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일몰
네 작가가 네 도시에서 각각 인생 최고의 일몰을 봤다.
누구라도 걷고 싶게 하는 그 계절에, 누구라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그 일몰을.
쿠바, 아바나
쿠바에서 비를 만나는 경험은 낮과 밤이 현격히 다르다. 낮에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선 아이들이 물고기 떼처럼 논다. 열대의 비답게 소란하고 화려하다. 짧은 축제가 지나간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아바나(La Habana)의 구시가에 있었다. 강렬한 햇빛과 관광객 때문에 지친 우리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는 듯한 빗방울이 돌바닥을 적신다. 둘러보니 관광객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마치 소금기둥이었던 양. 빗물에 녹아 돌 틈으로 스며들기라도 한 양. 우산도 없이, 우리는 문득 지금 느끼는 슬픔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돌길 위에서 춤을 춘다. 시간이 어디론가 흘러서 빠져나가고, 우리는 흐르는 빗물을 따라 골목을 걷는다. 비가 그치고 구름도 흘러간다. 해가 진 걸 깨달은 건 말레콘(Malecon)에 다다라서였다. 우리의 머리 위로 높고 말간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이곳이 아닌 곳에 다녀온 것이리라.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글·사진 박사(칼럼니스트)
튀니지,제르바 섬
하루 중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태양빛이 농염을 풀고 붉게 물들어가는 그 시각엔 밤을 준비하는 연한 감정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동물원의 해 지는 풍경이랄지, 놀이터의 해 지는 풍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몇 년 전 튀니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몇몇 도시 중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제르바(Jerba)섬이었다. 일몰 때문이었다. 여행 고수인 지인이 자신이 본 일몰 풍경중 가장 아름다웠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제르바 섬은 튀니지에서도 젊은이보다는 노년의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남부의 작은 섬으로 오래전부터 쇠락한 느낌마저 드는 애잔한 잔향이 인상적이다. 내가 머무는 숙소 역시 해 지는 시각에 노부부 대부분이 손을 잡고 해변을 걷거나, 해가 지면 쓸쓸해져 손을 잡고 잠들기 위해 이곳을 찾는 듯했다. 해변은 화려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였다. 어부들의 망가진 나룻배나 노가 부서진 채 여기저기서 늙어가고 있고, 버려진 요트 위로 상아색 부리의 갈매기들이 내려앉아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소박한 풍경이 전부였다. 하지만 다른 행성의 노을을 보고 싶다면 여기만 한 곳이 없다.
글 김경주(시인, 극작가) 사진 전소연
경남, 맥전포항
통영에서 촬영을 하던 어느 겨울. 다음 촬영을 위해 지도를 살피다 문득 떠올랐다. 엄마의 고향이 여기 어디쯤이라는 것이. 맞아, 경남 고성의 맥전포항. 어릴 적 엄마와 함께 자주 간 외할머니네 집. 그러나 초등학교 이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엄마의 고향. 잠시 망설이다 다른 일정을 미루고 서쪽의 맥전포항으로 차를 몰았다. 마침 하늘에선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는데 한쪽은 바다 위로, 다른 한쪽은 전봇대 위로 빨갛게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엄마는 해 뜨는 모습보다는 지는 모습을 좋아하셨다. 해돋이는 못 봐도 해넘이는 꼭 보시곤 한 엄마는 노을에서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흐읍, 푸우, 흐읍, 푸우, 깊게 숨을 쉬며 일몰 냄새를 맡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그게 무슨 냄새였는지 설명해준 적이 없다. 흐읍, 푸우, 흐읍, 푸우. 하지만 바다에 있는지, 산에 있는지, 어느 계절에 있는지에 따라 물리적 냄새는 분명 달랐을 것. 엄마의 고향 바다 가까이에서 맞이한 그날의 일몰은 맡은 지 오래된 엄마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겨울의 콧속 습기를 얼리는 차가운 호흡, 노을의 냄새. 엄마의 냄새.
글·사진 원성원(미술가)
말리, 도곤 컨트리
힘든 하루였다. 아침 일찍 몹티(Mopti)를 출발한 나는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도곤 컨트리(Dogon Country)에 도착했다. 거친 사막과 돌산으로 이뤄진 그곳에서 바위로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 그들의 흔적을 좇아 낡은 차를 타고 종일 쉼 없이 달리며 엉덩방아를 찧고, 그 엉덩이가 다시 무감각해지고 나서야 이 여정에 대한 흥분으로 들썩이던 내 마음 역시 무감각해졌다. 겨우 차에서 내려 먼지 가득한 매트리스가 있는 방에 짐을 풀었다. 해 지기 전 잠시라도 마을을 걸어볼까 했지만, 몸과 마음은 기운이 빠져 있는 상태. 사실 한잔 마시라고 그들이 내준 맥주가 미지근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홀로 떠난 서아프리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슬그머니 문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어찌 됐든 그즈음 영혼 없이 떠돌던 내 두 발을 멈춰 세운 게 있었다. 바로 마을 뒤 바위산에서 시작된 하나의 빛줄기. 하루의 끝을 예감하며 마지막으로 힘차게 아름다움을 뿜는 노을. 순식간에 난 그걸 찍었고, 주변의 모든 게 어둠으로 번질 때까지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한데 그 노을이 내게 말해준 건 대체 뭐였을까? 지치고 힘들 때 다시 앞으로 향해야 하는 어떤 이유? 다음 날 난 다시 카메라를 들고 아프리카의 북쪽으로 긴 여정을 떠났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풍경이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글·사진 케이채(사진가)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