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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OW

문득 현대인의 일상에 들어와 이야기를 건네는 제니 홀저의 메시지는 무감해진 우리의 정서를 깨우고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녀의 작업은 이런 질문을 남긴다. 미술에서 텍스트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또 예술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국관을 대표한 최초의 여성 아티스트, 제니 홀저 / Photo by Nanda Lanfranco

Jenny Holzer
제니 홀저

1950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났다. 오하이오 대학과 로드아일랜드 스쿨에서 순수 미술 학사와 석사 과정을 밟았고, 1970년대 후반에 텍스트를 사용한 개념미술을 시작했다.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돼 단독으로 전시했으며 그해에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1996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수여하는 크리스털상, 2011년 바너드 훈장을 수상했으며 현재 뉴욕에서 작업하고 있다.

1997년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의 작품 설치 전경 / ⓒ 1997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Erika Barahona Ede

유명 건축물 전면에 빛으로 투영한 텍스트, 넘실대는 파도 위에 머무는 단어, 전시장에 LED로 흐르는 메시지, 풋스툴 대리석에 새긴 짧은 경구. 만약 그 앞에서 발길이 머문다면 시선을 돌리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텍스트를 마주하는 동안, 그간 잊고 있던 감정이나 개인과 사회를 넘나드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 미국의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의 작품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환기시킨다.
텍스트를 활용해 정치적·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제니 홀저가 추상회화에서 개념미술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직접 쓴 문구를 작품화한 ‘트루이즘(Truisms)’, ‘생존(Survival)’ 시리즈나 문인의 글에서 차용한 텍스트를 이용한 작업이 내포한 호소력은 대단했다. 그중에는 ‘자유는 사치지 필수가 아니다’, ‘남성은 더 이상 당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등 도발적이거나 여성주의적 신념이 엿보이는 문구도 있다. 미술계는 텍스트 작업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면을 제시하는 그녀의 도전적 실험을 일찌감치 알아봤다.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번째 여성 작가로 선정됐고, 그해 최고의 국가관에 수여하는 황금사자상 역시 그녀에게 돌아갔다. 제니 홀저의 작품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런던의 서머싯 하우스, 독일 국회의사당, 뉴욕과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파리의 센 강과 암스테르담의 아르노 강가 등 국제적 미술관과 공공장소에서 수많은 관람객을 만났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조만간 새로운 국내 전시를 계획하고 있는 시점에 <아트나우>가 그녀를 인터뷰했다.

1 2015년 베니스 코레르 박물관에서 열린 전의 설치 전경 / ⓒ 2015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Philipp Ottendoerfer
2 ‘Are You Alive?’의 설치 전경 일부 / ⓒ 2016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Collin LaFleche

회화 작업을 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언어를 이용해 사회적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시작한 작업인가?
회화, 그중에서도 특히 추상화를 좋아하지만 오래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 작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소셜 리얼리즘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관람객이 흥미롭게 느끼면서도 도움이 될 만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자 매체와 다른 매체에 텍스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선보인 작품은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라는 메시지가 남긴 여운이 컸기 때문이다.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공공장소에 작품을 선보이게 했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맨해튼에서 밤에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한 여러 주제에 관한 문장 수백 개를 썼고,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그 방식이 꼭 기존의 예술 장르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사회적 움직임을 이끄는 기반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도 있고, 텍스트 속에서 상충되는 여러 신념을 발견하며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것이 한 개인이나 특수한 집단의 작업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원했으므로 포스터의 익명성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텍스트의 출처를 궁금해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고민하길 바랐다.
그렇게 텍스트 작업을 시작한 그때와 지금, 당신의 예술적 가치관에 변화는 없는가?
내 가치관은 매일 아침 바뀔 수도 있다. 사실 그러길 바란다. 한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예술이 미처 생각지 못한 놀라운 해결 방안을 제시하거나 그 전엔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면서 사회를 반영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
예전에 당신의 텍스트 작품은 직접 쓴 문구를 기반으로 했지만 요즘은 문인의 글귀나 누군가의 인터뷰 중 일부를 가져온다. 경각심을 깨우고, 때론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문구도 많다. 작품화할 텍스트는 어떻게 선택하는 편인가?
추모의 글을 부탁받은 게 계기가 되어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내세우기보다 추모의 대상인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한동안 시에 집중했고, 내 친구인 시인 헨리 콜(Henri Cole)이 자주 추천해줬다. 시를 건물, 강, 바다, 산과 나무 등에 라이트 프로젝션으로 쏘면, 시의 텍스트와 하얀 빛이 만나 서로를 더 근사하게 부각해준다. 텍스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선택하는데, 특정 시간과 장소에 어우러져 감동적인 울림을 줄 수 있는 문구를 고른다. 특히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글은 많은 사람의 관심사에 다가갈 수 있는 보편성과 지성,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자주 참고하는 편이다.

1 2016년 아트 프로젝트 이비사에서 공개한 설치 작품, ‘Are You Alive?’ / ⓒ 2016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Collin LaFleche
2Selection from Truisms: A single event…, 2015 / ⓒ 2015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진실한 목소리를 내는 ‘텍스트의 힘’이란 어떤 걸까?
가장 발달한 의사소통 수단인 언어를 사용하는 건 논리적이다. 하지만 텍스트 외에 컬러, 빛, 질감, 무게, 투광성, 속도 등을 이용해 표현하는 것도 좋아한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하고 있는데, 특히 짧은 경고성 문장을 담은 ‘생존’ 시리즈는 발받침 형태의 대리석 조각을 이용했다. 이런 풋스툴 조각은 5년 전 국제갤러리의 개인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돌은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 선택한 재료인가?
대부분은 텍스트를 먼저 정하고 어떤 매체를 사용할지 결정하지만 특정 매체나 증강현실 같은 특정 기술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대리석과 화강암을 이용해봤고 최근에는 더 다양한 돌로 벤치, 풋스툴, 석관, 플로어, 테이블 등을 작업했다. 최근 스페인 이비사의 야외 전시에서는 현지의 커다란 돌을 구해 설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있는 ‘생존’ 벤치는 어둡고 붉은 화강암을 선택했는데, 불편한 내용의 텍스트를 새기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2월 17일까지 개최하는 ‘아트 프로젝트 이비사’에서 선보인 ‘ARE YOU ALIVE?’에 대해 좀 더 듣고 싶다. 당신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한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서로 대치 중인 사람들에 관한 텍스트를 추처럼 움직이는 전자 빔으로 작업했다. 뉴스에서 수년간 불거진 전쟁에 대한 극대화된 증오와 더불어 난민과 테러리즘에 초점을 맞췄다. 또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전설을 다루는 시를 커다란 바위에 새겼는데, 기욤 아폴리네르가 20세기 초반 광기에 대한 근심을 담은 텍스트를 통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전쟁을 다시 돌아본 작업이었다.

2009년 루브르 박물관에 설치한 ‘Xenon for Paris’(2009년)
ⓒ 2009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Lili Holzer-Glier

1 여러 개의 LED 막대를 어긋나게 설치한 작품 ‘New Corner’(2011년) / ⓒ 2011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2 2013년 중국어로 작업한 작품 ‘Truisms: 金錢造就品味’과 ‘Light Stream’ / ⓒ 2013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Collin LaFleche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기대를 모으는 트랜스베이 트랜짓 센터(Transbay Transit Center)에서도 LED 신작을 영구적으로 설치할 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어떤 작품을 만들 생각인가?
나는 펠리 클라크 펠리 아키텍츠(Pelli Clarke Pelli Architects)의 열렬한 지지자고, 향후 그들의 작업도 매우 기대된다. 그들이 맡은 프로젝트인 트랜스베이 트랜짓 센터를 위해 투명한 화이트 LED를 공개할 생각인데, 캘리포니아와 미국 서부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담으려 한다.
당신의 작품은 공간이나 건축과 어우러져 분위기를 형성하기 때문에 어떤 장소와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할 것 같다. 텍스트보다 공간을 우선시할 때도 있는가?
건물이 제시하는 기회에 압도될 때도 있고, 텍스트나 매체를 우선시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미스 반데어로에, 프랭크 게리, 노먼 포스터, 장 누벨 등 여러 위대한 건축가가 만든 공간에 내 작품을 설치하는 영광을 누렸다. 내가 건물과 공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적합한 작업을 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빛과 색을 이용해 내 작품이 마치 그곳의 공기처럼 어우러지게 채우고 싶다.
공공장소에서 작품을 공개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관람객의 반응도 매우 다양할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관람객이 있는가?
누구든 내 작품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멈출 때 작가로서 보람을 느낀다. 바쁜 사람들을 멈추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밤에 사람들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서 조용히 생각에 잠긴 채 라이트 프로젝션을 감상하는 건 그 자체로 기적 같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도 위에 투사한 사랑에 관한 텍스트를 본 어떤 사람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적도 있다.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고, 또 그 텍스트가 관람객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사회적·정치적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 뜻을 알기 힘든 추상적인 작품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사이 톰블리의 정교한 회화에 매료되고, 루이스 부르주아의 무시무시한 조각에 떨리기도 하고, 루이즈 롤러의 지적인 예술 또한 존경한다. 예술이 한 가지 방식으로 작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시사적이거나 치유를 위한 예술은 물론이고 쓸데없어 보이는 불가해한 예술도 필요하다. 예술이 희망과 비전을 말하고, 비판적이거나 알지 못하던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을 초월할 때 진정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2004년과 2011년 두 차례 개인전을 개최했다. 조만간 세 번째 전시가 열릴 예정인데, 어떤 전시가 될지 귀띔해줄 수 있는가?
마지막까지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준비할 거라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할 수 없지만 돌을 사용한 작품과 회화 작품, 전자장치를 이용한 작품을 아우른 전시를 만들고 싶다. 내 전시를 보기 위해 국제갤러리를 찾는 관람객이 하나라도 흥미를 느끼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1 바로네스 엘자 폰 프라이타크-로링호벤의 ‘Astride’ 일부를 새긴 작품 ‘For Ibiza’ / ⓒ 2011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2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설치 전경 / ⓒ 2016 Jenny Holzer, member Artists Rights Society(ARS), NY, Photo by Collin LaFleche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