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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세 천재의 이야기

ARTNOW

사람의 잠재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이 지닌 모든 능력을 계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살펴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과학의 예술가라 불릴 만큼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레오나르도, 고독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미술의 자연스러움에 특유의 우아함을 더한 라파엘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세 천재의 색다른 성격과 기호, 재미난 일화를 살펴본다.

바티칸 시티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미켈란젤로는 15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의 건축 설계에 매달렸다.

팔방미인형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
미술뿐 아니라 음악, 건축, 수학, 과학, 해부학, 지질학, 지도 등 다방면에 능통한 레오나르도는 당시에도 보통 사람의 재능을 뛰어넘는 천재로 여겼다. 최초의 미술사 서적 <예술가의 인생>(1550년)을 저술한 바사리(Vasari, 1511~1574년)에 따르면, 레오나르도는 잘생긴 외모에 훌륭한 인품까지 갖추었다고. 그의 예술 활동은 14세 때인 1466년 피렌체의 베로키오(Verrocchio, 1435~1488년) 공방에 들어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며 회화 작품을 도맡은 것으로 시작된다(베로키오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회화의 상당수가 어린 레오나르도의 손을 거친 것이다). 베로키오는 르네상스 조각의 혁신을 이루었다 평가받는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년)의 제자이자, 그 뒤를 이어 피렌체를 주름잡은 메디치 가문의 신뢰를 얻은 인물. 레오나르도는 26세인 1478년 피렌체를 떠나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작업했으며, 이후 자신의 공방을 차리는 대신 밀라노, 로마, 파리에 이르기까지 곳곳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살다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데 레오나르도는 그 유명세에 비해 남긴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미술 외에 다른 분야에서도 활동한 탓이겠지만, 실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그리는 특성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이유가 더 크다. 그의 대표작 ‘모나리자’(1503년)도 미완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51세인 1503년 주문받아 약 3년간 그리다, 프랑스에 가져가 1517년 다시 손을 댔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모나리자의 눈썹이 없는 이유는 미완성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2007년 프랑스에서 발표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모나리자의 눈썹은 애초 세필로 그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워진 것이라고. 그의 ‘최후의 만찬’(1498년) 역시 소멸된 부분이 많다. 당대에 유행한 프레스코화는 회벽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빠른 속도로 그려야 했는데, 천천히 생각하고 그리며 수정하길 좋아한 레오나르도의 성격에 맞지 않아 비교적 쉽게 지워지는 식물성 재료를 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작품 ‘암굴의 성모’(1483년)는 독특하게 완성품이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각각 1점씩 소장돼 있다. 다만 왜 같은 작품을 2점이나 그렸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이렇게 수수께끼같이 모든 걸 비밀스럽게 남겨두는 건 작품에 얽힌 설화만이 아니라 레오나르도 작품의 조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한편 모나리자의 눈꼬리와 입꼬리, ‘암굴의 성모’ 뒤편의 어두운 배경 등 그의 작품은 종종 윤곽선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아 미소의 의미, 인물과 배경의 구분 등을 흩트려놓곤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작품을 좀 더 오래 응시하게 하고, 인물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는 것. 이런 기법을 ‘연기와 같은’이란 뜻의 ‘스푸마토(sfumato)’라고 하는데, 멀리 있는 물체의 윤곽을 흐리고 채도를 낮춰 공간감을 표현하는 ‘공기원근법(aerial perspective)’과 함께 레오나르도의 대표적 표현 양식으로 손꼽힌다. 레오나르도 이전의 작가들이 주로 사용한 ‘선원근법’은 이미 한 세기 전 건축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년)에 의해 발전한 원리로, 통상 바닥의 타일이나 기둥의 선을 사선으로 그려 점점 멀어지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스타일이다. 레오나르도의 공기원근법은 선적 표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도 멀어지는 공간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대 미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작품의 구성에서만큼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황금 비율을 구사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발견한 1:1.618의 황금 비율이 ‘모나리자’의 전체 화면 구도에서, 그리고 인물의 이목구비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윤곽선을 문지르는 스푸마토 기법은 작품 곳곳에 적용한 정확한 수학적 비율을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 녹여낸다. 그 덕분에 관람객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안정된 구도와 편안한 조형의 세계로 빠져든다. 구도와 배치가 중요한 것도 작품의 완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이유로 짐작해볼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고 황금 비율을 적용하고, 그것이 한눈에 드러나지 않도록 스푸마토 기법과 공기원근법을 사용하는 것이 레오나르도에겐 작품 완성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괴력의 열정,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년)
미켈란젤로 역시 13세에 당대 최고 프레스코 화가인 피렌체의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공방에 들어가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지만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고, 그의 아버지는 수업료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14세가 되자마자 기를란다요를 설득해 임금을 주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기를란다요의 추천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가 세운,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문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학문을 배우며 훗날 그림, 조각 그리고 시에도 능통한 르네상스의 예술가로 성장한다.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비호를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공화주의자에 가까웠다. 메디치 가문을 비난한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년)의 설교에도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로렌초 사망 후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서 활동하며 대표작 ‘피에타’(1498~1499년)를 불과 24세에 완성한다. 성모의 가슴에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띠를 두르듯 새긴 것도 사람들이 이 작품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의 작품일 거라곤 생각 못하고 다른 훌륭한 작가의 것이라고 믿게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는 설화가 유명하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를 완성하자마자 피렌체로 돌아와 ‘다비드상’(1501~1504년) 작업에 착수했다. ‘다비드상’은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벗어나 공화정으로 들어선 피렌체 시민의 승리를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윗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 베키오 궁 앞에 놓인 이 작품은 도나텔로의 ‘다비드상’에 버금가는 명작으로 인정받았고, 이후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초청으로 로마에서 교황의 무덤을 장식할 40여 점의 조각 작품까지 주문받는다. 그때 함께 맡게 된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1508~1512년)이며, 20여 년 뒤 서쪽 벽에 ‘최후의 심판’(1534~1541년)까지 완성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장수한 덕분에 말년엔 당대 최고의 작품이자 오랫동안 작업이 중단되기도 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프로젝트를 맡아 건축 설계에서도 실력을 발휘한다. 피에타, 다비드, 노예상, 천지창조의 아담에서 보이는 미켈란젤로 작품의 특징은 왕성한 남성성. 하지만 이들은 강력한 힘을 만족스러워하기보다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근육으로 오히려 불편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바로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미켈란젤로의 삶이 그러했다. 돈과 명성이 넘쳐났음에도 그걸 쓸 줄 모르고 항상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웅크린 채 잠을 자는 등 마치 예술의 노예라도 된 듯 한평생 작품에만 매달려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선천적으로 고독하고 우울한 성격 탓에 그는 가족, 친구, 제자도 없이 모든 걸 단절한 채 오로지 작품 속에서만 열정을 발산하다 90세 생일을 몇 주 남겨놓고 사망했다.

온화한 전략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년)
라파엘로는 세 거장 중 나이가 가장 어렸음에도(레오나르도보다 서른한 살, 미켈란젤로보다는 여덟 살 어렸다), 37세로 단명하는 바람에 레오나르도가 떠난 바로 다음 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못지않게 일찍부터 많은 작품을 남긴 덕분에 다른 작가들을 제치고 세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라파엘로 또한 페루자와 피렌체 두 곳에 지점을 낼 정도로 성업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년)의 공방에 들어가 어린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8세부터 ‘장인’ 칭호를 듣게 된다. 라파엘로는 21세부터 35세까지 인생의 황금기에 피렌체에 머물며, 당대 최고 작가로 손꼽히던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25세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건너가 제작한 ‘아테네 학당’은 레오나르도식 황금 비율과 삼각형 구도를 곳곳에 적용한 작품. 재미있는 건,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한 당시 바로 옆방에서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 미켈란젤로는 작업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라파엘로는 건축가 브라만테 덕분에 몰래 그 과정을 볼 수 있었고,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에 근거한 뛰어난 인체 표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한데 이 과정에서 성격이 괴팍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의 작품을 따라 한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에 라파엘로도 미켈란젤로를 더 이상 선배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자로 여긴다. 이들의 신경전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라파엘로가 작품 속 고대 철학자의 얼굴에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초상을 그려 넣었는데, 레오나르도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 플라톤으로 표현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당시 ‘어두운 사람’이란 별명을 지닌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로 표현해버린다. 심지어 그 포즈마저 턱을 괴고 웅크린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장점을 받아들여 조화로운 르네상스 전성기의 작품을 완성해냈다. 50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릴 만큼 성공적으로 공방을 운영했지만, 애인과의 지나친 애정 행각이 독이 되어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가 사랑한 여인 포나리나의 모습은 작품으로 남았고, 이들의 사랑은 훗날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년)를 거쳐 피카소에 의해 우스꽝스러운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했다.

바티칸 미술관 스텐차 델라 세나투라(stanza della Segnatura)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라페엘로는 당대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던 레오나르도식 황금 비율을 적용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일러스트 장재훈 인포그래픽 TA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