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의 끈기
소수의 영혼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전봉초 교수가 1965년 창단한 서울바로크합주단을 35년째 이끌고 있는 음악감독 김민이 그렇다. 제대로 된 악보조차 구하기 힘들어 연주자들이 직접 손으로 써 내려가던 시절 초대 악장을 맡은 김민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의 놀라운 성장이, 기대하지 않은 두둑한 연말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라고 말한다.
오는 2월 23일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연습이 한창이다.
음악감독 김민은 35년째 합주단을 이끌고 있다.
지난 1월 12일, 할리우드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존 말코비치가 한국에 왔다. 그의 첫 방한에 영화계가 들썩였지만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가 있을 정도로 영화 속 결핍과 불안을 완벽히 연기한 개성파 배우 존 말코비치가 영화관을 등지고 선 곳은 공연장 무대였다. 주로 사이코패스, 범죄자, 살인자, 악당 등의 역할을 도맡은 그가 난데없이 공연이라니. 다시 영화계가 술렁였다. 존 말코비치와 저녁 약속을 잡고 싶은 배우들이 줄을 섰고,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또 다른 줄을 댔다. 그는 미국 대사관에서 주최한 리셉션에 참석하고 조계사를 찾아 대웅전을 둘러봤으며, 인터넷에는 그곳에서 존 말코비치와 함께 찍은 국내 유명배우들의 사진이 나돌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1월 14일, 예술의전당에 유례없이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한국 최고(最古)의 실내악단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소프라노 서예리가 헨델과 모차르트를 노래하고, 초청 지휘자 세르게이 심바탄이 슈베르트 교향곡 5번을 지휘하고, 여기에 존 말코비치의 내레이션과 슈니트케의 피아노협주곡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획기적 프로그램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특히 서울바로크합주단 창단 50주년 기념 특별 콘서트에 존 말코비치가 내레이터로 참석한다는 사실은 한국 관객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날 무대에서 존 말코비치는 슈니트케의 피아노 협주곡에 아르헨티나 극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소설 <영웅들과 무덤에 관해>중 3장 ‘장님에 대한 보고서(Report on the Blind)’ 원문을 해설하는 형식의 이색적인 공연을 선보였다. 예술계에서 장르와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지만 정통 클래식 공연에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내레이션을 하는 건 보통 내공으로는 불가능한 일. 더구나 서울 초연인 까닭에 무대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늘 새로운 실험을 좋아하는 김민 감독은 “돌이켜보면 우리는 항상 새로운 도전 과제에 부딪혔을 때 한층 성장해왔다”며 과감히 새로운 연주 형식을 시도했다. 공연을 본 평론가들은 김민 감독에게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고 칭찬했고, 작곡가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어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날의 특별 연주회는 ‘월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런던과 베를린, 모스크바, 빈, 바르샤바, 베이징, 뉴욕을 돌며 전 세계에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창단 50주년을 알릴 예정이다. 2월 23일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퀸 엘리자베스 홀 공연을 앞둔 김민 감독을 만났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매주 주말 모여 3시간씩 정기 연습을 진행한다.
우선 창단 50주년을 축하합니다. 1965년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이자 첼리스트인 전봉초 교수님이 음대생 16명을 모아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창단했을 때에만 해도 악보조차 구하기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연습실도 없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건물 옆 을지예식장의 작은 연습실을 빌려 연습하셨다고요. 조명도, 냉난방도 제대로 안 되는 곳에서 초기 멤버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선생님도 당시 초대 악장으로 고생이 많으셨죠? 그때는 사회 전체가 열악했어요. 모든 것이 부족했죠. 자료도, 인력도 부족했어요. 클래식 악보를 구할 수 있는 곳은 명동악보사가 유일했어요. 명동악보사도 90% 이상의 악보를 일본에서 들여왔죠. 전봉초 선생님이 악보를 하나 구해오면 우리는 그걸 파트별로 나눠 일일이 손으로 그렸어요. 직접 그리다 보니 어땠겠습니까? ‘도’인지 ‘레’인지 애매모호하게 그린 것은 연주하다 막 틀리고 그랬어요.
1960년대 중반이면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00달러가 넘어섰을 때입니다. 클래식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공연장도 700석 남짓의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뿐이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전봉초 교수님은 왜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만드신 건가요? 그 당시 한국에는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없었어요. 그러던 중 교수님이 1960년 세계음악협의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셨죠. 유럽 현지에서 바로크 음악을 중심으로 실내악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는 실내악 악보 수십 장을 구입해 귀국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군대에 다녀와 대학교 4학년이었어요. 당시 우리 학교에 오케스트라는 있어도 실내악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죠. 기악끼리 함께할 수 있는 모임이 별로 없어서 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교수님이 만드신 실내악단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좋았어요. 힘든 것도 몰랐죠.
1960년대 당시 음악 전공자의 여건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음악가를 목표로 삼은 학생은 다 그랬지만 좋아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어요. 지금이야 많은 음악가가 빛을 보지만, 1960년대에는 음악에 비전이 있다고 보지 않았어요. 대우가 형편없었거든요. 음악대학 진학은 ‘가난한 음악가’가 되는 걸 전제로 했죠.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은 지방이든 어디든 음악 교사로 가는 것이 그나마 최고였어요. 당시 시립교향악단도 있었지만 거기 월급이라는 게…(웃음)
그래도 선생님은 1969년에 독일로 유학까지 가셨잖아요. 그 정도면 꽤 선택받은 편 아닌가요? 서울 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유학을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고, 도저히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됐어요. 그게 아니라도 유학은 하늘의 별 따기였죠. 현지에 재정보증을 서줄 사람이 없으면 허가가 나지 않았거든요. 전액 장학금을 받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려던 유학을 못 가니 뒤늦게 방황기가 찾아왔죠. 음악을 접고 다방을 했을 정도니까요. 그 모습을 본 지도 교수님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며 “빨리 제자리로 돌아오라”고 용기를 주셨고, 그래서 다시 연주를 할 수 있었어요. 국립교향악단 부악장으로 활동하던 중 1969년에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돼 독일로 유학을 떠났죠. 그게 스물여섯 살 때예요.
서울바로크합주단에서 활동하다 중간에 유학을 떠나셨네요. 현지에서도 실내악 활동을 하셨나요? 독일로 유학 간 뒤 쾰른 실내악단에서 경험을 쌓으면서 실내악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아까 말했듯이, 서울에선 악보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죠. 그런데 독일에서는 인기 있는 최신 악보가 많은 거예요. 그걸 다 구해다 단원에게 보냈어요. 헨델이나 바흐, 비발디만 연주하던 단원은 해외의 악보를 쉽게 구하게 되면서 퍼셀과 스카를라티의 작품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게 됐죠.
유학을 마치고 1979년 국립교향악단(현 KBS교향악단)의 악장을 맡으면서 귀국하셨습니다. 당시 전봉초 교수님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서울바로크합주단이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는데, 그걸 이어 맡으신 건가요? 유학 시절 실내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터라 꼭 이어가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네가 하겠다면 해라”라고 하면서 현금 50만 원과 몇 가지 프로그램 자료를 건네주셨죠. 1980년 12월 14일에 제2의 창단 연주회를 치렀어요.
1980년 선생님이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지휘자가 없는 악장 중심의 전문 실내악단으로 조직을 재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힘든 개척자의 길을 자진해 걸으신 건데, 지금은 해외 초청 공연만 120회 이상(국내외 공연 약 540회) 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첫 번째 해외 연주는 어디서 했나요? 1987년이었어요. 현대자동차에서 포니에 이어 엑셀을 만들어 미국 시장에 처음 진출할 때였죠. 국내 회사가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할 때 당시에는 제품보다 먼저 문화를 알리는 일에 힘을 쏟았어요. 그 일환으로 한국의 공연팀이 미국에 가서 공연하기로 했는데, 현대 관계자 한 분이 우리를 추천한 거예요. 그 덕분에 워싱턴에 있는 케네디 콘서트홀에서 첫 번째 해외 공연을 할 수 있었죠. 그러다 “이왕 간 김에 뉴욕에도 가자” 해서 뉴욕과 도쿄에서도 연주회를 열었고요.
처음으로 해외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얼굴을 알린 건데, 반응은 어땠나요? 평가가 좋았어요. 특히 <워싱턴 포스트>에서 호평을 했죠. ‘우리도 충분히 서양 음악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기면서 ‘글로벌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나아가자’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죠. 이어 1991년에 동남아시아 공연을 했고, 1997년 유럽 페스티벌에 초청된 이후 몇 년간 초청받아 연주하면서 우리의 경쟁력을 키웠습니다.
음악감독 김민과 바이올리니스트 김광훈
특히 서울바로크합주단이 크게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된 공연이 있나요? ‘굽이굽이’라는 말이 있죠. 한두 공연이 아니라 지난 50년을 쭉 돌이켜보면 기회가 왔을 때 잡고, 위기가 왔을 땐 넘기고 그러면서 성장한 것 같아요. 그런데 기회를 잡고 위기를 넘기려면 내공이 있어야 해요. 우리 체임버 오케스트라같이 개인이 아닌 조직에선 팀워크에서 내공이 나옵니다. 제가 1980년에 음악감독을 맡은 이후 지금껏 30년 넘게 함께해온 멤버가 있어요. 전용우 현 KBS교향악단 악장이죠. 정재윤 교수처럼 20년 이상 된 멤버는 더 많고요. 오랫동안 함께한 멤버들이 옆에서 받쳐줘야 실내악은 비로소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있어요.
체임버는 오케스트라보다 단원의 이동이 매우 중요할 것 같아요. 10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에서는 한두 명의 멤버가 바뀌어도 소리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20명 안팎의 체임버에선 그렇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실내악에서는 단원이 10~20년 함께 작업할 때 소리의 퀄리티가 높아져요. 평소엔 그걸 느끼지 못하다 새삼 실감하게 되는 계기가 있어요. 샌프란시스코, 파리, 런던 등 연주 환경이 바뀔 때 그렇죠. 환경과 청중이 바뀔 때마다 여지없이 고비가 나타나는데, 그럴때 그 내공이 힘을 발휘합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한국 서양 음악사의 집약된 모습을 볼 수 있는 민간 체임버 오케스트라입니다. 민간단체로는 독보적인데,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우는 어떤가요? 클래식 역사가 오래된 일본에는 다양한 단체가 많을 것 같습니다만. 일본은 서양 교육 시스템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요.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문화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죠. 공연이 많이 열린다는 소리도 되지만, 그만큼 청중이 충분하다는 뜻도 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까지 공연 비즈니스가 이루어지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 토양이 척박한 환경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창단 50주년은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창단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월 14일 열린 특별 콘서트는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가 함께해 더욱 회자되었는데, 섭외 과정이 궁금합니다. 1995년에 영 뮤지션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을 하면서 스위스 공연 매니지먼트 회사 르트(Gart)의 이노 미르코비치 회장을 만났는데, 그분이 유네스코 문화대사예요. 유네스코 산하에 유네스코 아티스트라는 단체가 있어요. 서울바로크합주단도 거기에 속해 있죠. 존 말코비치도 유네스코 아티스트고요. 공연 몇 달 전 이노 미르코비치회장을 만나 “우리가 창단 50주년을 맞는다”고 하니 존 말코비치와의 공연을 추천했어요. 존 말코비치가 하루 영화 찍는 출연료가 55만 달러래요. 우리는 그만한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교통비 정도만 받고 거의 무료로 서울에 와줬어요.
존 말코비치가 한 인터뷰에서 “늘 음악가에게 영감을 받고 즐거움을 얻습니다. 가끔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삶의 원동력을 얻고 있죠”라고 말하는 걸 봤어요.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요? 비록 며칠 같이 있었을 뿐이지만, 음악뿐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는 진지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어요. 슈니트케의 피아노곡에 맞추어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작품을 내레이션했는데, 클래식을 대하는 진지한 모습에 저도 놀랐습니다.
기존 클래식 공연과 다르기 때문인지 산만하다는 사람도 있고, 슈니트케의 곡에 더 귀 기울이고 싶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새로운 시도에 박수를 보낸 관객이 훨씬 많았지만요. 선생님 개인적으론 어떠셨나요? 새로운 형식으로 이번 연주가 주목을 받긴 했지만, 우리 연주는 쇼가 아니었어요. 새로운 장르의 기악 드라마랄까? 피아노는 본래 혼자 하는 악기인데, 거기에 내레이션을 더하는 새로운 시도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들이 그날 많이 왔는데, 새로운 분야를 보여주고 길을 열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이 보기에 일반 관객의 평가는 어땠나요? 그날 2시간 동안 5개의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내레이션이 들어간 프로그램은 25분짜리 하나 뿐이에요. 다른 4개 곡은 전형적 형태의 프로그램이었죠. 그리고 내레이션을 넣기 위해 슈니트케의 곡을 편곡하진 않았어요. 원곡 그대로였죠. 물론 그 순간에는 약간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을 거예요. 부정하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앞으로 작곡가가 기악과 내레이션을 섞어 곡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줬다고 생각해요.
이번 연주회에서 지휘를 맡은 세르게이 심바탄은 한국에서 첫 공연이었습니다. 클래식 애호가 중에는 그를 유심히 본 사람도 있습니다. 1987년생이라고 하던데, 그가 지휘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IMG라는 세계적 기획사가 있어요. 빗대자면 아이돌 가수를 키우는 SM 같은 건데, 예전에 조수미 씨도 거기 소속이었죠. 세르게이 심바탄은 IMG가 키우는 젊은 지휘자예요. 가르트사의 아티스트기도 하죠. 우리는 이번 서울 연주를 시작으로 2월 23일 런던에서 창단 50주년 기념 순회공연을 이어가요. 유럽 공연에선 세계적 지휘자 랄프 고토니가 지휘를 맡습니다. 그전에 서울에서 먼저 곡을 맞춰야 했는데, 가르트사에서 우리에게 유능하고 젊은 지휘자를 소개한다면서 그를 보냈죠.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지휘자인데 굉장히 아이디어가 많고 에너지가 넘쳐요. 다만, 서울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슈베르트를 했는데, 슈베르트는 독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의 곡이잖아요. 그걸 하기엔 좀 젊다는 생각은 했어요. 슈베르트는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사람이 하면 더 좋거든요.
2월 23일에는 런던 사우스뱅크 센터 퀸 엘리자베스 홀에서, 2월 24일에는 베를린 콘체르트 하우스에서, 2월 27일에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그레이트 홀에서 공연하고 빈과 바르샤바 등 7개 도시로 순회공연을 이어갑니다. 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존 말코비치와의 연주에 대한 반응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세요? 유럽에선 아무래도 곡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 같아 내심 기대하고 있어요. 또 유럽에선 초연이라 관객의 반응도 궁금하고요. 사실 존 말코비치의 무대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서 좀 그렇긴 한데, 우리가 연주하는 작곡가에게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슈니트케는 최고의 현대음악 작곡가입니다. 존 말코비치가 내레이션하는 슈니트케의 작품도 현대곡이죠. 제가 알기론 일반적 클래식 애호가는 현대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 솔직히 힘들어하죠.(웃음) 미술에서 추상화를 힘들어하는 것과 같아요. 불협화음이라든가 생소한 화음을 듣는 걸 사람들은 어색해하죠. 그런데 음식도 그래요. 새로운 음식도 처음엔 생소하지만 자꾸 먹다보면 익숙한 맛이 되어가잖아요. 현대음악, 미래의 음악도 똑같아요.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하죠. 유럽 관객은 그 과정을 여유 있게 즐기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먹다 쓰면 바로 뱉죠. 그래서 이번 유럽 공연이 더욱 기대돼요.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정부의 지원 없이 후원자에 의해 운영되는 단체입니다. 민간이 직접 운영하는게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것이 가장 힘드세요? 힘들다기보다는 과제가 좀 있죠. 우선 내가 물러난 후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이끌어갈 3대 음악감독을 뽑는 것도 그렇고,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이름을 코리안체임버오케스트라(KCO)로 바꾸려는 것도 그렇죠. 창단 당시에는 바로크 시대 음악만 연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 컨셉으로 할 수 없어요. 그래서 2016년부터는 정식으로 이름도 바꿀 예정이에요. 내 음악 인생의 마지막 과업이다 생각하고 일하고 있어요.
앞으로 50년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겠죠?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이사님 한 분이 “창단 100주년이 되면 1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하시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더도 말고 딱 50년만 더 사시라”고 했어요. 새로운 50년은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서울바로크합주단은 현악 앙상블인데, 2016년부터는 목관과 금관 단원을 보충해 45명 규모의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계획하신다고요? 수석 객원 지휘자를 세워 편성도 늘리고 레퍼토리도 체임버와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을 둘 다 해볼 생각입니다. 후보 지휘자로 현재 18명 정도가 물망에 올라 있어요. 서울바로크합주단과 누가 잘 맞을 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지휘자를 모신다고 해도 선생님은 계속 연주하시는 거죠? 연주를 오래 하는 게 맘처럼 쉽지 않아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연주자 스스로만 알죠. 운동선수와 같아요. ‘아, 이제 난 연주를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그런 거요. 더 이상 좋은 연주를 보여줄 수 없을 때까지는 계속해야죠.
선생님은 무엇을 위해 음악을 하시나요? 나를 위해서요. 음악을 떠난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어요. 음악이 곧 삶이죠. 저는 버킷 리스트가 딱 하나예요. 음악. 그게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김민은… 국내 음악계에서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지닌 솔리스트이자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며 음악 교육자다. 서울예술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함부르크 N.D.R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에서 활동하다 귀국, 국립교향악단 단장에 이어 1981년부터 1994년까지 KBS교향악단 악장으로 활약했다. 1980년에 서울바로크합주단을 재조직, 새롭게 창단해 오늘날 한국 실내악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폴란드와 한국 음악 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폴란드 정부에서 폴란드 문화훈장을 받고 이탈리아 대통령에게 ‘A Life of Music’ 증서와 함께 메달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이자 서울바로크합주단 음악감독, 서울국제음악제(SIMF) 총 감독을 맡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이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