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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메이드 인 코리아’

ARTNOW

함경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포스트-백남준’으로 국내뿐 아니라 국제 무대에서 맹활약해왔다. 올해 6월 함경아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린다. 6년 만에 열리는 대규모 전시. 그녀는 남북 문제를 전면에 드러낸 ‘자수 프로젝트’로 작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미술의 구원은 미술 자체에 있지 않아요.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드는 일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Abstract Weave / Morris Louis While 1960, 자수, 나무 프레임, 289×205cm, 2014. 인터넷에서 ‘중간자’, ‘근심’, ‘검열’ 등의 단어를 검색해 찾은 기사를 자수로 새겼다. / Courtesy of artist and Kukje Gallery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작가로 산다는 맥락
1990년 작가 박이소는 ‘박모’라는 이름으로 국내 미술 잡지에 한 편의 글을 발표했다. 제목은 ‘서울-뉴욕 미술 교류, 무엇이 문제인가’. 그는 이 글에서 뉴욕 미술계의 구조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서구 백인 남성 중심으로 움직이는 뉴욕에서 재미 작가가 겪는 3중의 소외 현상을 다이어그램으로 제시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그곳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처한 상황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글로벌 아트 신에서 유색인종 작가가 소위 ‘A급’으로 분류돼 리그의 중심에서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란 여전히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만큼 어렵다. 백인 남성 작가라고 쉬운 것도 아니다. 작가로서 성공을 ‘로또 당첨’에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은 도시 전설에나 등장한다. 미국 미술계조차 화려한 스타 탄생 신화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로 매슈 바니를 꼽는다. 그는 1996년에 휴고 보스상의 첫 수상자로 낙점되더니, 2002년에는 36세의 나이에 구겐하임 미술관 전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글로벌리즘의 여파로 나타난 전 세계의 평준화 현상은 미술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제 각 국가의 주요 도시마다 동시대 미술을 위한 시스템이 그럴싸하게 작동 중이다. 국제적 주목도, 작가층의 다양성, 해당 기관별 힘의 균형이나 운영 제도의 투명성, 미술 인력 풀 등에서는 여전히 천양지차지만, 어느 도시에 가든 다음과 같은 요소가 상호 긴밀한 관계에서 운영된다. 미술관-컬렉터-갤러리의 삼각 편대, 각 기관의 장이나 큐레이터와 끈끈한 동맹을 유지하는 유명 작가, 그들과는 반대의 지점에서 대안 공간을 운영하는 독립 큐레이터와 젊은 작가, 그들의 창작 활동을 돕는 정부 산하 기관의 기금, 작가를 양성하는 미술학교,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같은 국제전 등. 한국도 1990년대 초반부터 서구의 동시대 미술을 좇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개최하며 촉발된 미술계의 글로벌화는 이후 IMF에 따른 유학파 작가들의 귀국, 대안 공간의 설립, 레지던시 프로그램, 미술상 제정, 전속 작가 제도 도입 등으로 두서 없이 이어졌다. 오늘날 동시대 작가의 삶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동소이하다. 작가는 전 세계의 레지던시를 전전하며 소위 ‘글로벌 노매드’로 떠돌이 삶을 산다. 운이 좋아 그곳에서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는 미술인을 만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면, 다시 그 서클의 일원으로 떠돌이 삶의 제2막을 시작하는 것이다. 작가의 삶을 따라 작품도 주요 국제전을 순회하기 바쁘다. 비슷한 커리어를 쌓는 그들의 미래를 여는 열쇠는 역시 작품. 그러나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시대 작가 중에는 국제 무대 진출을 위한 통과의례로 해당 지역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은연중에 강요받는 이도 있다. 그들은 타의 반 자의 반 서구 미술계의 중심으로 편입하기 위해 지역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아키비스트 등의 역할을 떠안는다. 자신의 인종, 역사와 사회적·정치적 현실, 문화 등을 미술 형식으로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함경아의 커리어는 한국 작가가 국내외 아트 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국제 무대에 확고히 자리 잡는지에 대한 지표로 삼기 좋다. 서울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그녀는 그림 그리는 일보다 오브제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프랫 인스티튜트와 SVA, 파슨스 스쿨에서 공부했다. 운이 좋아 유명 평론가 도널드 쿠스핏(Donald Kuspit)에게 작품을 보여줄 기회를 얻었고, 학교에 비교적 쉽게 입학할 수 있었다. 유학을 마치고 1998년에 참여한 <도시와 영상-의식주>전은 이영철이 기획한 것으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세대 변환을 알린 기념비적 전시로 회자된다. 그녀를 포함해 김소라, 이수경, 김상길, 이동기, 정수진 등 현재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대거 포진해 있었다. 함경아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 미술계에 불어닥친 대안 공간 열풍의 선두주자인 루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Room with a View’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에서 그녀는 성냥개비를 이어 붙여 만든 그리드 판들을 공간에 설치했다. “1990년대 말에는 매달 신작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어요. 젊어서 그런지 힘이 좋았죠. 그런데 신날 만한 별다른 피드백이 없었어요. 미술 잡지에 리뷰가 실리는 게 고작이었죠.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고요. 아, 이건 그냥 소비다! 그래서 그때부터 전시 참여를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함경아가 잘난 척한다는 소리도 나돌았죠.(웃음)” 밀려오는 전시 제안을 뿌리치는 건 신진 작가 입장에선 곤란한 일 아닌가. 함경아는 당시 20만 원 상당의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1년간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카메라를 조작하는 방법도 몰라 촬영한 화면은 온통 어둡고 상태가 들쑥날쑥했지만, 작가의 첫 비디오 작품 ‘체이싱 옐로(Chasing Yellow)’가 탄생했다. 한국엔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다는 이 작품은 국제 무대에서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제1회 티라나 비엔날레, 제1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 출품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작가는 아시아 각국에서 노란색 옷을 입고 있거나 노란색 물건을 지닌 사람을 발견하면 그들을 쫓아가 이야기를 듣고 말하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수많은 사람을 따라다닌 작가는 한국에 와서 아킬레스건에 일곱 번이나 주사를 맞았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고. 이 작품을 주목한 인물이 전설적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이다.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한 그가 기획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 <도쿠멘타 5>, <아페르토> 등은 동시대 미술의 방향을 바꾼 역사적 전시로 꼽힌다. 티라나 비엔날레에서 함경아의 작품을 본 그는 2002년 스위스 엑스포의 특별전 < Money and Value/The Last Taboo >에 그녀를 초대했다. 이후 함경아는 김선정과 맺은 인연으로 아트선재센터에서,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인 김홍희와의 인연으로 쌈지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미국·일본·호주·독일·영국·중국·스페인· 벨기에·싱가포르 등 수많은 국제전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작가로 활동한 대략적 발자취다.

Needling Whisper, Needle Country / SMS Series in Camoflage / Money Never Sleeps 01, 자수, 나무 프레임, 188×185cm, 2012-2013 / Courtesy of artist and Kukje Gallery

Needling Whisper, Needle Country / Diamond is forever until terrorism is forever,
자수, 나무 프레임, 150×150cm, 북한 자수 노동자 4명이 1600 시간 동안 제작, 2009-2010 / Courtesy of artist and Kukje Gallery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자, 그렇다면 ‘포스트-백남준’으로 성장한 그녀가 새롭게 선보일 작품은 무엇일까? 2014년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교감>전에서는 함경아의 최근작인 ‘Abstract Weave/Morris Louis’ 연작을 선보였다. 리크릿 티라바니야, 리엄 길릭, 에르네스토 네토, 아이웨이웨이 등 글로벌 아트 신에서 지명도 높은 작가가 대거 참여했다. 그녀의 작품은 얼핏 보면 표절이 아닌가 싶을 만큼 모리스 루이스의 추상회화 작품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나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것은 회화가 아니라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는 역시 자수로 글씨가 잔뜩 쓰여 있다. 물감처럼 흘러내리며 엉킨 실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쾌한 인상을 풍긴다. 그녀의 자수 프로젝트는 서구 미술계 입장에선 꽤 먹음직스러워 보일지 모른다. 함경아도 앞서 언급한 작가들, 그러니까 지역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이슈를 동시대 미술 형식으로 서구 미술계에 포장해 선보이는 작가로 비칠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2012년 부산비엔날레에 함께 참여한 호주 작가 로이스 응(Royce Ug)은 함경아의 작품이 “한국의 현대 역사와 정치,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생성하는 작업을 위한 생산적 틀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한 해외 미술 관계자에게 자신의 작품이 남북 문제 같은 지역의 정치적 이슈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어봤다는 작가의 말에서 본인도 이런 전후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유인즉슨,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수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북한에 사는 노동자들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같은 공식적 사업체가 아니다. 작가는 중국의 브로커를 통해 두만강이나 압록강 등 탈북 루트로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쳤다. 작품의 시안을 북한 노동자에게 건네고 그것을 토대로 완성한 작품을 다시 한국에서 받는, 매우 위험하고 지루한 일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남북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일까? 혹은 북한 노동자의 처참한 인권 실상을 고발하거나, 그런 현실과 달리 아름답게 수놓은 자수의 시각적 표현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작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맥락을 살피자고 말한다. 작품의 세밀한 실은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작가도 실제로 본 적 없는 북한 노동자의 실존을 기록한 증거품인 셈이다. 그녀가 자수 연작을 시작한 계기는 2008년 집 앞에 떨어진 삐라를 주워 본 것이다. 김정일 주석의 얼굴과 빨간 꽃을 새긴 삐라를 보면서 불현듯 궁금해졌다. ‘나도 누군가와 소통하는 삐라가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인 내가 예술적 방법으로 그들에게 삐라를 보낼 수 있을까?’ 작가다운 엉뚱한 상상이다. 함경아는 디지털 세상의 정반대 지점에서 그 방법을 떠올렸다. 손의 가치를 입증하는 노동 집약적 자수를 매개체로 택한 것. 자신이 북한에 보낸 텍스트와 이미지를 느린 방법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하면서 북한 노동자들이 그 의미를 곱씹을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자수에 새길 이미지는 가장 순수하다고 여겼지만, 실은 ‘시적 무기’라 불릴 만큼 미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 추상표현주의 작품 중에서 골랐다. “이 작업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아, 할 말이 많은 작가는 추상을 해야 한다! 북한은 추상이 곧 반역인 세계잖아요. 추상화의 알레고리를 실험하는 작업을 떠올렸어요.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죠. 자유를 억압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상상을 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의 눈에 모리스 루이스의 작품은 한국의 특수한 분단 상황을 투영하는 이미지로 적당해 보였다. 양쪽 화면의 끝부터 흘러내리는 물감의 흔적에서 DMZ를 연상한 것. 그러나 그 아이디어가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 결국 작가는 몸살을 앓았다. 작품이 완성됐다고 해도 돌려받지 못했다. 겨우 완성한 작품 중에는 검열 때문에 노동자가 원본의 모양을 변경하거나 훼손한 것도 있고, 아예 작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그녀의 개인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열릴 것이라는 소문만 몇 년째 무성한 이유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그녀가 꺼낸 작품의 양은 상당했다. 올해는 국제갤러리 외에도 베를린에 있는 카를리어 게바우어(Carlier Gebauer)에서 개인전이 열린다. 그녀의 스튜디오 바닥에 프레임 없이 포대기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은 캔버스 천을 보자 기분이 묘했다. 정말 북한 사람들이 이걸 만들었단 말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이 천이 작가의 손에 쥐여지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거쳤을지 몇몇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졌다. 그녀를 피 말리게 한 말 못할 사연이 그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이제 그녀의 작품은 모리스 루이스를 거쳐 다양한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다. 모두 그녀가 북한에 보내는 삐라인 셈인데, 작가는 이 작업이 남녀의 러브 스토리 같다며 웃음 지었다. ‘방가방가’, ‘Sorry’, ‘난 어쩌면 그대와의 만남이 잘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죠’ 등의 텍스트부터 형형색색의 샹들리에, 보석, 해골, 비치볼 등이 화려한 색채로 등장한다. ‘전 세계의 유일한 분단 국가’라는 타이틀, 국제적 논란과 희화화의 대상으로 연일 뉴스에 오르는 김정은 등 남북 문제는 ‘한국’ 작가라면 충분히 욕심 낼 만한 주제다. 일단 언론의 주목도가 높아진다. 동시대 미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작품의 대사회적 명분도 생길 터. 함경아의 자수 프로젝트는 남한과 북한이 합작한 진정한 의미의 ‘메이드 인 코리아’다. 작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는 미술로 이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까 늘 고민해요. 이 작품들은 통일이 되면 끝이죠. 더는 이런 작업이 필요 없게 되는 거예요.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에 들어가는 게 맞죠.”

Chasing Yellow, 8채널 비디오 설치, 2001. 제1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전경

Such Dinner Time, Columbus Sword, Suicide Series, Trophies, 청화백자에 드로잉, 나무 테이블, 2009. 청화백자에 전통 산수화와 아돌프 히틀러의 회화를 그려 넣었다. / Courtesy of artist and Kukje Gallery

위험한 청개구리 짓
이번 국제갤러리의 개인전 이후 그녀를 바라보는 한국 미술계의 시선은 어떻게 달라질까. 인터뷰 중에 함경아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삶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좋아해요. 관심 있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리서치를 합니다. 한국에 사는 중국인의 삶이 궁금해서 연희동에 있는 중국집을 싹 다니기도 했어요.” 그 말대로 1990년대 말부터 그녀가 한국 미술계에 발표한 작품은 모두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무모한 짓을 감행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한 자기 작품의 변별점을 “키득키득, 위험한 장난, 나이브한 청개구리 짓”이라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 속 아이러니, 블랙코미디 화법, 끝을 보겠다는 무모함과 엄청난 추진력 등을 고유의 언어로 풀이한 것 같았다. 핑크색 옷을 입고 공공장소에서 두 인물이 사적인 시간을 보내도록 작가가 제정한 공휴일 프로젝트 ‘Romance Day’, 한때 한국에서 고가에 팔린 열대 과일 바나나를 둘러싼 거대 자본과 한 개인의 관계를 추적한 ‘허니 바나나(Honey Banana)’, 전직 대통령이 살던 빌라의 리모델링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얻은 자재로 만든 계단 형상의 ‘오데사의 계단(Odessa Stairs)’, 인류가 고안한 무기 형태와 전쟁 상황을 청화백자로 표현한 ‘청화백자 프로젝트’, 1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훔쳐온 각종 오브제를 박물관의 유리 진열장처럼 나열한 ‘뮤지엄 디스플레이(Museum Display)’ 등에 그러한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 “한국 관람객은 대부분 내 작품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해외에 나가면 심각한 주제를 이토록 웃기게 풀어내느냐고 말하죠. ‘뮤지엄 디스플레이’ 작업을 두고는 더 좋고 더 비싼 것을 훔치라고 말하더군요. 네가 감옥에 들어간다면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요.(웃음)” 세상의 틈을 찾아 꿰뚫는 함경아의 집요함이 다음 단계에서 어떤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