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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수업

ARTNOW

예술품의 가치를 완벽히 알아보는 세기의 경매사 버질이 고택에 사는 묘령의 여인에게 감정 의뢰를 받은 후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인생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베스트 오퍼>는 우리에게 그것을 묻는다.

버질 올드먼은 비서에게 묻는다. “자네 결혼했나?” 비서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겨우 숨기고 대답한다. “30년 됐습니다만.” 비서가 버질을 수행한 지 1~2년 된 것도 아니다. 버질은 그렇게 오래 일한 비서 따위 안중에도 없는 박정한 인물이다. 버질은 묻는다. “어떤가? 여자와 사는 것 말일세.” 비서가 절묘한 대답을 내놓는다. “경매와 비슷합니다. 내가 제시한 게 과연 적정가인지 결코 알 수 없죠.” 버질은 오만한 표정을 짓는다. 남들은 몰라도 최고의 경매사인 자신만큼은 알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베스트 오퍼>는 경매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베스트 오퍼>의 주인공 버질 올드먼은 경매 회사의 최고경영자다. 당대 최고의 미술품 감정사다. 당연히 진귀한 미술품과 치열한 경매장이 자주 등장한다. 베스트 오퍼라는 영화 제목도 경매에서 쓰는 ‘적정가’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도 <베스트 오퍼>는 경매 영화가 아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시네마 천국>을 만들었다. <시네마 천국>은 영화에 관한 영화가 아니었다.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과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인생에 관한 영화였다. <베스트 오퍼>도 마찬가지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경매라는 배경 속에서 마지막 사랑과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베스트 오퍼>는 어떤 경매 영화보다 더 경매에 관한 영화다. 버질은 힐끔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진품과 위조품을 구분할 수 있다. 객관적 진위 여부만 알아내는 게 아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만 구분한다면 CSI와 별다를 게 없다. 미술품 감정사는 미술품의 가치를 가늠한다. 진짜지만 별다른 가치가 없는 미술품도 있을 수 있다. 언뜻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가치를 지닌 작품도 있을 수 있다. 가치는 주관적이다. 미술품 감정사는 주관적 가치 기준으로 객관적 가격을 잠정 결정한다. 미술품 구매자들은 감정사의 주관적 가치 기준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가 제시한 베스트 오퍼, 그러니까 적정가를 인정한다. 버질은 깊이 신뢰받는 감정사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2007년 940억 원에 팔렸다. 18세기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실제 두개골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만든 작품이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의 가치는 끊임없는 논란거리다. 사람의 해골에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은 게 예술이냐 아니냐에 대해선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가 익명을 요구한 한 투자 그룹에 팔았다. 직구로 직판한 셈이다. 둘 사이에서 결정된 주관적 가격이라는 얘기다. 누군가 첫사랑이 남긴 헝겊 인형이 너무 소중해 억만금이라도 주고 사겠다며 나섰다고 해서 그 인형의 가격이 억만금인 건 아니다.
경매의 역할이 여기에 있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가 다시 시장에 나온다면 당연히 940억 원보다 높은 가격에 경매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정작 경매장에서 아무도 940억 원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장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미술품은 경매라는 시장을 통과할 때 비로소 제값을 얻게 된다. 그러나 경매로도 미술품의 가치나 가격을 ‘단정’지을 순 없다. 경매란 결국 여러 사람이 투표를 통해 미술품의 가격을 매기는 과정이고, 부동산 경매장만큼은 아니지만 미술품 경매장도 늘 어느 정도의 거품에 노출돼 있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베스트 오퍼>에서 경매의 이런 민낯을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미술품의 진위 여부와 가치, 가격의 결정 과정을 통해 인생의 정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버질 올드먼은 오래된 저택에 홀로 살고 있는 묘령의 여인에게 감정 의뢰를 받는다. 여인의 고택엔 가치 높은 미술품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다. 버질은 미술품의 조형성에 대한 심미안이 있다. 조형성이란 복합적 단어다. 하나의 미술 작품이 지닌 예술성은 조형성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 붓놀림이나 색채감, 구도나 참신성 같은 모든 가치가 조형성을 이루는 요소다. 작품을 완성한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유명세, 작품의 희귀성 같은 것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버질은 이 모든 복잡다단한 요소를 순식간에 꿰어 맞춰 작품의 조형성을 간파하는 데 천부적 재능이 있다.
그런데 버질은 자신의 재능을 악용한다. 가치를 낮춰 가격을 속인다. 경매장에 나온 작품의 높은 가치를 알면서도 낮은 가격을 제시해 헐값에 자신이 가로채는 식이다. 그런 버질을 도와준 친구가 있다. 빌리다. 젊은 시절 빌리는 촉망받는 화가였다. 빌리는 출세하지 못했다. 버질이 미리 점찍은 훌륭한 작품을 헐값에 사들이는 대리인 역할을 하며 노년을 보내게 됐다. 사실 버질은 빌리의 재능을 알아봤다. 다만 낮은 가격에 사서 곁에 두고 이용하기 위해 친구의 가치를 무시했다. 경매장에 나온 작품을 실제 가치보다 낮게 사들이는 짓을 친구에게도 똑같이 해버렸다.
버질은 하필 묘령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제까지 버질은 어떤 여자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 대신 수많은 여성의 초상화를 수집해 금고에 숨겨놓았다. 버질의 심미안으론 그림 속 여인이 진품이다. 오히려 살아 있는 여자가 위조품이다. 그림 속 여인들에겐 어떤 살아 있는 여인도 가질 수 없는 조형미가 있기 때문이다. 버질은 오라가 없는 현실의 여인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묘령의 여인에겐 신비한 오라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클레어다. 일찍이 세상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피조물 같다. 클레어는 공황장애 때문에 바깥출입을 못한다. 오직 버질을 통해서만 세상과 만난다. 그림 속 여인들과 똑같다. 버질은 클레어가 진짜라고 믿게 된다. 미술품처럼 사람도 진위 여부와 가치를 대번에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사실 클레어는 빌리가 만들어낸 존재다. 빌리는 버질에게 복수할 결심을 한다. 버질이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여인의 초상화들을 빼앗는 게 목적이다.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클레어라는 가짜를 만들어낸다. 빌리는 버질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버질은 그림의 진품과 모방작을 구분할 때는 늘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진품 역시 실제 사람을 모방한 그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품도 현실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버질은 그걸 부정하며 살아왔다. 버질은 한 번도 현실을 진짜처럼 대한 적이 없다. 친구도, 직원도 모두 거짓으로 대한다. 결국 버질의 인생 자체가 가짜다. 버질이 그토록 진품의 오라에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자신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클레어라는 살아 있는 진품이 나타나자 버질은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버질은 클레어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감정한다. 사실이다. 클레어는 버질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동시에 클레어는 빌리와 짜고 버질의 수집품을 노린다. 둘 다 진짜다. 인간의 감정엔 진짜와 가짜의 명확한 구분이 없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진짜 같은 가짜와 가짜 같은 진짜가 공존한다. 버질이 금고 문을 열어준 순간 클레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진짜라는 걸 알아줘요.” 이 말은 클레어의 진심이다. 동시에 클레어가 사기꾼이라는 것도 진실이다.
버질은 평생 객관적 진위와 주관적 가치, 객관적 가격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왔다. 사랑이 그 균형을 무너뜨린다. 주관적 가치에 몰입하게 된다. 버질은 가짜 사랑에 최고가를 매기는 실수를 하고 만다. 끝내 버질은 감정사로서 균형 감각을 영원히 잃고 만다. 버질은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모든 위조품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지.”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고 해서 진품은 아니다. 버질은 위조품 속 진품의 미덕에 매몰되고 말았다.
버질은 바보다. 침대 옆자리에 아내가 누워 있다고 해서 아내 마음속에 딴 남자가 없다고 확신할 순 없다. 버질은 클레어의 육체를 만져보곤 진짜라고 맹신한다. 삶의 진위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베스트 오퍼를 결코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버질의 평범한 비서조차 아는 진리다. 버질만 모른다. 일생일대의 경매는 그렇게 끝난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신기주(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