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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온 자리

ARTNOW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가을을 앞둔, 아티스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웠다.

‘건초 더미’ 연작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1840~1926년)
1840년 11월 14일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1년 가업을 이어 식료품점을 경영해주길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린 채 화가의 꿈을 품고 파리로 간 후, 글레르 아카데미에서 바지유, 르누아르, 시슬레 등을 만나 후에 ‘인상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결성한다. 야외의 빛과 현실 생활을 그리는 데 뜻을 같이한 이들 인상파 가운데에서도 모네는 가장 일관되게 인상주의 화풍을 고집하며 자연을 예술로 옮겨내고자 한 화가다. 그의 작품 ‘수련’(1906년)은 지난 6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5400만 달러(약 550억 원)에 낙찰되었다.

Claude Monet, Haystacks in Giverny, Oil on canvas, 1893, Private Collection

Claude Monet, Haystacks at Sunset, Frosty Weather, Oil on canvas, 1891, Private Collection

모네의 첫 번째 연작 ‘건초 더미’
가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높고 파란 하늘, 새빨간 단풍잎 , 분홍색 코스모스 그리고 노란 들녘. 무엇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 우리말 어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가을의 옛말은 ‘가슬’로 ‘갓다(切)’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잘 익은 곡식을 잘라 거두는 계절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 풍요로운 농촌의 가을 풍경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 역시 황금빛 들판 한편에 수북이 쌓아둔 낟가리 아닐까요? 1888년 가을 어느 날, 화가 클로드 모네는 집 근처를 산책하다 곳곳에 놓인 건초 더미에 주목하고 이를 화폭에 담기 시작합니다. 이후 몇 년간 동일한 모티브에 매달린 결과 약 30점에 달하는 ‘건초 더미’ 연작을 제작했으며 , 그 가운데 15점을 1891년 5월 화상 뒤랑 뤼엘(Durand Ruel)의 갤러리에서 전시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림은 사흘 만에 모두 팔렸고 , 화가는 부와 명성을 함께 누리게 되었지요. 모네의 나이 50세 때의 일입니다. 궁핍한 예술가의 삶을 마감한 그는 세내어 살던 지베르니의 집과 땅을 사고 그곳에 정원을 꾸미기 위해 정원사도 여럿 고용했습니다. 이처럼 ‘건초 더미’ 연작은 화가 모네에게 예술적 결실을 선사한 작품입니다 .

감상 포인트
1890년대 이후 모네는 ‘포플러나무’, ‘루앙 대성당’, ‘수련’ 등 많은 연작을 제작했는데 그 최초의 작품이 ‘건초 더미’입니다. ‘건초 더미’ 연작 가운데 2점을 살펴볼까요? ‘지베르니의 건초 더미’(1893년)는 아직 뜨거운 여름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 풍경, ‘일몰의 건초 더미, 서리 내린 날씨’(1891년)는 늦가을 풍경으로 보입니다. ‘지베르니의 건초 더미’에서는 아마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건초 더미를 화폭 중앙 맨 앞에, 이를 병풍처럼 둘러싼 나무 여남은 그루를 중경에,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또 다른 건초 더미 서너 개를 그 뒤에 배치했습니다. 땅에 드리워진 짧은 그림자로 보아 해가 중천에 떠오른 한낮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몰 풍경 속 건초 더미는 화폭 왼쪽에 놓여 있고, 그 배경에는 흐릿하게 집과 나무와 나지막한 둔덕이 보입니다. 저물녘 어둠 속에 묻히기 직전이라 형태를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베르니의 건초 더미’는 녹색과 연노랑, ‘일몰의 건초 더미, 서리 내린 날씨’는 붉은색과 짙은 청색 위주의 화면이지만, 두 그림 모두 매우 섬세하고 짧은 붓 터치로 그려냈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모네는 왜 건초 더미를 여러 번 반복해서 그렸을까요? 그의 가장 큰 관심사가 빛과 순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상의 고유한 색을 부정했습니다. 계절과 날씨, 시간, 바라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똑같은 대상일지라도 매번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요. 모네에게는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빛이나 대기 속에서 매번 다르게 보이는 순간의 인상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애초에 흐린 날씨와 맑은 날씨의 건초 더미를 그린 2점으로 연작을 구상했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자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옆에서 거들던 딸에게 자꾸 캔버스를 더 가져오게 했다고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새벽녘부터 여러 개의 캔버스를 한꺼번에 세워두고 작업했다는 증언도 전해집니다. 이와 같이 치열한 야외 작업과 정교한 스튜디오 작업이 만나 ‘건초 더미’ 연작이 완성됐습니다. 세잔이 평가한 대로 “뛰어난 눈을 가진” 모네. 그의 주의 깊은 자연 관찰과 치밀한 채색 작업으로 다양하고 풍성한 화면이 탄생했습니다 . 그는 “내게 풍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주변의 것이 풍경에 생명을 부여한다”라고 말하며 “대상과 나 사이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고 싶다”라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모네가 연작을 제작한 배경과 관련해 당시 파리 화단을 휩쓴 일본의 문화 예술 애호 분위기, 즉 자포니슴(japonisme)과 연결해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연작은 일본 다색 판화 우키요에의 한 특징이고, 모네가 이 형식을 본떠 연작 작업을 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지요. 특히 모네가 가장 좋아한 화가 히로 시게의 ‘에도 100경’(1856~1858년)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소개해 많은 이들이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20세기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친 명화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법학을 전공한 자신이 뒤늦게 화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회고하면서 모네의 ‘건초 더미’를 처음 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인상주의 전시에서 이 작품을 접한 칸딘스키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다채로운 팔레트의 강렬한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림이 반드시 대상을 알아볼 수 있게 재현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이 그를 자연스럽게 추상미술로 이끌었지요. 이렇듯 ‘건초 더미’는 추상화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 야수파 블라맹크와 드랭 등 후대 화가에게 큰 영향을 미친 명화이기도 합니다.
글. 김보라(미술평론가)

‘이삭 줍는 여인들’

장-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1814~1875년)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로, 바르비종파를 이끈 주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바르비종파는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 나타났는데, 파리 근교인 퐁텐블로 숲 가까이에 있어 많은 예술가가 즐겨 찾고 모여든 지역이라 그 이름을 따왔다. 밀레는 그뤼시라는 마을 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파리의 보자르에서 전문 미술 교육을 받고 초상화가로 출발했지만, 이후 농민 화가로 이름을 날리며 모네와 르누아르, 쇠라 등의 후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반 고흐는 밀레를 존경해 모사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Jean-François Millet, Des Glaneuses, Oil on canvas, 1857, Musée d’Orsay

현실 인식으로서의 ‘리얼리즘’과 농민의 삶
밀레가 비슷한 시기에 그린 ‘만종’(1857~1859년)과 ‘이삭 줍는 여인들’(1857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밀레의 대표작입니다. 그의 그림은 농촌의 풍경과 농민의 삶을 진솔하게 묘사함으로써 19세기 리얼리즘 미술을 수준 높은 예술로 끌어올렸고, 그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리얼리즘이란 사람이나 자연 등 외부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아니라, 종래의 종교나 신화 등 장대한 주제 대신 구체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주체인 근대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밀레의 그림을 당시 프랑스 농부의 가난하고 고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작품이라고 평한 사람도 많지만 , 이에 대해 밀레는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인간과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삭 줍는 여인들’은 시민혁명 이후 고되면서도 목가적인 농촌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속 배경은 수확이 한창인 계절이지만, 수확의 기쁨보다는 오히려 차분하고 숙연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지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모든 작물을 추수하지 않고 이삭을 남겨둠으로써, 가난한 이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미덕이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구약성서에도 남편 없이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을 줍는 룻의 얘기가 전하는데, 당시 프랑스인은 가속화되는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도 약자를 배려하는 종교적 신념을 실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가난한 사람들은 이삭을 주워 연명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아 당국의 감독 아래 극히 제한된 양만 가져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멀리 뒤편에 쌓아둔 건초 더미와 수확물 앞에 서 있는 감시자의 모습을 함께 그린 것입니다. 전면에 보이는 세 여인은 그림 속 전통적 여성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통통한 신체와 거칠고 두툼한 손이 눈에 띕니다. 그래서 수확기의 낭만과 기쁨보다는 삶에 대한 진지함과 엄숙함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겠죠.

감상 포인트
밀레는 농촌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면서 농민의 삶을 사회적 비판의 도구로 삼지 않았고, 전원생활을 이상화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담담하게 자신이 목격한 현실과 주변의 삶을 묘사한 그의 예술, 특히 ‘이삭 줍는 여인들’은 리얼리즘 회화의 좋은 예로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해온 것일 테죠. 밀레는 이삭 줍는 세 여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대신 , 그들을 중앙에 가깝게 배치해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 그것이 미국인에게는 도덕성과 신앙심을 잘 보여주는 일종의 성화처럼 보였고, 수많은 복사본이 교회와 학교, 가정의 거실에 걸릴 정도로 존경의 대상으로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일본을 통해 밀레의 작품을 접한 우리나라에서도 동일한 이미지로 받아들였고,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목가적 예술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그의 친구인 그림 판매상 상시에가 그의 전기를 미화하면서 일종의 밀레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미 다수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밀레는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부농의 아들로 그 자신도 많은 교육을 받았고, 파리를 떠난 이유도 그의 초상화가 별 인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바르비종에서는 하녀를 두고 살 정도로 부유한 삶을 누렸습니다. 상시에가 이런 부분을 빼고 밀레를 미화시킨 이유는 당시의 현실, 그리고 하층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를 사회주의자로 종종 오해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만들어낸 밀레의 이미지가 작품 판매율을 높여 화상인 그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삭 줍는 여인들’은 ‘만종’과 더불어 노동의 고귀함과 전원 풍경, 그리고 수확기의 미감을 전해주는 작품으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농민의 속내를 그리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이후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그는 죽었는가?>(1898년)라는 연극에서 경제적 부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죽음을 가장하는 주인공 예술가의 모델로 밀레를 등장시키지만 , 여기서 묘사한 대부분의 내용은 밀레와 상관없는 허구입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은 ‘글리너(Gleaner) 제조회사’의 상호에도 영향을 주었고 , 벨기에 출신 영화감독 아그네스 바르다가 2000년에 제작한 는 현대 프랑스에서의 이삭줍기를 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치하 <농민>이라는 계몽 잡지에서 표지 이미지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밀레의 작품은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진솔한 삶을 꾸밈없이 묘사해 현재까지 폭넓은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글. 장원(미술평론가)

‘사시팔경도, 초추’

안견 安堅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조선 초기 세종대부터 세조대 초기까지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원의 신분이라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그럼에도 안견은 국가 행사의 기록화나 복식 그림, 왕실의 초상화, 산수화 등을 그리는 도화원에서 일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아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관직 이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고 살아생전뿐 아니라 죽어서도 그는 조선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傳) 안견, ‘사시팔경도’ 중에서 ‘초추’, 비단에 수묵담채, 35.2×28.5cm, 1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맑아서 으뜸이어라
옛 화가들은 산수화를 그려도 철마다 달리 묘사했지요. 계절의 이미지 중에 오래된 비유 하나가 있습니다. “봄은 꽃이요, 여름은 그늘이다. 가을은 털이요, 겨울은 뼈다.” 참 그럴싸한 표현이지요. 봄날에 만발하는 꽃을 떠올리거나 여름날에 울창한 숲 그늘을 연상하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 가을이 털이고 겨울이 뼈인 까닭이 흥미롭지요. 가을이 되면 수목의 무성함이 사라지면서 풋나무가 가늘어집니다. 마치 털처럼 말이죠. 겨울은 어떤가요? 나무는 앙상하고 눈 내린 산비탈은 골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 이게 곧 털과 뼈에 가을과 겨울을 빗댄 연유입니다. 가느다란 가을의 이미지는 우리말에도 남아 있습니다. 흔히 ‘추호도 없다’고 하지요. ‘추호(秋毫)’는 ‘가을 터럭’이란 말입니다. 가을철 털갈이를 하는 짐승은 새로 돋아나는 터럭이 매우 가늘지요. 추호도 없다는 말은 그만큼 적거나 조금밖에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해도 그 가느다란 털이 죄다 보이는 것은 가을의 날씨가 투명하도록 맑기 때문입니다. ‘가늘다’와 ‘맑다’는 모름지기 가을을 소재로 한 옛 그림의 으뜸가는 이미지였습니다.

감상 포인트
안견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가을 산수화 한 점을 앞에 두고 얘기해볼까요 . 이 그림은 사계절의 풍경을 묘사한 여덟 폭짜리 연작 ‘사시팔경도’ 중에서 ‘초추’, 즉 이른 가을에 해당합니다. ‘사시팔경도’를 죽 펼쳐놓고 보면, 어느 계절을 그린 작품이든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요소가 몇 가지 있지요 . 첫째, 구도가 특이합니다. 이 작품 ‘초추’도 오른쪽으로 구도가 심하게 쏠려 있지요.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는 곧 안견 시대 산수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 ‘초추’와 짝을 이루는 ‘만추’는 반대로 왼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구도지요 . 그다음으로 경치를 이루는 무리, 즉 바위나 산, 나무나 집이 따로 놀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점이 눈에 듭니다. 하나 더 꼽자면, 물이나 안개를 따라 텅 빈 듯 또는 넓게 이어진 공간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안견 화풍의 설계도는 바로 이런 요소로 채워집니다. 이제 ‘초추’에서 풍기는 가을 냄새를 맡아볼 차례입니다. 화면을 세로로 잘라 왼편부터 볼까요. 저 멀리 산 그림자가 희미합니다. 불쑥 튀어나온 바위산에 집채가 보이는데, 그 아래 배 한 척을 모는 어부가 노를 저어 정박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산마을 풍경이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룹니다. 하지만 화가는 강물의 흐름을 애써 묘사하지 않았군요. 그냥 빈 채로 두었는데, 그게 저 멀리 보이는 안개 낀 듯한 분위기와 썩 잘 어울립니다. 이를테면 여백이 깊은 공간을 저절로 빚어낸 거죠. 가을 물이 얼마나 맑으면 이런 시구절까지 있을까요. “가을 물 같은 문장은 티끌에 결코 물들지 않는다.” 화가는 붓을 대지 않음으로써 맑음을 구현합니다. 이 그림은 종이가 아니라 비단 위에 그린 겁니다. 자세히 보면 비단의 올이 가로로 길고 가늘게 이어지는 것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 희한하게도 그것이 강의 물결처럼 느껴집니다. 비단의 질감이 가을 강의 깨끗한 일렁임과 딱 맞아떨어진 것이지요. 가을의 가느다란 이미지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바위 위에 삐죽이 솟은 나무들을 보세요. 가늘고 뾰족한 나뭇가지, 그리고 회초리처럼 단출한 몸피가 조락하는 가을 나무의 전형입니다. 화가는 가을 나무를 그리는 독특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이른바 ‘해조묘(蟹爪描)’라는 건데, 게의 발톱처럼 묘사하는 법식을 말합니다. 짧고 날카롭고 가늘게, 붓끝으로 탁탁 끊어 치면서 그린 것이죠. 가을날 나뭇잎이 흔들리며 추락하는 광경은 공연히 사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가을을 ‘숙살(肅殺)’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고요히 말려 죽이는 것이 곧 숙살입니다. 오른쪽 아래 화면을 보면, 갓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집으로 돌아오는 사내가 개미처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을은 또한 귀로의 이미지와 어울립니다 . 가장 크게 그려놓은 산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그로테스크하지요 . 입을 벌리고 절규하는 사람의 표정을 닮았습니다. 안견 시대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바위나 산의 겉모양은 대개 몽상적인 기이함을 띠고 있습니다 . 이유가 있지요. 하늘과 땅을 마치 조화(造化)와 신령(神靈)의 다른 이름인 양 여겼습니다. 하여 변화무상한 형태는 생명의 부단한 임무와 같습니다 .

조선의 명품 화가
신라에 솔거가 있다면 고려엔 이녕이 있고, 조선에는 안견이 있습니다 . 안견은 세종대의 빛나는 문화 예술을 상징하는 존재지만 아쉽게도 그의 진작은 일본 덴리 대학에서 소장한 ‘몽유도원도’ 딱 한 점밖에 없습니다 . 나머지 작품은 엄밀히 말하면 ‘전칭작(傳稱作)’입니다.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이 작품 ‘초추’를 포함한 ‘사시팔경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다른 전칭작에 비해 안견의 화풍이 짙게 밴 작품이기는 하지요. 안견의 작품은 조선 초에 이미 ‘금이야 옥이야’ 하는 명품으로 군림했습니다. 더 많이 찾아내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글. 손철주(미술평론가)

에디터 고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