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라는 혁명, <봄의 제전>
20세기 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봄의 제전>을 보면, 고‘ 전’의 본래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싶다.
국립발레단이 지난해에 선보인 <봄의 제전>. 본래 여성이 맡던 제물 역을 발레리노가 맡아 화제가 됐다.
사진 제공 | 국립발레단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당시 극장에선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난동 속에 초연되고 있었다. 욕설과 함성, 야유조의 휘파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다른 한쪽에선 그에 반하는 항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안무를 담당한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zinskii)는 관객의 태도에 화가 나 무대 위로 뛰쳐나가려고 바동거렸다. 스물여덟 살의 소심한 무명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는 그런 니진스키를 말리려고 그를 끌어안았다. 당시 발레 뤼스의 창립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아길레프(Sergei Pavlovich Diaghilev)는 관객의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조명을 켰다 끄길 반복했지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런데도 지휘자는 계속 지휘봉을 휘둘렀다. 무용단도, 악단도 관객의 혼란을 완벽히 무시하고 공연을 이어갔다. 그런데 잠깐, 관객들은 대체 이 공연을 보고 왜 그리 흥분한 걸까?
관객의 흥분은 발레 공연에선 처음 경험하는 어떤 폭력성과 선정성에서 비롯됐다. 봄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산 처녀를 제물로 바친다는 내용의 <봄의 제전>에 거친 폭력과 성적 요소의 춤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관객에게 이교도의 주술적 내용은 심한 모독이었고, 심장을 쿵쿵 울리는 원시적 리듬과 익숙하지 않은 불협화음 또한 심신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였다. 아무리 20세기 초 파리가 퇴폐와 자유주의의 온상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봄의 제전> 초연 안무는 공식적으로 보존되지 않아 당시 관객의 증언으로만 전해진다. 핵심 플롯은 이렇다. “봄, 상상 속의 원시 부족은 대지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제물은 부족 중 가장 아름다운 처녀. 제사가 시작되고, 원로들이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선택된 처녀는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여기, 공연과 관련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전날 그리 난리법석을 떨며 극장에 앉아 있던 관객이 이튿날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얌전히 공연을 관람한 것. 심지어 같은 극장에서 열린 두 번째 무대에선 작게나마 환호성도 들려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많은 평론가가 새로운 실험적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고, 이런 해프닝 속에서 공연은 자연스레 노이즈 마케팅 효과를 얻어 (뜻하지 않은)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것. 이후 <봄의 제전>은 호평과 비판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수십 년간 무대에 올랐다.
“오늘날 <봄의 제전>은 현대 예술의 불멸의 이정표이자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 이 공연과 음악에 비판의 칼을 들이대던 사람들도 결국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 시작했다.”
그런 <봄의 제전>에 대한 대중의 갈팡질팡 여론이 확실히 ‘긍정’으로 돌아선 건 1940년대의 일이다. 1940년, 월트 디즈니가 클래식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다는 취지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판타지아>에 ‘봄의 제전’을 축약본 형태로 삽입한 것이다. 사실 <판타지아>는 발레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진화’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발레곡과 애니메이션의 이 ‘뜬금없는’만남은 예상을 깨고 큰 인기를 끌었다. 미키 마우스의 귀여운 얼굴에 원시 부족의 불협화음이라니,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 가? <판타지아>로 느닷없이 세계의 대중 앞에 나타난 <봄의 제전>은 이후 다양한 예술로 버전업돼 관객을 찾았다.
1975년 벨기에 브뤼셀 <봄의 제전> 공연 당시의 피나 바우슈 무용단
20세기에 셀 수 없이 많은 <봄의 제전> 무용이 제작됐지만, 그중 니진스키의 전설을 이어간 거장으로 독일 출신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를 꼽을 수 있다. 그녀의 안무는 니진스키의 그것에 비해 좀 더 ‘여성’과 ‘희생’에 초점을 맞췄다. 제물로 선택된 여자 무용수가 극의 마지막에 상체를 노출하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는가 하면, 특유의 인간 본성과 남녀 간의 대립 구도 등 그간 그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오랜 고민과 응축된 예술적 표현이 일관되게 드러나 찬사를 받았다. 피나 바우슈 무용단의 <봄의 제전>은 일찍이 1979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우리 관객에게도 소개되었다. 당시 세계 무용계와 격차가 심한 우리 무용계에서 그녀의 작품은 가히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특히 제물로 선택 된 여성이 입고 있던 붉은 원피스를 찢었을 때 국내 관객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의 처절한 모습보다 여성 무용수가 한쪽 가슴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한편 음악적으로 볼 때, ‘봄의 제전’은 세계 최고 명성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레퍼토리였다. 그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은 반복적 연주 경험을 통해 ‘봄의 제전’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입부부터 종결부까지 베를린 필의 합주와 독주 악기들의 연주 솜씨는 특별한 오라를 풍길 정도. 제2차 세계대전 후 클래식 음악계를 주무른 대가 중 한 명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도 생전 ‘봄의 제전’을 지휘하며 제대로 공연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았지만, 래틀은 평균적이면서 모범적으로 이 곡을 해석해 평론가들에게 ‘가장 정교하고 강력한 화음’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는 ‘봄의 제전’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3년 서울에서 국내 관객에게도 그 실력을 선보였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코코 샤넬의 운명적 로맨스를 다룬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한편 <봄의 제전> 초연 장면은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2009년)에도 실감 나게 재현돼 있다. 영화는 니진스키의 발레와 음악을 결합한 당시 무대와 관객의 소동을 실제에 가깝게 재연했다. 그런데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는 어떤 관계냐고? 영화는 충격의 <봄의 제전> 초연 현장에 있었던 샤넬이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예술성과 창의성을 간파하고 그에 게 호감을 느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각각 패션 산업과 클래식 음악에서 전통과 관습을 파괴하며 시대를 앞서간 혁신적 두 인물의 운명적 만남과 로맨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예술적 삶에 끼친 영향을 그려나간다. 샤넬이 스트라빈스키와의 사랑 속에서 그 유명한 향수 ‘샤넬N˚5’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봄의 제전>에서 영향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든 건 당대 화가도 마찬가지였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생전 니콜라이 레리흐, 피카소, 마티스 등과도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는데, 그중 니콜라이 레리흐는 <봄의 제전> 무대를 평소 관심이 있던 샤머니즘 스타일로 표현해 초연을 도왔다. 흑인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한 당시 그의 무대와 예술성은 <봄의 제전>을 통해 더욱 분명하고 확실해졌다.
이렇듯 오늘날 <봄의 제전>은 현대 예술의 불멸의 이정표이자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 이 공연과 음악에 비판의 칼을 들이대던 사람들도 결국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 시작했다. 원래 혁명적 작품의 탄생엔 늘 이렇듯 산고의 통증이 따르는 법.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모든 ‘고전’의 본래 이름은 ‘혁명’이 아닐까 싶다. 지금 고전으로 자리 잡은 것은 발표 당시 몰이해로 인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있어야 할 위치에 올라 전설이 되었다.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설이 된 ‘봄의 제전’을 올봄 조용히 한번 감상해보면 어떨까?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