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를 그리는 남자, 카스텔바작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의 개인전
후작 가문 출신의 거장 아티스트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을 만난 것은 남프랑스로 출장을 떠나는 당일 오전이었다. 존 레넌, 교황 바오로 2세와 레이디 가가를 포함해 다양한 유명인사를 위한 옷을 디자인한 그가 귀족 특유의 고고함 대신 유쾌함을 화두로 삼은 디자이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빠듯한 일정 탓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건 흰 셔츠와 검은 재킷, 진과 아디다스 스니커즈를 입은 캐주얼한 차림의 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새벽까지 아들의 생일 파티를 즐긴 탓에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했다. 혹시 질문을 못 알아들으면 다시 천천히 물어달라는 당부를 미안함을 대신한 웃음과 함께 전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천사 날개가 손잡이를 대신하는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건네는 그의 눈빛은 투명했다.

패션 디자이너에서 아티스트로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은 지난 2012년 한국에서 열린 회고전을 통해 1968년부터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창조한 작품을 한국 관람객에게 소개했다.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아티스트의 면모를 보여줄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을 앞두고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하다. 테디베어 50마리가 달린 코트처럼 조각품 같은 ‘옷’을 디자인한 그는 이토록 매력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제게 패션 디자인이 보온이나 기능성 등 이미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예술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에요. 단지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둘 사이의 경계는 희미합니다.” 이번 개인전에 그는 ‘내일의 그림자(Shades of Tomorrow)’라는 시적인 타이틀을 붙였다. 사전적 의미는 다소 어둡게 느껴지지만 ‘shade’라는 단어에 담긴 ‘대비’에 주목했다. “< Shades of Tomorrow >전에서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을 조명할 예정입니다. ‘shade’는 그늘이나 음영을 뜻하는 동시에 강렬한 불빛을 부드럽게 필터링하는 블라인드 혹은 선글라스를 의미하기도 하죠. 보호와 어둠 그리고 비전이라는 상반된 의미 속에서 저만의 프리즘으로 내일의 희망을 재해석해보려고요.” 셰익스피어와 스누피, 교황과 무지개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이콘을 조합해 독창적 코드를 창조한 그의 답변답다.
이번 전시에도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변화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는 작업을 즐기는 카스텔바작의 스타일을 적용할 예정이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을 투영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열흘 정도 먼저 서울을 찾는다. “정숙한 분위기에서 거장의 작품 세계를 조심스레 엿보는 웅장한 전시 대신, 테마파크에 있는 유령의 집처럼 흥미진진한 경험과 놀라운 감동이 곳곳에 숨은 ‘코스’를 제안하고 싶어요. 사실 확정된 것은 아직 없어요. 모든 계획은 정말 다행히 언제든 전혀 상상치 못한 방향으로 직행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 앤디 워홀부터 섹스피스톨스의 프로듀서 맬컴 맥라렌, 다다노리 요코까지, 그와 교류한 아티스트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에겐 이들의 화려한 지명도가 아니라 다른 시선이나 문화와의 조우가 중요할 뿐이다. 거북선을 알 정도로 세계사에 관심이 많고, 정원을 자주 찾는 비둘기 한 쌍의 소소한 다툼까지 눈여겨보는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영감을 얻는다. 미키마우스와 펠릭스를 포함해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가 가득한 독특한 세계 앞에서 유년기의 추억에 관한 질문은 너무 뻔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상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님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어요. 엄격한 기숙사에서 생활한 저는 일곱 살 무렵 친구에게 아버지가 멋진 빨간색 재규어를 타고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기숙사에 찾아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곧바로 아버지께 거짓말이 탄로날 테니 기차로 오시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어요. 약속 당일, 친구들에게 망신당할 생각에 초조해하는 제 앞에 아버지는 초록색 카브리올레 재규어와 함께 나타났어요. 저만의 상상에서 비롯한 일종의 연출 작품에 아버지께서 기꺼이 참여해주셨죠. 거짓말을 한 저를 혼내는 대신 아버지는 제가 지금도 보물처럼 아끼는 미니어처 군인을 선물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상상력을 유익한 곳에 활용해보라고.” 15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무렵, 재규어를 빌리기 위해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차를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시사철 비가 내리는 노르망디 지방의 우울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시절, 그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길가에 핀 작은 꽃에서 발견한 화려한 원색에 마음을 붙였다. 그 경험은 훗날 그가 완성한 옷에 강렬한 컬러를 불어넣었지만, 그의 컬러 팔레트에 초록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의 재규어 때문이다.
서울 전시를 위해 한창 작업 중인 작품들
천사, 예술을 통한 소통의 아이콘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은 <아트나우>와 <노블레스>의 독자를 위해 작은 선물을 남겼다. 그가 잃어버린 기억과 곁을 떠난 이들의 흔적을 추억하며 길거리에 남기는 천사 그림을 그려주었다. 나의 다음 행선지가 자신이 연사로 초청된 패션 페스티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남프랑스에서 또 만나요.” 다음 날 저녁, 페스티벌을 기념하는 칵테일파티가 열린 이국적 빌라 한편에서 천사 그림을 보고 그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거짓말처럼 그와 마주쳤고, 그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예술을 통한 ‘소통’을 원하는 그의 바람은 이렇듯 기분 좋은 우연을 놀랍게 연출한다. 6월, 서울의 거리에서 천사 그림을 목격한다면 주위를 잘 살펴볼 것을 권한다. ‘아티스트’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이 < Shades of Tomorrow >전이 열리는 블루스퀘어 NEMO 가까이에서, 당신과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글 배우리(파리 통신원) 사진 신창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