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e s for Invalids
아픈 사람에게 와인은 독일까, 약일까? 지독한 폐렴을 앓는 동안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이 직접 해답을 찾아 나섰다.
납 성분이 없는 오스트리아산 수제 명품 와인잔 브랜드 찰토(Zalto)의 화이트 와인글라스. Crystal & Co.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일정한 패턴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내 경험으로 보건대 연애, 육아, 일, 건강, 혹은 건강에 따른 질병 문제로 화두가 넘어간다. 혹시나 나처럼 런던에 살고 있다면 이따금 부동산 가치 문제도 끼어들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건강이 나빠진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는 매우 따분한 일상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난생처음 한 달간 폐렴과 씨름을 하게 되자 문득 ‘환자를 위한 와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병약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사람에게도 모든 형태의 알코올 음료는 좋지 않으며 어떻게든 술은 피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부 의료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잘 안다. 아마 그들은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환자에게 와인을 처방하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헝가리의 토카이나 남아공의 콘스탄샤 같은 유서 깊은 와인은 건강에 이로운 이른바 ‘기적 같은’ 효능으로 한때 엄청난 명성을 쌓았다. 20세기 초 일부 의사와 산파는 임신부의 철분 수치를 높이고자 흑맥주를 권장했으며, 출산 후 회복을 위해 포트와인같은 술을 권하기도 했다. 호주는 주류가 아닌 다소 문제적 부류인 토닉 와인(강한 맛과 달콤한 맛을 동시에 지닌 모든 종류의 와인. 하루 세 잔을 마시면 심장이 튼튼해지고 건강해진다는 속설이 있다)을 기반으로 와인 수출에 역점을 둔 적이 있다. 심지어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민간 병원 중 하나인 런던 클리닉에서는 환자에게 식사 메뉴와 함께 와인 리스트를 제공한다(알코올 의존 경향이 있는 환자는 곤란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액체로 병원 고형식을 씻어내리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 주문 가능하다). 심한 감기에서 독감으로, 이어 폐렴으로 악화되는 단계를 겪으며 나는 컨디션이 엉망일 때 와인에 대한 느낌이 어떤지 조심스레 모니터링했다. 직업적으로 거의 매일 와인을 시음하고 또 저녁마다 와인을 마시긴 했지만, 나흘쯤 완전히 식욕을 잃었음에도 와인을 마시고 싶은 욕망이 든다는 사실이 퍽 놀라웠다. 그것은 상당히 기묘한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거의 냄새를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코가 꽉 막힌 상황 때문인 듯했다. 다행히 그러나 꽤나 갑자기, 강렬하게 후각이 되돌아왔다. 방 안에 둔 크루아상 냄새가 거슬려서 치워야 했을 정도다. 누군가 호의로 보내준 꽃다발 속 각기 다른 꽃의 향기를 까다롭게 구분해내기도 했다.
1 헝가리 토카이 지방은 프랑스의 소테른에 버금가는 귀부 와인 산지로,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난 진하고 달콤한 와인은 약으로도 애용되었다. ‘아주 에센시아’는 토카이를 대표하는 로열 토카이사의 최상위 제품이다. 신동와인
2 <와인스펙테이터>에서 100점을 받으며 현존하는 최고의 포트와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다우 빈티지 포트 2007. 디저트 와인으로도 유명하지만 잰시스 로빈슨처럼 약용으로 마시기도 한다. 나라셀라
3 바롤로 와인을 숙성시키기 전에 대황과 나무 뿌리, 카다몬 씨앗, 허브 등을 첨가하고 주정 강화한 바롤로 키나토. 열을 다스리고 속을 편안하게 하는 등의 효능이 있다.
사실 와인에 대한 갈증을 제대로 되찾은 무렵에도 하루 24시간 거의 침대에 누워 지냈는데, 그때처럼 양질의 발포성 와인을 간절히 원한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몸이 좋지 않았을 때 몇 번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샴페인은 원기 회복에 도움이 되며, 마시기에도 용이해 보인다. 어쩌면 침대 시트에 레드 와인을 흘리는 것보다 화이트 와인을 쏟는 게 죄가 덜할 것이라는 무의식적 자각도 있을 것이다. 루이 14세의 주치의는 샴페인 대신 부르고뉴 와인을 권했다고 하나, 스파클링 와인은 이제 진짜 와인이 아니라는 편견을 떨쳐낸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탄산이 기분이 좋아지는 활력소로 작용하는 것 같다(발포성 알약 알카셀처를 찾는 것과 동일한 이치일까). 공교롭게도 내겐 와인에 대한 갈증이 되살아나자마자 마실 만한 최고급 프란치아코르타(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가 몇 병 있었고, 그 와인은 다시 와인 세계로 돌아가기에 적격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침과 거친 호흡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어 기꺼이 계단을 내려가 주방 식탁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예전에는 미처 모르던 크나큰 애정으로 즐겨 마신 와인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포트와인이다(샴페인에서 곧장 포트와인이라니, 상당히 거리가 먼 도약이라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 포트와인의 부드럽고 풍부한 목 넘김은 따끔거리는 목구멍에 위안이 되었고, 아찔할 만큼 강렬한 향은 마치 가장 사치스러운 기침약 같았다. 1~2주일 동안 나는 온갖 종류의 포트와인에 빠져지냈다. 격조 높은 연한 황갈색 토니 우드 포트와 진하고 강렬한 자줏빛 빈티지 포트를 총망라했다. 건강할 때 주정 강화하지 않은 일반 와인을 소비한 나는 높은 알코올 도수 때문에 포트와인을 자제해야 할 것 같았지만, 수척해진 상태에선 높은 알코올 도수가 오히려 도움이 되는 듯했다.
알약을 담은 와인잔은 찰토의 보르도 글라스, 레드 와인을 담은 잔은 포도 품종과 상관없이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찰토의 유니버설 글라스. Crystal & Co.
물론 의학적 목적으로 특별히 만든 와인도 존재한다. 그중 최고는 바롤로 와인에 다양한 질병과 열을 다스리는 나무 껍질과 허브를 첨가해 강화한 ‘바롤로 키나토’다. 스위스 발레 주의 지역 특산 와인 ‘위마뉴 블랑’은 전통적으로 허브와 시나몬·사프란·히솝을 가미, 출산을 앞둔 여성의 기력 보강을 위해 마시도록 했다. 대체로 더 강하고 달콤하며, 허브 향이 진한 와인일수록 질병 치료 효과가 높다고 자처한다. 그러나 나는 환자가 마시고 싶어 하는 와인이 회복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위대한 쾌락 가운데 하나인 와인을 금지해야 한다는 말은 환자에게 절대하고 싶지 않다.
잰시스 로빈슨
영국 출신의 세계적 와인평론가이자 <Oxford Companion to Wine>의 편집자. 휴 존슨과 함께 <The World Atlas of Wine>을 집필했으며 <파이낸셜타임스>에 매주 와인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TV 출연과 강연, 시음 행사 등 와인 관련 활동을 다양하게 펼친다. <노블레스>에는 3개월에 한 번씩 와인 칼럼을 소개하고 있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글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 사진 김흥수 스타일링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