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빙, 날다
“쉬빙이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직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베이징 외곽의 한 먼지 뿌연 공장 구석에서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는 아직도 현재 경력이 부원장으로 되어 있고, 그 어디에도 쉬빙이 6개월 전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쉬빙을 옆에 두고 통역가와 에디터가 동시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만두니 정말 좋아요. 이제 진짜 작가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날 것 같은 쉬빙을, 진짜 작가로 돌아온 쉬빙을 베이징에서 만났다.
2008년 베이징 금융가에 설치한 ‘봉황’
테이트 갤러리 관장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 표지엔 부제로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천재 예술가들의 크리에이티브 경쟁’. ‘크리에이티브’와 ‘경쟁’. 각각 떼어 속으로 한 번,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니 두 단어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승부사 같다. 윌 곰퍼츠의 말처럼 요즘 현대미술 작가 사이에서 마지막 승부는 크리에이티브에서 갈린다. 1900년대 초반, 피카소가 자신의 작품 ‘Ma Jolie(내 귀여운 아가씨)’에 연인의 애칭 ‘Jolie’를 써 넣자 당시 사람들은 “대담한 시도다. 미술은 늘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했다”며 그를 용감하다 평했다. 하지만 시대는 흐르고 연인과 함께 잔 침대까지 전시하는 마당에, 요즘의 크리에이티브란 단순히 기법이나 표현의 새로움에서 벗어나 지금껏 다른 작가가 하지 않은 예술적 고민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파격적 아이디어일 것이다.
베이징 공항에서 1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공장 지대, 그 치열한 크리에이티브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소음과 먼지로 뒤덮인 거대한 공장 안에서 수십 명의 인부를 지휘하는 쉬빙(Xu Bing)은 단단한 하얀색 헬멧을 쓰고 방한복을 입은 채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동안 몇몇 해외 잡지를 통해 멀끔한 신사의 모습을 보여준 그는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채 ‘이게 원래 내 모습’이라고 말하듯 쉼 없이 다음 작업을 지시하고, 작업대로 올라가 재료를 확인하고, 용접 상태를 검사했다.
중국 최고의 설치미술가이자 서예가인 쉬빙은 충칭 출생으로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한 후 1990년 미국으로 이주해 문자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작가다. 문화 개방과 함께 중국의 현대미술이 급속도로 세계인의 관심을 받으면서 4대 천왕 같은 작가군이 생기긴 했지만, 현재 세계적인 중국의 작가로 쉬빙을 꼽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4000개의 가짜 글자를 만들어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을 완성한 ‘천서(Book from the Sky)’, 알파벳을 한자로 재해석해 기막힌 문자의 조합을 선보인 ‘신영문서법(New English Calligraphy)’, 젊은 세대가 애용하는 이모티콘 같은 표식문자를 이용해 만든 책 ‘지서(The Book from the Ground)’, 사물의 영혼 풍경을 반전의 묘미로 완성한 ‘배후의 이야기(Background Story)’, 호랑이 가죽인 줄 알았던 호피 카펫이 알고 보면 수천 개의 담배인 ‘담배 프로젝트(Tobacco Project)’ 등 쉬빙은 소소한 아이디어를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끈기 있게 발전시켜 그전에 없던 유일무이한 창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데 가히 천재적 재능을 지닌 작가다. 여기에 끈기와 집념, 그리고 어린 시절 문화혁명을 겪으며 발견한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유용성, 거기서 태동한 예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하나로 뭉친 덕분에 쉬빙의 작품에선 왠지 모를 거대한 힘이 느껴진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 후쿠오카 아시아 트리엔날레, 시드니 비엔날레 등 내로라하는 세계 주요 비엔날레에 참가한 이력, 뉴욕의 모마 미술관과 뉴 뮤지엄, 영국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과 브리티시 뮤지엄, 그리고 2014년 대만 시립 미술관에서 개최한 그의 대규모 회고전은 전 세계가 쉬빙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는지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불순분자로 찍혀 1990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18년 만인 2008년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으로 복귀해 지난해까지 작가 겸 교육자로 살아온 그를 만났다. 어떤 이는 그를 중국 미술계의 권력자라고 했지만 직접 만나본 그는 인류에 대한 본질적 물음에 충실하고,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작가일 뿐이었다.
올 여름에 있을 전시에서 ‘봉황’을 선보이기 위해 작업 중인 쉬빙을 베이징의 한 공장 지대에서 만났다.
“중국은 내부의 전통 파워가 굉장히 세고, 서양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인 시점도 매우 늦죠. 중국의 현대미술 작가가 전통적 기법과 사상을 많이 차용하는 건 이렇듯 몸에 밴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미국에 오래 있었지만 제가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고 효과를 크게 본 것 또한 제 몸에 배어 있는 중국적 특색과 배경이었습니다.”
2014년 런던 V&A 뮤지엄에 설치한 ‘도화원의 이상’
베이징이 정말 넓긴 하네요. 공항에서 2시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려왔는데, 아직도 여기가 베이징이라고요?(웃음) 현재 이 공장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봉황(Phoenix)’ 작품을 제작 중인데, 현재 얼마나 완성됐나요? 반 정도 진행했어요. 디테일 작업이 아직 많이 남아 있죠. 주최 측에서 아직 공표하지 않아 전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순 없지만 여름에 있을 전시에 ‘봉황’을 설치할 계획이에요. 예전에 선보인 오리지널 작품과 오리지널에서 맘에 들지 않던 부분을 보완하고 다듬은 업그레이드 봉황, 이렇게 두 마리를 전시할 예정입니다.
‘봉황’은 베이징의 건축 폐자재를 모아 만든 대형 설치 작품입니다. 비상해야 하는 봉황을 가장 무거운 소재를 사용해 만드셨죠. 늘 이런 식으로 본질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 선생님의 작업 방식인 것 같아요. 이 작품은 미국 세인트 존 더 디바인(Saint John the Divine) 성당에도 설치되어 관광객까지 그곳을 많이 찾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많은 곳에서 전시 요청을 하는데, 워낙 크기가 커서 작품 전시가 어려운 곳이 많아요. 웬만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죠. 이번 전시를 위해 분리해 조립할 수 있는 형태로 작업 중이에요.
이외에도 2015년에 전시가 많으시죠? 네. 전 세계에서 지금도 전시가 진행 중이에요. 그런데 6개월 전에 중앙미술학원 부원장 자리를 내려놓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순수하게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중이에요.
학교를 그만둔 계기는 뭔가요? 사람은 각자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제 재능이 작품을 만드는 쪽에 있다고 믿거든요. 동서양에서 얻은 무수한 경험을 어떻게 작품에 응용하고 창작으로 연결시킬까 고민하는 것이 저에겐 몇십 배 더 즐거운 일입니다.
모교인 중앙미술학원에 6년 동안 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느낀 점도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일단 2008년에 오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와 부원장으로 일하기로 한 결정은 옳았던 것 같아요. 당시 중국은 시스템이 부족했는데, 제가 그런 부분에서 학교에 도움을 준 건 저에게도 좋은 경험이었거든요. 제가 2008년부터 중국에 머물며 작업한 작품을 봐도 그런 점이 나타나요. 중국은 당시 워낙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바꿔 말하면 변화의 에너지와 힘이 컸다고 할 수 있죠.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한 점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뉴욕에 거의 18년 정도 계셨습니다. 뉴욕과 베이징은 아주 상이한 도시죠. 중국에 다시 적응하긴 쉬우셨나요? 2008년 중국으로 돌아와 급변하는 중국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인식을 다시 수립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제가 7년간 중국에 머물며 느낀 흐름을 종합해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은 변화의 시점에 많은 에너지가 생성되는 나라인 것 같아요. 그 에너지를 어떻게 내 작품에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계속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봉황’ 시리즈의 경우 미국에 계속 있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작품이거든요.
어떤 면에서요? 뉴욕에선 주로 동서양 문화의 충돌에 관한 작업을 했고, 뉴욕에 사는 동안 겪은 중국 문화나 동양 문화의 사용가치, 특정한 지점을 표현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중국으로 돌아온 후엔 중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에 집중하면서 작업했죠.
뉴욕에서의 삶은 선생님의 인생에서 어떤 시기였나요?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체득할 수 있었죠.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은 언제부터 키웠나요? 유치원 때부터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거든요. 그런 저를 보며 아버지가 “미술 분야에서는 중앙미술학원이 가장 좋은 학교란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유치원 때부터 “나는 꼭 중앙미술학원에 가야지” 그랬어요.
1977년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했습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갈 즈음이었죠. 문화가 피어나는 시대에 예술을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으니 각오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작가로서 뭘 해야지!’라는 생각은 그때도 없었어요. 작가로 사는 건 ‘예술의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계별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정도로 알면 알수록 어려운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어릴 적 예술이 좋아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예술에 대한 정의는 분명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거였죠. 근데 현대미술을 하면 할수록 그 경계나 영역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당시 지식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예술가로 성장한 데에는 두 분의 영향도 있었나요? 꼭 그렇진 않아요. 대부분의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죠.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다면 약간 다른 방향에서였어요. 아버지는 베이징 대학교 교수였는데,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한순간 반동분자로 지목되었어요.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어요. 연좌제로 그 자식들까지 제재를 받았거든요. 그 일을 겪는 과정에서 ‘난 나쁜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워 글씨를 아주 잘 썼어요. 당시 대자보가 많이 필요했기에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인기가 많았죠. 그런 과정을 통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그 경험이 나중에 ‘천서’와 ‘신영문서법’같이 문자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 작업으로 연결되면서 서서히 작가가 된 것 같습니다.
쉬빙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대표작품 ‘천서’
‘지서’가 완성되기 까지의 작업노트 중 일부
작품 ‘배후의 이야기’의 실제 뒷 모습
반전의 묘미가 있는 ‘배후의 이야기’
천안문 사태 이후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뉴욕으로 가셨을 테고요. 한참을 미국에서 세계적 작가로 활동하다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으로 초빙되어 중국으로 돌아오셨어요. 학교 측에서는 선생님께 어떤 기대감을 가진 건가요? 미국에 가기 전 중앙미술학원에서 10년 정도 강의를 했어요. 미국에서도 북미 지역 학교에서 세미나와 강의를 종종 했고요. 그러다 보니 동서양의 예술 교육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전까지 중앙미술학원은 전통적 아카데미 교육을 주로 해왔는데 2000년대 초반 이후 컨템퍼러리가 급부상했잖아요. 아카데미 아트와 현대미술을 교육적으로 결합해 합리적인 결과물을 낼 방법을 찾다 보니 제가 떠오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선생님이 공부하던 1970년대와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부분은 뭔가요? 변화가 많아요. 학생 수만 해도 70명에서 7000명으로 늘었죠. 물론 진지한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학교에 입학하는 목적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작가가 되려는 학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작가, 디자이너, 교육자, 큐레이터 등 폭넓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최근 선생님의 작품은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1980년대 후반 작품인 ‘천서’를 쉽게 잊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 작품을 약 25년이 지난 2012년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에서 봤을 정도니까요. 사람들이 선생님을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라고 하던데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통과 현대라는 단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둘 사이가 전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중요해요. 맥이 연결되거든요. 지금은 전통이 되었지만 당대에는 컨템퍼러리, 즉 당대의 사상이거든요.
그 둘의 연결 고리를 늘 생각하는 탓인지 선생님의 작품은 늘 웅장하고 위대한 과거를 회상하게 해요. 지난해에 런던의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에 설치한 ‘도화원의 이상’도 그렇고요.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 거주지에 관한 고찰을 담은 작품이에요. 뮤지엄 안 존 마제스키 가든에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한 장면을 연출한 거죠. 도연명은 외부와 차단된 자연에서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이상향을 묘사하면서 “배를 저어 그곳으로 가게 되면 현실로 돌아올 수 없다”고 했죠. 도연명의 이상향을 재현하기 위해 연못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작은 중국식 가옥을 올리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 이 이상향은 다시 새로운 현실이 되는구나’ 하는 거였어요. 누구나 꿈꾸지만 그것을 손에 쥔 순간 현실이 되잖아요. ‘천서’도 어떻게 보면 인류 문명,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비판하는 작품이에요. 내 작품에 나타나듯 저는 주로 이런 소통 방식을 사용해요. 다만 형식이나 형태에 제약을 두고 싶진 않기에 종이나 돌, 나무 등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죠.
‘봉황’도 금속을 주로 사용한 작품인데, 앞으로 사용해보고 싶은 특별한 재료가 있나요? 제가 재료를 토대로 작업을 구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재료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조형적 언어를 만드는 거요. 재료나 방법 등은 무엇이든 가능하죠.
중국 작가는 작품의 영감을 주로 자신의 뿌리에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작가와의 큰 차이점으로 보이는데, 이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중국은 내부의 전통 파워가 굉장히 세고, 서양의 현대미술을 받아들인 시점도 매우 늦죠. 중국의 현대미술 작가가 전통적 기법과 사상을 많이 차용하는 건 이렇듯 몸에 밴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배어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미국에 오래 있었지만 제가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고 효과를 크게 본 것 또한 제 몸에 배어 있는 중국적 특색과 배경이었습니다. 뉴욕은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잖아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무엇을 가져오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 뉴욕입니다. 자기 뿌리와 본토의 기질, 그 특수성이 작가를 대변하죠. 그 무기가 있어야 주목받을 수 있는 기회와 계기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제가 뉴욕에 있을 때 막 그곳에 온 작가들은 ‘내 것을 어떻게 하면 서양 문화에 잘 녹여볼까’ 하는 생각을 하더라고요. 녹여버리면 자기만의 것이 없어지는 건데 그걸 잘 모르더군요.
2000년대 초반 개혁·개방 이후 서양 미술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중국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현상이 일어났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서양 문화와 서양 현대미술의 유입이 중국에 잘 정착되었다고 보시나요? 짧은 시간 안에 중국 현대미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어요. 그 때문에 표면상 변화와 발전은 굉장히 두드러지지만 그 속에서 진짜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든 작가는 드뭅니다. 그래서 제가 중국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작가들이 쓰는 언어나 표현 방식을 볼 것이 아니라 그걸 통해 말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문제나 형태, 의미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지금까지 사람들은 중국이란 나라가 너무 빠르게 변화해왔기 때문에 중국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작품을 판단했는데, 그게 아니라 작가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통해 중국 현대미술과 중국 사회를 바라봐줬으면 합니다.
이제 201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뭔가 색다른 계획이 있나요? 올해 잡힌 전시가 잘되고 스튜디오에 별일이 없기만을 바라요. 그것보다 필요한 건 새로운 작업을 탐색하고 구상하는 일이겠죠. 이제껏 사람들이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내는 게 중요합니다. 다른 작가들이 해온 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건 재미없죠. 남들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시도와 도전, 그 힘든 과정을 마친 후 결과를 살피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또 있을까요?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조보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