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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sses and How to Use Them

LIFESTYLE

와인 마실 때 와인잔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하여.

심미적이며 과학적 기능을 갖춘 현대적 와인잔의 효시가 된 리델의 소믈리에 시리즈. 사진 속 제품은 새롭게 추가한 레x타이 보르도 잔으로 스템 부분을 레드 와인처럼 매혹적인 붉은빛으로 표현한 제품이다. Daeyoo Life

기계로 만든 최상의 정교하고 가벼운 글라스 리델의 베리타스 시리즈. 왼쪽은 샤르도네 잔으로 오크 숙성한 화이트 와인의 풍부한 향을 느낄 수 있도록 기존의 화이트 와인잔보다 볼을 넓게 만들었다. 오른쪽은 샴페인용 글라스로 플루트 형태보다 잔의 림이 넓어서 샴페인의 풍미를 더욱 잘 살려주며 미세한 홀을 볼 안에 만들어 샴페인의 버블이 잘 형성되고 길게 유지되도록 했다. Daeyoo Life

와인잔을 거꾸로 매달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한 나의 유리 장식장을 보면 지난 수십 년간 유행한 와인잔의 추세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와인 애호가로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시기엔, 잔의 윗부분을 잘라낸듯 작고 둥근 ‘파리 고블릿’으로 와인을 마시면서도 꽤나 행복해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질색할 것이다. 유리가 두툼해 잔의 테두리가 투박한 것이 못마땅하고, 깊이도 충분치 않아 무엇보다 중요한 와인의 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탓이다.
1970년대 말에는 오랜 친구 마이클 브로드벤트가 ISO 인증을 받아 특별히 디자인한 잔으로 와인을 시음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도 비로소 진정한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길이가 약 6인치(15cm)에 불과한 이잔은 손잡이가 짧고 볼이 길쭉한 튤립 모양이었다. 깊이감은 그런대로 충분했지만 대다수 사람이 더 큰 잔을 선호하는 요즘 경향으로 보면 끔찍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형태다. ISO 인증 와인잔은 와인의 양을 확인하기 쉬워 도수가 높은 포트와인을 내놓을 때 가끔씩 사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꽤 많은 와인 생산자와 매매업자가 자신의 와인을 뽐낼 의도로 이 작은 와인잔을 쓰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최소한 문고판 책 크기에 견줄 만큼 키가 크고 단순하면서도 적당한 모양의 볼을 갖춘 와인잔을 경험하고 나면 옛날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오스트리아의 유리업자 게오르그 리델은 와인 전문가에게 ‘와인잔 품질의 중요성’을 일깨운 공이 크다. 딱히 이타적 명분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하는 와인잔과 자신이 만든 잔을 다양하게 비교하기 위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수많은 시음회를 개최했다. 와인잔을 고르는 나의 최저 기준이 얇은 유리 두께, 올바른 볼 모양, 온도 변화 없이 와인을 돌릴 수 있는 적절한 길이의 손잡이로 정해진 것에는 확실히 그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와인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의 와인잔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크기와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리델 와인잔 시리즈는 정말이지 복잡하기 그지없다. 리델 가문 집에는 아마도 다양한 이름표를 붙인 유리잔으로 선반을 가득 채운 별도의 창고가 있겠지만, 한 가지 크기와 모양의 와인잔으로도 모든 종류의 와인을 음용하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에 점점 더 마음이 기운다.
샴페인 생산자, 그중 가장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들조차 이상적인 샴페인 잔은 (우리에게 친숙한) 플루트 형태가 아니라 표준형 와인잔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을 차츰 인정하는 분위기다. 최고급 셰리와 포트와인을 만드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나도 화이트 와인을 레드 와인보다 작은 잔으로 마셔야 한다는 통념은 비논리적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화이트 와인 역시 모든 면에서 레드 와인만큼 미묘하기 때문에 복합적 향을 도드라지게 하려면 똑같이 볼이 크고 섬세해야 한다.

잰시스 로빈슨이 극찬한 찰토의 유니버설 와인잔. 납 성분이 없는 크리스털 재질로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에 두루 사용이 가능하다. Vasar

리델 소믈리에 시리즈 포트 와인 잔. 도수가 높은 디저트용 술인 만큼 소량을 따를 수 있는 작은 크기다. Daeyoo Life

내 유리 장식장 꼭대기 층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와인잔은 10~20년 전에만 해도 우리 모두 최고급 레드 와인에 최적이라고 여긴 거대한 리델 보르도 와인잔 시리즈다. 지금 보면 좀 과도하게 크고 무겁게 느껴진다. 설거지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저기 굴곡과 홈을 넣은 기묘한 형태의 와인잔도 구비하고 있는데, 어떤 와인이라도 최상의 맛을 얻기 위해 대단히 공들인 디자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도통 손이 가지 않는다. 이후 둥근 볼 대신 각진 볼을 선호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와인 향이 풍겨 나오는 표면을 최대화하려고 지름이 가장 넓은 지점까지 잔을 채우곤 했다. 현재 내가 가장 선호하는 와인잔은 완전히 새로운 관능적 쾌감의 영역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다. 베니스에 뿌리를 둔 가문에서 만든 찰토 와인잔이 그것이다.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수공예품으로 산화납 성분이 없어 색이 흐려지지 않으며 내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얇은 유리로 각진 볼을 빚어낸다. 찰토 와인잔을 경험한 뒤 다른 와인잔은 그저 투박하고 무겁게만 느껴진다. 섬세함의 극치인 이 와인잔은 와인을 담아 마실 때 진가를 발휘한다. 극도로 섬약한 느낌이지만 일반 식기세척기로 세척과 건조가 가능하도록 튼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다. 우리 집에서도 몇 년째 사용 중인데 잔이 깨진 경우는 전적으로 우리 잘못이었다.
찰토 와인잔 역시 다양한 크기로 출시한다.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용 모델이 가장 볼이 뚱뚱한데, 기능을 떠나 일반 가정의 선반에 보관하기엔 과하다 싶다. 나는 모든 종류의 와인에 적합한 ‘유니버설’이라는 이름의 중간 넓이 와인잔을 사용한다. 최근 프랑스로 출장을 가보니 배려심 많기로 소문난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 생산자 장-마르크룰로가 찰토 와인잔 라인업 중 가장 길쭉한 화이트 와인용 잔에 자신의 최고급 뫼르소 와인을 따라 선보이던데, 그 잔 역시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가장 인기 있고 값비싼 뫼르소 와인 생산자 중 하나인 코슈-뒤리에서는 코냑 잔처럼 생긴 우스꽝스러운 작은 풍선 모양의 잔에 놀랍도록 훌륭한 와인을 따라주었다는 안타까운 사실. 피에르-이브 콜랭-모레가 유니버설 찰토 잔을 쓰는 데 반해 어마무시한 시음가로 알려진 도멘 르루아의 마담 랄루 비즈 르루아는 여전히 다소 둥글납작한 잔을 시음에 사용한다. 리델과 함께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의 자손이 이 사실을 안다면 분명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도멘 퐁소에서는 시음자에게 퐁소 문양을 새긴 큼지막한 부르고뉴 와인잔을 제공하는데, 이는 아주 영리한 처사다. 사실 이제는 세계의 모든 와인 생산국에서 사용하는 와인잔의 품질이 확실히 향상된 것을 느낀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변화라고 하겠다. 특히 ‘아름다운 형태’ 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탈리아는 최고 품질의 와인잔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최초의 국가다.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나처럼 바쁜 대다수의 와인 기고가가 매번 새로운 와인으로 잔을 공들여 헹궈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날 처음 시음하는 와인이라면 반드시 잔에 세제나 깨끗하지 않은 물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새로운 와인을 맛볼 때마다 그러는 건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아무튼 와인 애호가에게 와인잔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한 모든 이에게 찬사를 보낸다. 오늘날엔 찰토 와인잔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폭넓은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다.

잰시스 로빈슨
영국 출신의 세계적 와인평론가이자 의 편집자. 휴 존슨과 함께 을 집필했으며 <파이낸셜타임스>에 매주 와인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TV 출연과 강연, 시음 행사 등 와인 관련 활동을 다양하게 펼친다. <노블레스>에는 3개월에 한 번씩 와인 칼럼을 소개하고 있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박지홍  스타일링 김희진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