 걸’을 탄생시킨 그가 이번에 선보인 크루즈 컬렉션에서 직접 꼽은 페이버릿 룩을 공개했다. 이 또한 진정성이 느껴지는 미켈레식 동시대적 패션 철학의 발로 아니겠는가.
에디터 유은정 (ejyoo@noblesse.com)
사진 제공 구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