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의 미술을 읽는다
한국 동시대 미술의 몇 가지 양상을 점검하기 위해 주요 작가의 작품을 키워드로 정리했다. 앞선 세대가 성취한 현대미술의 문법을 이리저리 비틀고 쥐어짜면서 명줄을 이어오는 동시대 미술이 들려주는 이야기.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정답은 없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만큼 많고, 깊은 우물처럼 그 속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동시대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왕도는 없을까? 동시대 미술 개론서는 몇 가지 ‘테마’나 ‘키워드’로 미술 작품을 보자고 제안한다. 대표적 사례로 2006년부터 영국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와 MIT 출판사가 공동 발행하는 ‘Documents of Contemporary Art’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제목 그대로 동시대 미술의 복잡한 양상을 개별 키워드로 ‘문서화’해놓은 책이다. 지금까지 발행한 책의 제목에는 시간, 소리, 기억, 참여, 회화, 오브젝트, 섹슈얼리티, 자연, 우연, 추상, 네트워크, 댄스, 일상, 디자인과 미술, 전시, 실패, 숭고, 아카이브, 시스템, 예술가의 농담, 유토피아, 전유, 시네마틱, 교육, 고딕, 마켓, 아름다움, 윤리, 색채, 폐허, 다큐멘터리, 상황, 스튜디오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책에 담긴 내용을 세세하게 알지 못해도 왠지 동시대 미술의 비밀스러운 일면을 훔쳐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충격과 공포’, ‘전위와 실험’, ‘기발함과 재치’ 등의 뻔한 수사로 그들의 작품을 애써 포장하기보다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태도, 세상을 보는 관점, 주제를 구현하는 형식, 작품의 미술사적 맥락, 그 안의 내밀한 이야기, 제작 과정 등을 곰곰이 살피는 일로 동시대 미술 감상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구동희, 무제, 혼합 재료, 가변 설치, 2011

남화연, Operational Play 2009 Utrecht, 비디오, 20분, 2009

정희승, 무제,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10×82.5cm, 2013 /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김홍석, 기울고 과장된 구성에 대한 연구, 캐스팅 레진, 307×105×90cm, 2010
신화의 탄생
세상의 모든 작가는 이야기꾼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세상에 흩어진 이야기를 그러모아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조직해낸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부터 역사의 향방을 바꾼 거대 담론까지, 그 폭은 다양하며 서로 다른 사건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조해준은 2002년부터 아버지 조동환과 공동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작가는 아버지가 구술로 전한 시시콜콜한 개인사와 조금 어설퍼 보이는 드로잉을 동시대 미술의 문법으로 제시한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올해의 작가상>전에는 화가 지망생이던 아버지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응모했다 낙선한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글귀를 남겼다. “네가 있어 아버지는 노년에나마 빛을 보게 되어 기쁘다.” 정희승의 사진집 <부적절한 은유들>에 등장하는 오래된 집은 남편이 20년 동안 산 집이자, 작가가 사용하던 스튜디오다. 그녀는 남편과 시댁 식구의 역사가 녹아 있는 공간을 카메라를 들고 구석구석 면밀하게 관찰했다. 우리는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작가의 안내에 따라 욕실, 문과 방 사이, 나무 계단, 전등 등의 장소에 숨은 이야기를 찾는다. 흥미롭게도 그는 사진으로 포착한 대상과 스스로도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식물원에서 촬영한 전혀 다른 맥락의 사진을 병치해놓았다. 반면 이완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거대한 담론을 추적한다. 2013년부터 시작한 ‘메이드 인’ 연작을 통해 ‘아시아’를 테마로 노동 집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대만에서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고, 캄보디아에서 벼농사를 짓고, 미얀마에서 금을 채취하고, 태국에서 실크 제조에 참여해 슈트를 한 벌 제작했다. 작가 스스로 1인 생산자를 자처하며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서구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성찰한다. 이렇게 작가들은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에 꽂히면 그 중심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그러나 작가가 사설탐정처럼 사실관계를 밝히는 일에만 머물렀다면, 그들의 작업을 ‘미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작가가 만든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안에 자신만의 기이한 판타지를 삽입하기 때문이다.
구동희는 미술관 옆 놀이공원, 실내 낚시 게임장, 동춘서커스, 공동묘지, 일본에 있는 금각사, 태풍 매미, 천연기념물 사이트의 지질과 광물 데이터 등 지극히 평범한 요소를 작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작품의 핵심은 상황이나 이미지를 실재하는 제3의 무엇으로 보고 싶다는 작가의 판타지다. 남화연 역시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한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을 돌아보면서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기억’을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재생’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최근 그녀가 꽂힌 대상은 한국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 최승희가 발표한 작품의 자료 사진 몇 장이나 짧은 평문을 참고해 가상의 안무, 포스터, 오디오 파일 등을 제작했다. 그녀에게 불완전한 자료를 본래 상태로 복구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남화연만의 최승희’를 무대에 시뮬레이션하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역사의 기록과 다르거나 실패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미술 외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미술 자체의 이야기, 즉 ‘미술사’를 작품 제작의 동력으로 삼는 작가도 많다. 한마디로 미술에 관한 미술이다. 김홍석은 제프 쿤스, 로버트 인디애나, 소피 칼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유하거나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해 가짜 추상회화를 제작하면서 겉만 번드르르한 동시대 미술의 엉성한 시스템을 공격한다. 그에게 미술은 읽고 쓰고 분석하는 텍스트와 같다. 박미나는 오직 회화의 역사에 골몰하며 그 빈틈을 후벼 판다. 색, 형태, 이미지, 재현, 물감, 캔버스 등 회화라는 가계도를 이루는 식구들을 소환해 철저히 분석한다. 그림문자인 딩벳과 추상미술을 결합한 ‘딩벳 회화’는 유사 과학/화학자와 같은 연구를 거쳐 탄생했다. 박미나와 마찬가지로 홍승혜의 다양한 장르에 걸친 작품도 결국 20세기에 탄생한 추상미술을 향한다. 픽셀로 구축한 ‘유기적 기하학’ 연작은 그녀가 추상미술의 위대한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도전장이다. 조각의 영역에서 이야기와 이야기 생산자의 관계는 더욱 미묘해진다. 무언가를 빚어 만들었다는 태초의 신화와 조각은 동일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가. 또한 대단히 남성적인 메타포를 함축한다. 이형구의 뼈 조각이나 김인배의 인체 조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희고 검은 괴물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현대판 프랑켄슈타인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스스로 사랑에 빠지는 피그말리온인가?
한경우, I MIND, 나무, 페인트, 400×600×380cm, 2014

Sasa[44], 위대한 탄생, 혼합 재료, 387×1162cm, 2007
장르의 게임
‘장인’처럼 특정 장르에 매진하는 작가는 여전히 많지만, 같은 장르라 해도 어떤 재료나 기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수많은 동시대 작가 중 특정 장르를 고집하는 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들은 작품의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하겠다는 혹은 작품의 민낯을 감추며 관람객의 마음을 교란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영상, 설치, 회화, 드로잉, 사진, 디자인, 조각 등 태생이 다른 장르를 두루 포섭한다. 폐허에서 나고 자란 생물체 같은 강서경의 비기념비적 오브제와 휘감긴 선이 패턴으로 반복해 등장하는 추상회화는 작품의 내적 질서를 변주해 도출한 이란성 쌍둥이와 다름없다. 작가는 아예 작품의 방법론으로 페인트와 인스톨레이션을 합성한 조어 ‘페인톨레이션(paintallation)’을 제시했다. 버려진 갖가지 사물을 찾아 조합한 그녀의 작품에는 천을 ‘감고’, 오브제를 ‘쌓는’ 퍼포먼스적 요소가 내재해 있다. 양혜규의 블라인드 작업도 연극적 무대이자 미술관 속 또 다른 건축물이며, 오르락내리락 춤을 추는 무용수다. 김민애가 전시장에 만든 낯선 ‘설치-조각’은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관람객의 무딘 감각을 자극한다. 미디어 아트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강이연의 작품에는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허공을 배회하는 가상의 생명체가 무용수처럼 등장한다. 그의 작품은 기술의 정교함과 회화적 감수성이 결합한 ‘따뜻한 미디어 아트’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의 실시간 퍼포밍 효과는 한경우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대학에서 조소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 영상 뉴미디어를 공부했다. 카메라로 스크린에 실시간 투사되는 특정 화면(성조기나 몬드리안의 회화, TV 조정 시간 화면 등)과 작가가 철저하게 계획해 완성한 조각 설치이자 건축적 무대와 같은 실제 현장을 번갈아 보면, ‘인간 시지각이 참 헛똑똑이와 같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개인 인공위성 프로젝트’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송호준이 인공위성을 우주로 띄우기 위해 실행한 전 과정을 단일한 장르로 규정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요리해 나눠주는 구민자의 퍼포먼스에서 완성한 음식을 어떤 장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장르의 경계가 무너지는 동시대 미술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대립각을 세운 분야는 디자인과 미술이다. 산업 디자이너 출신인 잭슨 홍은 활동 초기에 사람의 편의를 위해 제작하는 공산품의 인간 친화적 메커니즘을 뒤집어 사물의 편에서 이상 기능을 수행하는 변종 오브제를 발표했다. 독특한 기능을 수행할 것처럼 보이는 이은우의 오브제 작품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세련된 기하학적 장식물이다. 반면 장민승의 테이블 ‘T1’과 ‘T2’는 좀 더 명확한 진로를 택해 잘 디자인한 가구로 큰 인기를 누렸다.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그는 카메라를 들고 세상의 폐허를 기록하다가, 무언가를 손으로 정성껏 만드는 행위의 즐거움을 가구 디자인에서 찾은 것이다. 비디오 아트와 일반 영화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다. 극장이냐 갤러리냐, 단순히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 작가들은 극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박찬경, 정윤석, 박경철, 차재민 등은 기존 영화의 익숙한 컨벤션과는 색다른 시도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반대로 정연두의 비디오 아트는 영화 로케이션 촬영과 동일한 프로세스를 거쳐 제작했다. 이제 작가의 작품은 장르를 둘러싼 게임에서 어떤 승부수를 띄우느냐에 따라 결판날지도 모른다.
장민승, 검은 나무여, 영상, 25분, 2014

이원우, Will never do this again, 알루미늄에 페인트, 60×80×2.8cm, 2013 /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박미나, 5’PIU;UVYQ,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58×158cm, 2010
협업의 태도
우리가 생각하는 작가 모델은 아직도 낭만주의적 세계에 살고 있다. 고뇌에 빠진 병약하고 신경질적이며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하는 예술가. 그러나 오늘날 작가는 다른 영역보다 활발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과 프로젝트는 이메일 속에서, 다른 작가와의 수다 속에서, 화상 통화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 속에서 완성된다. 신과 같은 단독자로서의 예술가상은 점차 화석화된 유형으로 변해가고 있다. 보통 협업으로 번역하는 ‘컬래버레이션’은 그 자체로 이슈몰이를 하기 어려울 만큼 흔해졌다.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특정 분야의 전문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빈번해진 점도 협업 범람의 주요인이다. 또한 작가의 스튜디오는 미술뿐 아니라 과학·문학·음악·건축 등의 전문가가 함께 모여 소통하는 연구실이자,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스태프를 각 파트별로 기계 부품처럼 조직화한 공장이 됐다. 전자의 대표적 사례로 올라푸르 엘리아손을, 후자의 경우는 제프 쿤스나 무라카미 다카시, 애니시 커푸어 등을 들 수 있다.
편집증적으로 사물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가 Sasa[44]는 단순한 ‘협업’ 대신 김소라, 윤정미, 제롬 벨, 잭슨 홍 등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작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피처링’이나 ‘샘플링’ 같은 음악의 창작 기법을 미술에 끌어오기도 했다. 또한 작가들은 마음 맞는 동료들과 느슨한 창작 공동체인 아티스트 컬렉티브를 꾸려 개인 작업과는 다른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 옥인컬렉티브(김화용·이정민·진시우), 파트타임스위트 (이미연·이병재·박재영), 리슨투더시티(박은선·김준호·정영훈·권아주), 믹스라이스(양철모·조지은) 등은 한국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이슈에 반응하는 현실 참여적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보이는 것이 중요한 미술과 들리는 것이 중요한 음악의 랑데부도 계속되고 있다. 김소라는 권병준, 사몬 다카하시(Samon Takahashi) 등의 음악가와 꾸준히 협업하고 있다. 2012년 아트선재선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벽에 걸린 스피커만이 관람객을 맞았다. 비디오, 드로잉, 설치, 퍼포먼스, 건축적 요소 등을 전시장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김성환도 음악가 dogr(데이비드 마이클 디그레고리오)과 작업의 동반자로 오랫동안 함께했다. dogr은 김성환의 퍼포먼스나 영상 작품에 주인공으로도 곧잘 등장한다.
클라이언트가 명확한 디자인에서 협업은 필수다. 의뢰인을 디자인 작업의 1차 협업자로 볼 수 있다. 김영나는 디자인업계의 소위 ‘갑을 관계’나 디자인을 둘러싼 제작 상황 자체를 역으로 활용한다. 그가 2004년부터 다양한 주제와 인쇄 기법을 실험하는 독립 잡지 <우물우물>의 제10호 주제가 ‘협업’이었을 정도.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업한 ‘더 쇼-룸’은 미술관의 숍에 작품으로 전시되는 동시에 상품으로서 9만 원대에 판매됐다. 그 안에는 그녀가 디자인한 알록달록한 종이컵, 엽서, 연필, 노트 등 일상용품이 세트로 들어 있었다. 또한 작가는 동료 디자이너 카를 나브로(Karl Nawrot)와 함께 ‘테이블 유니언(Table Union)’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디자인 방법론을 개진하고 있다.
메시지 vs 메시지
믿기 어렵겠지만, 때로 어떤 작품에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 차라리 그것을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무의미의 메시지 말이다. 우리는 미술 작품이 어떤 주제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여기의 미술과 지금 여기의 우리가 점차 소원해지는 이유 중 하나 아닐까? 이원우는 자신의 작품에서 제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다른 작가도 마찬가지일 터. ‘10초면 충분하다(10 Seconds Long Enough)’,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Hope Something Happens, Hope Nothing Happens)’, ‘언제나 진실 뒤에는 무엇이 있다(Always Something behind the Truth)’ 같은 ‘메시지’가 전하는 애매모호한 메시지, 그 아이러니야말로 우리가 동시대 미술을 감상하는 작은 즐거움 아닌가.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