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 복합? 그게 대체 뭐예요?
지금 융.복합이란 이름에 새삼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피터 윌리엄 홀든의 ‘아라베스크’. 로봇 기술에 음악과 미술적 요소를 접목한 융 .복합 작품이다.
그야말로 융.복합의 시대다. 실험과학은 물론 문화 예술, 교육, 건축, 국방, 미디어, 스포츠, 심지어 토종닭을 키우는 양계 농가에서까지 융.복합이란 이름으로 뭔가를 하겠다고 난리다. 그중 돋보이는 건 단연 문화 예술 분야. 지난 9월 초 정부는 내년도 문화 산업에 올해보다 7.5% 증가한 6조6000억 원의 예산을 편성한다고 밝혔다. 또 이미 큰돈이 들어간 문화 콘텐츠 사업인 문화창조융합센터에 1300억 원을 더 들여 본격적인 문화 창조 융합 벨트를 가동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잠깐, 그간 너무 익숙해 무신경했다가 새삼 궁금해지는 한 가지. 대체 문화를 융.복합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이번엔 지난 6월에 열린 공연 예술 축제 ‘파다프(PADAF)’의 기자간담회. 2011년 무용과 연극의 온전한 결합을 목표로 시작한 이 축제의 홍보를 위해 관계자들이 모였다. 그런데 올해 이 축제는 명칭이 바뀌었다. 기존의 ‘Play and Dance Art Festival’이 융.복합 공연 예술 축제라는 ‘Play Act Dance Art-Tech Film Festival’이 돼버린 것. 취재진 사이에선 지난 10년간 국내 공연계에서 주목받아온 ‘다원예술’과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예술감독인 한선숙 상명대학교 교수를 비롯해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은 주뼛주뼛하며 선뜻 답하지 못했다. 잠시 뒤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인 송현옥 세종대학교 교수가 “다원예술은 개별 장르의 성격이 강하고, 융.복합 공연은 좀 더 새로운 게 아닐까요?”라고 애매하게 답했지만, 간담회장은 오히려 더 어수선해졌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유럽 최고의 미디어 아트 미술관이라 불리는 독일의 제카엠 카를스루에. 이들은 제도적으로 융.복합 예술 전시를 지원한다.
국내 문화 예술계를 지금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 ‘융.복합’이란 단어는 현정부의 정책과 함께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융합, 문화와 산업의 융합으로 창조경제를 만든다”는 이번 정부의 핵심 기조 중 하나가 바로 융.복합이었고, 이는 서로 관련 있는 콘텐츠를 엮어 신사업으로 탈바꿈하는 지금의 세계적 비즈니스 추세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니 문화 예술계 기획자들도 자연스레 융.복합이 들어간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런 현상은 새 트렌드를 좇는 관객의 니즈, 또 새 장르를 해체하고 확장하는 데 빠져 있던 젊고 실험적인 아티스트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져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융.복합 춘추전국시대.
사실 우리 문화계에 지금 유행처럼 번진 융.복합이란 사조는 이전의 다원예술과 별 차이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장르의 융합 또는 탈장르를 추구하는 예술이 화두가 되는 건 맞지만, 이는 수십 년 전부터 지속된 현상이다. 전통적 예술 강국인 프랑스 .독일 .스페인 .미국 등에선 포스트 모던 시대를 기점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내에선 10여 년 전부터 여러 장르를 하나로 엮은 공연과 전시를 ‘근원이 많다’는 뜻인 ‘다원예술’이라 칭해왔다. 정리하면 지금의 통합 예술 관념은 사조의 양식으로 특징지은 게 아니라 일종의 ‘슈프레히커어(sprechchor: 구호의 합창)’와 같은 셈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어리둥절한 이들은 ‘국제다원예술 축제’ 같은 구호를 내걸고 그간 여러 무대를 선보여온 ‘페스티벌 봄’이나 ‘탈장르 영상 미디어 예술 축제’란 이름으로 실험성 짙은 작품 활동을 해온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NEMAF)’의 아티스트일 것이다. 새 예술의 지평을 제시해왔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별도의 지원까지 받았다. 그런데 2010년을 기점으로 ‘다원예술 증진 지원’은 ‘실험적 예술 및 다양성 증진 지원’으로, 이듬해에는 다시 융‘ .복합 예술 증진 지원’으로 이름이 바뀌며 큰 혼란을 맞았다. 하지만 그사이 옆 나라 일본에선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페스티벌 봄이 일본에서 크게 선전하자 ‘다양한 장르를 복합한 새로운 예술’을 우리말 그대로 ‘다원예술(ダウォン芸術)’이라 칭하기에 이른 것.
패트릭 트레셋의 ‘폴이라는 이름의 다섯 로봇’. 작가는 로봇 기관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자인 동시에 예술가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또한 진짜 문제는 아니다. 지금 주목해야 할 건 융.복합이든 다원예술이든 용어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사이 정작 이런 복합 공연에 대한 질적 고민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7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파다프만 봐도 그렇다. “장르 간 벽을 허물고 새 예술 장르를 탄생시키는 역사적 장을 만들겠다”던 기자간담회 당시 예술감독의 포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무용가는 심지어 “예전에 다원예술로 지원받던 아티스트들이 이젠 융.복합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며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진짜 문제는 ‘매핑(mapping)’일지도 몰라요.” 2000년부터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을 이끌어온 김연호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그녀는 “외국에선 특정 융.복합 공연이나 전시를 보고자 할 때 탈장르로서 존재하는 해당 작품의 진정한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그것에 관한 정보 또한 웹이나 앱을 통해 탄탄히 구축되지만, 우리나라는 큰 자본이 들어간 공연과 콘텐츠는 존재할지언정 그것이 왜 지금 중요한지에 대한 담론조차 형성되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예술 자본의 쓰임새에 대해 일갈했다.
그럼 이번엔 나라 밖을 한번 살펴보자. 먼저 유럽에서도 종합 공연 예술로 이름난 프랑스다. 파리 외곽에 자리한 아트 센터 CDA(Centre des Arts)는 융.복합 콘텐츠의 제작 지원이 스마트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은 2005년부터 매년 프랑스 최대의 디지털 아트 축제 ‘뱅 뉘메리크(Bains Numeriques)’를 개최해왔다. 배우, 무용가, 작가, 엔지니어가 함께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나가는 이 축제를 위해 이들은 일찍부터 탄탄한 운영 시스템을 구축했다. 축제에 참가하는 예술가에겐 숙소와 연습 공간, 장비 등을 지원하고 대외적으론 융.복합을 추구하는 각종 작품에 투자해 융.복합이란 테두리로 묶인 작품을 끝까지 책임진다. 또 최근엔 융.복합 공연에 관심을 둔 세계 각국의 기관과 기업 등이 네트워킹으로 작업할 수 있게 국제적 플랫폼인 디지털아트네트워크(RAN)까지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실로 융.복합 공연의 국제적 모범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매년 여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그렉 페스티벌(Grec Festival de Barcelona)은 아예 융.복합이라는 개념의 쓰임부터 남다르다. 이 축제에 참여하는 이들은 기술 자체의 미적 가치를 예술로 인정한다. 또 예술적 표현의 확장을 위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에겐 융.복합의 의미를 묻는 것 자체가 실수처럼 느껴진다.
지금 문화 예술계에서의 융.복합이란 단어는 마치 유행처럼 소비되고 있다. 그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왜 지금 이 시점에 그게 중요한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도 문제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나 스페인의 사례를 통해서도 우린 융.복합이란 단어의 안과 밖에서 벌어지는 예술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스스로 장르주의를 부정하는 바르셀로나의 아티스트에게선 예술을 사조의 구분 없이 다각도로 바라보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프랑스의 아트 센터에선 융.복합의 쓰임이 단지 한때의 퍼포먼스로 끝나지 않고 고유의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 한순간의 흉내로는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융.복합 예술의 진짜 효과를 느끼고 싶다면, 그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