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val of the Legend
10월 13일, 새롭게 태어나는 분더샵을 통해 모아나가 서울에 상륙한다. 견고한 디자인과 장인의 기술이 어우러진 유서 깊은 트렁크 브랜드, <노블레스>가 이에 앞서 파리 현지의 모아나 메종을 취재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이후 진과 셔츠만 걸쳐도 시크한 파리지엔보다 연륜과 여유가 묻어나는 잔잔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이 부러웠다. 몇 해 전, 패셔너블한 거리 뤼생토노레(Rue Saint Honoré)에서 우연히 마주한 단아한 토트백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모아나(Moynat)라는 브랜드 이름은 생소했지만 반듯한 각과 곡선이 균형을 이룬 가죽 가방에는 어딘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간결한 라인에 이토록 우아한 존재감을 담아낼 줄 아는 모아나의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행보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브랜드의 헤리티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아나 생토노레 부티크
모아나의 생토노레 부티크 내부 전경
모아나의 레잔 클러치 백
10월 13일 공개하는 분더샵 내 모아나 팝업 스토어 가상도
1849년부터 견고하게 구축해온 방대한 헤리티지의 중심에 선 폴린 모아나(Pauline Moynat). 최초의 여성트렁크 메이커로 통하는 그녀는 19세기를 살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는 감각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트렁크 장인 쿨랑비에(Coulembier) 가문과 함께 완벽한 방수 기능을 자랑하는 천연 라텍스 소재 구타페르카(Gutta-Percha)를 사용해 견고한 트렁크를 제작했고, 가죽과 패브릭으로 마감한 가벼운 나무 트렁크를 프랑스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으니까. 그뿐 아니다. 여행의 개념이 단순한 장거리 이동에서 일종의 레저로 진화하던 시절(파리 최초의 여사가 자리잡기도 전이다!), 오페라 지역에 부티크를 오픈한 것도 그녀고, 여행가방과는 별개의 분야로 여기던 핸드백 라인을 런칭해 함께 선보인 것도 그녀다. 이렇게 트렁크라는 오브제속에 혁신적 비전을 담아낼 줄 안 폴린이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부유층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자동차 문화를 누구보다 먼저 주목한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차량 색과 어울리는 트렁크 컬러를 고를 수 있는 일종의 MTO 서비스를 제안했고, 트렁크 바닥을 자동차 지붕의 곡선에 맞춰 유선형으로 제작하는 스마트함까지 자랑했다. 쿨랑비에 아틀리에의 섬세한 장인정신을 더한 모아나의 제품은 자연스레 20세기의 프렌치 하이엔드 라이프스타일을 대표하게 되었다. 카탈로그 제작을 담당한 일러스트레이터 앙리 라팽(Henri Rapin)이 트렁크 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이니셜 M을 연속으로 배치한 모티브를 디자인했다고 하니, 이 트렁크 메이커가 당시 누린 성공의 규모를 쉽게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은가.
모아나 트렁크와 함께 시베리아를 찾은 오지 탐험가 에드몽 코토(Edmond Cotteau), 프랑스의 전설적 여배우로 통하는 레잔(Réjane), 사라 르나르(Sarah Bernhardt) 등 두터운 마니아층을 보유한 폴린 모아나의 이야기에 쉼표가 찍힌 것은 1976년의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켜켜이 쌓인 먼지마저 이 독특한 헤리티지가 발산하는 찬란한 광채를 완전히 덮어버리지는 못했다. 2000년대에 브랜드를 인수한 LVMH 그룹은 전 세계의 빈티지 숍과 경매장을 오가며 모아나의 제품을 찾아냈고, 이렇게 구축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2011년 말 새롭게 완성한 컬렉션을 생토노레 거리 348번지에 부활시켰다.
모아나의 아트 디렉터 라메시 나이르
레잔 백
폴린 백
1976년까지 이어진 1막의 주인공이 폴린 모아나였다면, 35년이라는 오랜 쉼표 끝에 다시 시작한 2막의 스포트라이트는 라메시 나이르(Ramesh Nair)를 향한다. 탄탄한 기본기와 우아한 창의력으로 에르메스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이 인도 출신 아트 디렉터는 전형적인 파리의 패션 피플과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이다. 모아나의 새로운 탄생을 가능케 한 일등공신이지만 여전히 대학생 같은 심플한 옷차림을 고수하고, 핫한 파티에 얼굴을 비치는 대신 생토노레 부티크와 아틀리에를 잇는 골목에서 생활하는 노숙인과도 친구처럼 지낸다(함께 아틀리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직접 목격한 일이다). 공격적 마케팅 전 략이나 광고 캠페인을 펼치는 대신 묵묵히 제품의 퀄리티에 정성을 쏟던 폴린 모아나처럼 말이다. “폴린 모아나가 남긴 헤리티지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모아나의 코드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무척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녀가 완성한 트렁크와 가방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당시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제작한 것이기에 옛 모습 그대로 현재에 적용할 수는 없었죠. 리무진 지붕에 맞춰 제작한 트렁크를 브리프케이스로 재해석한 ‘리무진’을 가장 먼저 완성했고(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브리프케이스를 구입한 첫번째 손님이 칼 라거펠트였다고), 뒤이어 옛 트렁크 라인을 토트백에 담은 ‘폴린’, 여배우 레잔이 소장한 작은 트렁크에서 영감을 받은 ‘레잔’ 등이 이어졌습니다. 잠금장치 같은 소소한 디테일 역시 폴린 시절에 완성한 디자인에서 기인한 것이죠.”
모아나의 아틀리에 풍경
전 세계 패셔니스타의 마음을 설레게 할 잇 백의 디자인을 고민하는 대신 직접 구입한 빈티지 트렁크 감상을 즐기는 독특한 아트 디렉터를 둔 모아나의 아틀리에. 3년 사이 파리에 이어 뉴욕과 런던에도 부티크를 오픈했지만, 최고급 가죽만 고집하는 탓에 생산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이그조틱 스킨으로 만든 모델은 컬러당 한 피스만 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아담한 내부를 채운 10여 명의 장인은 견고한 라인을 위해 가방 안감에도 일일이 가죽 조각을 붙인다. 모아나를 처음 발견한 날, 시선을 멈추게 한 토트백의 그 잔잔한 카리스마는 이토록 섬세한 장인의 손길과 폴린 모아나에 대한 기억의 조합으로 완성한 것이다. 2막을 시작한 모아나가 21세기를 대표하는 프렌치 라이프스타일의 또 다른 아이콘으로 기억되리라는 예상이 너무 앞서간 것이라면, 최소한 이것 하나는 확신한다. 서울에 상륙한 모아나를 만난 순간, 당신의 발걸음 역시 그앞에서 오래도록 멈추게 되리라는 사실을.
에디터 이혜미 (hmlee@noblesse.com)
사진 배우리(파리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