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빚다
중요한 자리에서는 와인이나 위스키에 가려지고, 희석식 소주 탓에 오해만 생긴 한국의 전통주. 예부터 집집마다 빚어온 고유의 술이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 맛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술이라고 해서 다 전통주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세법에 근거해 살펴보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거나 전통식품명인이 만든 술, 제주도개발특별법으로 지정한 술, 각 지방의 농산물을 주원료로 해 제조한 술이어야만 전통주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막걸리는 아쉽게도 전통주라 부르지 못한다. 대부분의 막걸리가 수입산 밀가루를 사용해 만들기 때문이다. 은근히 까다로운 기준임에도 전국 곳곳에는 많은 수의 전통주가 있다. 오랜 세월 조상 대대로 가문과 집안마다 고유한 비법으로 대물림해온 가양주니 그럴 수밖에. 전통주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탁주, 약주, 청주, 과실주, 소주 등으로 분류된다. 이를 좀 더 단순하게 만들면 곡물로 만든 누룩을 숙성한 뒤 깨끗하게 증류해 얻는 증류주와 누룩을 숙성하고 지속적인 발효 과정을 거친 발효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카테고리에 속한 술 가운데 오랜 시간 인정받은 프리미엄 술을 꼽았다. 최근 고급스럽게 풀어내는 파인다이닝 한식에 딱 어울리는 맛으로 정평이 난 술들이다.
증 • 류 • 주
1 문배주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함경도 지방의 민속 토속주로 이름을 날린 문배주. 왕에게만 진상하던 귀한 술은 1000년 동안 제조법이 이어져, 현재는 전통식품명인 제7호 이기춘 명인이 빚고 있다. 수수와 좁쌀, 누룩 3가지 곡물만으로 질 좋은 누룩을 만들고 발효시킨 뒤 1년 정도 숙성 기간을 거치면 문배향의 깨끗한 술이 탄생한다. 알코올 도수가 40도인 만큼 아주 작은 잔에 소량씩 마시는데, 토닉워터나 달콤한 주스와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으므로 술이 약한 사람이라면 시도해볼 것.
2 명인 안동소주 고려시대 권문세가 사이에서 유행한 안동소주는 약주로 사랑받았다. 소화불량이나 독충에 물린 데 좋다는 민간요법이 내려올 정도. 이런 안동소주는 2종류가 있는데, 막걸리 상태에서 양조하는 일반 안동소주와 백미를 정미해 천연 암반수로 막걸리를 빚어내고 다시 청주를 발효시켜 증류하는 명인 안동소주다. 박재서 명인이 빚어내는 명인 안동소주의 마지막 글자가 ‘술 주(酒)’ 자가 아닌 ‘세 번 내릴 주(酎)’자를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알코올 도수가 45도에 이르는 독한 술이지만 끝 맛이 깔끔하다.
3 진도 홍주
짙은 루비빛 홍주는 쌀과 보리로 빚은 발효주를 증류할 때 지초를 넣어 매력적인 빛깔을 띤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제조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홍주, 홍로주, 지초주라 불리며 사랑받은 술로, 현재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부터 한방에서 해독 작용으로 알려진 지초의 성분이 녹아 있어 숙취가 전혀 없는 술로 유명하다.
4 화요 53。 용문주병
여타 전통주에 비하면 신생아에 가깝지만, 음식점이나 바에 화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놀랐다. 소주라 하면 희석식 소주만 떠올리던 편견을 보기 좋게 깼으니까. 최근 새롭게 출시한 화요 53。 용문주병은 쌀과 청정 암반수로 만든 프리미엄 증류주로, 감압증류 방식을 통해 얻은 술을 옹기에 담아 장기간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200병 한정 생산하는 용문주병은 용 문양을 양각으로 새긴 광주요 백자에 술을 담아 소장하고 싶게 만든다.
5 감홍로
<별주부전>의 “토끼야,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단다”라는 구절의 주인공.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지방의 특산 명주로 알려져 있으며 육당 최남선이 전주 이강주, 태안 죽력고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명주로 꼽은 술이다. 이기숙 명인이 빚는 감홍로는 조, 쌀, 누룩으로 만든 밑술을 발효시켜 두 번 더 증류한다. 이 증류주를 숙성시켜 내린 것에 용안육, 계피, 감초 등의 한약재를 넣어 함께 우려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붉은빛을 띠는데, 여러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부드럽게 넘어간다.
발 • 효 • 주
1 한산 소곡주 1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곡주. 백제가 멸망한 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유민들이 빚어 마신 술이라고 전해지는데,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시험을 잊게 만든다 해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한산 건지산 자락의 맑은 지하수로 우희열 명인이 빚는 한산 소곡주는 겨울에 즐기기 좋은 술이다. 추수가 끝나면 통밀을 빻아 만든 누룩으로 누룩즙을 만들고, 멥쌀을 빻아 백설기를 만든 것을 한데 섞어 발효해 밑술을 만든다. 그다음 찹쌀을 물에 불려 고두밥을 쪄내고 들국화, 메주콩, 생강 등을 넣어 만든 덧술을 저온에서 100일 동안 숙성시키면 겨울철에 비로소 완성된다.
2 경주 교동법주
조선 숙종 때 궁중 음식을 관장하던 사옹원에서 참봉을 지낸 최국선이 낙향해 사가에서 처음 빚은 술이다. 경주 최 부잣집의 가양주로 300여 년 역사를 자랑한다. 주원료는 찹쌀과 물, 밀로 만든 누룩인데 물은 집 안의 우물물을 끓여 사용한다. 찹쌀로 죽을 쑤고 여기에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 밑술에 찹쌀 고두밥과 물을 혼합해 본 술을 담그고 50일 동안 독을 바꿔가며 2차 발효 과정을 거친다. 이를 100일 이상 두면 효소가 살아 있는 듯한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알코올 도수 15도로, 순하면서도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많은 애주가를 사로잡은 술이다.
3 구기주
하동 정씨 종갓집으로 시집가서 10대째 300여 년의 전통주 맥을 잇고 있는 임영순 명인의 구기주. 국내 구기자의 60%를 생산하는 청양에서 구기자의 달콤함이 살아 있는 술을 빚는다. 통밀을 씻어 빻은 뒤 누룩을 만들어 60일간 띄우고, 멥쌀과 찹쌀로 고두밥을 쪄 누룩과 섞은 뒤에 독에 넣는다. 여기에 깨끗이 씻어 말린 구기자 열매와 잎, 뿌리, 각종 한약재와 약초를 삶아 넣어 20일간 발효시키고 숙성하면 구기주가 완성된다. 다른 전통주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낮은 16도로, 반주로 즐기기 좋다.
4 면천 두견주
<동국세시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개국공신 복지겸이 면천에 낙향하던 중 병에 걸리는데, 그 병을 치료한 것이 진달래꽃을 빚은 술 덕이라고 한다. 진달래꽃을 의미하는 두견화는 봄이 되면 면천 지역에 가득 피는데, 이 진달래꽃으로 맛 좋은 술을 만든다. 활짝 핀 진달래꽃을 채취해 꽃술을 떼고 말려두었다가 술을 빚을 때 혼합해 술에 은은한 진달래 향이 감돈다. 달콤한 맛이므로 온더록으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5 호산춘
술 이름에 ‘춘’ 자가 들어가면 왕실과 사대부에서 특별히 빚던 고급 술이라는 의미. 200여 년 전 여유 있는 생활을 하던 장수 황씨들이 향기롭고 맛있는 술을 빚기 시작했다. 시를 즐기는 풍류객 황의민이 자신의 집에서 빚은 술에 본인의 시호인 호산, 술에 취했을 때 흥취를 느끼게 하는 춘색을 상징하는 춘을 붙여 ‘호산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희 정승이 즐겨 마시던 술로, 찹쌀과 멥쌀로 빚은 술에 솔잎과 생약재를 넣어 은은하면서 기분 좋은 솔 향이 입안에 퍼진다.
에디터 홍유리 (yurih@noblesse.com)
사진 박지홍 스타일링 이지현 장소 협조 드슈 테이스트 도움말 류인수 (한국가양주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