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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미술 비평

LIFESTYLE

어쩌면 이건 끝나지 않을 논쟁일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어졌고,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갈 그런 논쟁.
국내 미술계에 만연한 나 몰라라 식 미술 비평에 대해 짚어봤다.

“작가가 거울 속에서 만든 세계는 고착된 상처와 그것이 유발한 환상의 세계에서 생활 세계와의 유사성을 기초로 보편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 완결된 자아가 세상에 대응하는 것이 아닌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로서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현상학적이고 하이데거식이다.” 최근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서문의 일부다. 이 글에서 비평가는 작가를 인간 과 하이데거를 넘어선, 우주를 유영하는 신쯤으로 표현했다. 만약 누군가 이 비평의 대상이 신인 작가라는 사실을 모르고 전시를 봤다면, 그는 해당 작품 앞에서 실제로 ‘메시아’를 경험하려 했을지도 모른다(물론 작품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데 하이데거까지 인용한 비평가는 “대부분의 예술 작품이 자신을 향하거나 고백적이지만, 작가의 고백은 그 방식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순도(純度) 또한 방식의 직접성만큼이나 높다”라며 끝까지 고상한 톤으로 글을 마친다.

미술 비평가 존 버거가 피카소에 대해 신랄하게 쓴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는 책이 나온 1960년대 미술계에서 마녀사냥을 당했지만, 이후 수십 년간 날카로운 비평으로 ‘미술 비평계의 조상님’이라 불리고 있다.

매주 수십 건의 전시 소식을 메일로 받는다. 그런데 거기 실린 비평 글은 뭔가 좀 이상하다. 온갖 난해한 철학적 문장을 가져와 작가와 작품을 칭찬한다. 문학계에서 결혼식 주례같이 칭찬만 하는 ‘주례 비평’이 이따금 문제가 되는데, 미술계는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작가가 무명이든 신인이든 중요치 않다. 비평만 보면 그들은 모두 세계와 우주를 통찰하는 당대의 사상가다. 여기에 의문을 품자 한 큐레이터는 “전시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이 날 선 비평 글을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획 단계부터 자신이 잘 부릴 수 있는 비평가를 택하기 때문일 거예요”라며 미술계의 구태한 문제를 환기시켰다. 구태한 문제? 그렇다. 미술계의 주례 비평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쉬이 읽기 힘든 글이 이어져왔고, 어쩌면 앞으로도(작가와 전시 그리고 비평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문제일지 모른다. 한 전시 기획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작가가 개인전을 여는 건 잔치를 벌인다는 건데, 당연히 칭찬을 해줘야죠.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순 없잖아요.”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돈을 받고 쓰는 글인데 욕을 할 순 없다는 거다. 한 예로 인사동 화랑가엔 건당 50여만 원씩 받고 전문적으로 주례 비평만 쓰는 비평가도 존재한다. 그런데 개중엔 국내 메이저 갤러리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그들은 국내의 굵직한 미술상과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분해 작품을 평가하기도 한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도 든다. 주례 비평 문제는 미술계 전반의 비평 문제에서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고.

“아쉽게도 국내 미술계에선 작가와 비평가가 서로 원수가 돼 으르렁거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전히 많은 비평가들이 평론의 자주권보단 집단의 이해에 얽혀 비평한다.”

사실 이런 ‘비평의 비평’에 대한 논쟁을 손보려는 시도는 그간 미술계에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김병호 작가는 2009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프러포즈7>이란 전시를 기억했다. <프러포즈7>은 그간의 미술 전시와 달리타 분야의 평론가들이 작품을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 음악평론가 김재용, 철학자 탁석산을 비롯한 비미술 평론가 7인이 비평에 참여했고, 현대미술에 대한 애정을 베이스로 각기 다른 크리틱 기준에 따라 작품을 평해 갈수록 나 몰라라 식이 되어가던 국내 미술 비평에 작지만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김병호 작가는 “날카로운 논조를 지닌 미술 비평가들이 서문이나 도록 비평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점점 돈벌이를 하려는 이들만 전시장에 몰린다”고 말했다. 갤러리기체 윤두현 대표의 생각은 좀 더 본질적이었다. 그는 “서문이고 도록이고 미술 비평이 문제라고 하기 전에, 국내에 언제 제대로 된 미술 비평이 존재하긴 했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만일 미술 비평이 활성화하지 못하고 침체해 있다면 그건 ‘비평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과 연관돼 있는 것이고, 이 시대에 ‘비평적 지식’이 정말로 필요한지, 우리 사회가 진정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윤두현 대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로, 아직 한국인이 쓴 제대로 된 미술 비평 이론서가 없다는 사실을 꼽았다. 그는 “비평이란 것 자체가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정확한 의견 피력이 있어야 하는데, 근본적 이론이 없으니 다들 ‘회색’만 최고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국내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거론했다.

미국의 미술 비평가 제리 살츠는 학파와 이론에 기대지 않은 비평으로 대중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렇듯 국내 미술계의 비평에 대한 논쟁은 누군가의 이렇다 할 ‘비평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철학 없는 비평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 뜻을 강하게 밀어 붙이는 비평가들은 본디 전시 서문이나 도록 비평엔 관심이 없고, 미술 전문지 기고나 학계 발표에만 매진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학 미술 과목 커리큘럼에 결코 빠지지 않는 스테디셀러 <보는 방식(Ways of Seeing)>의 저자이자 세계적 미술 비평가인 존 버거(John Berger)의 또 다른 저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The Success and Failure of Picasso)>를 살펴보자. 존은 이 책에 ‘피카소는 그 자신의 창조성에 현혹되어 그것에 헌신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작품은 대부분 부차적인 중요성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로는 모든 미술가에게 통용되는 진실이다’라는 문장을 써 당시 미술계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책이 처음 출간된 1965년, 피카소가 신적 존재로 너무도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존은 당시 미술계의 용자나 다름없었다(물론 그는 당시 미술계 특유의 독단적 분위기에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끝까지 자신의 비평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작가의 작품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 이제까지도 서구에서는 ‘미술 비평계의 조상님’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국내 미술계에선 작가와 비평가가 서로 원수가 돼 으르렁거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많은 비평가가 평론의 자주권보단 집단의 이해에 얽혀 비평한다. 제대로 된 미술 비평론의 부재가 문제가 된다면, 그걸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될 것이다. 작가와 작품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한 작품 해설 비평도 물론 필요하지만, 비평이라는 행위 자체가 잘 알고 있는 걸 비틀어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 미술계에 그득한 칭찬 일색의 비평 문화는 오히려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람객을 서로 멀어지게 할 뿐이다.
미술 비평가 정현은 좋은 미술 비평의 정의를 묻는 질문에 “현학적 문체로 작품을 지우지 않는 비평”이라고 담박하게 말했다. 또 “글은 개념 언어이기 때문에 작품이 난해하면 비평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을 본 관람객이 작품 대신 글만 떠올리게 된다면 그건 나쁜 비평”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늘날 비평 없이 현대미술을 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관람객이 그 아슬아슬한 비평의 외줄 위에서 미술을 접한다. 미술계의 형편상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나 ‘달리 도리가 없다’는 식의 불가피함을 이해하는 시기도 어느 정도 지난 것 같다. 국내의 많은 미술 비평이 앞으로 작품의 일부로서 온전히 전시를 채워줄 수 있길 기대한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