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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병에 담은 계절의 향기

LIFESTYLE

사시사철 전 세계에서 재배한 신선한 과일을 구할 수 있는 현대인의 삶에서,제철 과일을 저장하기 위해 잼을 만드는 일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할지 몰라도 조금은 시대에 뒤처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제 잼을 만드는 일은 길고 지루한 겨울을 지나 다시 찬란한 햇살 아래에서 과일이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위한 필수적 노동이 아니라, 우리가 즐기던 계절의 에센스를 저장하는 아름다운 수고가 되었다. 소영 스캔런이 캘리포니아의 잼 메이커 준 테일러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은, 계절의 추억을 간직하는 특별한 방법에 대해 전한다.

 

흔히 과일에 설탕을 넣어 가열해서 만드는 저장 식품을 잼이라 통칭하지만, 만드는 방법과 모양에 따라 각각 그에 맞는 적합한 이름이 있다. 간 과일에 설탕을 넣고 졸여 버터와 비슷한 질감을 낸 프루트 버터(fruit butter), 잼과 비슷하지만 숟가락으로 퍼 올렸을 때 과일의 모양이 많이 남아 있는 컨서브(conserve), 컨서브에 비해 좀 더 으깬 과일로 만들어 젤리에 가까운 잼, 여과한 과일 주스에 많은 양의 설탕을 넣어 보다 투명하고 점성이 강한 젤리, 그리고 오렌지와 레몬으로 대표되는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 껍질을 설탕물에 끓여 만드는 마멀레이드(marmalade) 등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설탕이 대중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할 때 전통적으로 잼이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고대 로마인이 꿀과 과일을 섞어 현대의 디저트와 비슷한 음식을 즐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고, 아시아에서 처음 경작하기 시작한 사탕수수에서 얻은 설탕은 아랍을 통해 서서히 서양으로 전해졌다. 현대의 잼과 비슷한 형태의 마멜로(marmelo)는 한국의 모과와 비슷한 퀸스를 꿀이나 설탕과 함께 졸인 것으로 그리스 시대에도 소화제로 널리 이용되었다. 19세기 전까지 잼은 상류층에서도 토스트에 두껍게 발라 아침에 먹는 것이 아니라, 부를 과시하기 위해 파티에서 화려한 은수저에 조금 얹어 선사하는 ‘spoon sweets’였다. 19세기 말에 들어서서야 서인도 식민지 개발에 의해 중상류층에게 설탕이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해외무역과 식민지 개발의 주역인 영국이 잼을 많이 만들고 즐기는 국가로 부상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맛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신선한 재료에 당분을 더해 저장성을 높이는 것은 염장이나 건조를 통해 부패균의 생장을 돕는 수분의 양을 줄이는 원리와 비슷하다. 여기에 잼을 만드는 과정은 가열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부패균을 제거하고, 캐닝(canning)이라는 단계를 더해 보관 시 외부 부패균의 접근을 봉쇄할 수 있어 상하기 쉬운 과일을 저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발전했다. 잼을 만들 때 중요한 요소는 산, 당분 그리고 과일에 들어 있는 펙틴이다. 펙틴은 모든 식물의 조직을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탄수화물로, 열을 가하면 조직에서 녹아 나오고 설탕과 결합하면 묵을 쑤는 과정처럼 식은 후 불용성 젤을 만든다. 과일의 산이 이 과정을 돕는다. 이렇게 형성된 젤은 그물 같은 조직 안에 과일의 에센스인 주스와 색소를 품어 보석과 같은 영롱함을 잼에 선사한다. 덜 익은 과일에는 과숙 상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산과 펙틴이 들어 있는데, 사과와 모과, 오렌지, 레몬 등이 껍질에 펙틴을 많이 함유한 대표적 과일이다. 반면 살구, 복숭아, 블루베리, 체리 등의 연한 과일에는 산과 펙틴의 양이 적다. 이런 과일로 잼을 만들 때는 펙틴의 함량이 높은 과일과 섞거나 정제된 펙틴과 약간의 산을 더해야 원하는 조직감을 얻을 수 있다. 순수함을 중요시하는 수제 잼 제조자들은 공업적으로 분리한 시판용 펙틴을 사용하는 대신 이른 가을부터 덜 익은 사과를 뭉근히 끓여 1년 동안 필요한 양을 추출, 저장해놓은 후 추수를 마친 농부와 같은 여유와 풍요를 즐긴다.

_ 계절마다 꽃이 피고 과일이 익어가는 과일 농장 모습
아래_ 탐스럽게 익은 농장의 제철 복숭아와 제철 산딸기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위치한 잼 메이커 준 테일러(June Taylor)의 공방은 언제나 제철 과일이 뿜어내는 향기로 가득하다. 겨울에는 마멀레이드를 만들기 위해 차가운 공기 속에서 황금빛으로 익은 오렌지와 레몬으로 공방을 채우고, 봄이 오면 딸기와 제철보다 이른 시기에 빨갛게 익은 체리, 살구의 달콤한 향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캘리포니아의 기나긴 여름에는 작열하는 햇살 아래 익어가는 자두, 복숭아, 산딸기, 라즈베리가 그녀의 움직임을 재촉한다. 여름 햇살의 강렬함이 사그라지고 일교차가 심해지는 초가을에 찾아간 그녀의 공방에는 끝물인 산딸기가 가득 담긴 바구니와 막 수확하기 시작한 배가 담긴 상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준 테일러를 오랜 동료로, 또 친구로서 알게 된 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잼을 거의 먹지 않는 나에게 그녀가 만든 잼의 의미를 알게 해준 것은 이제 아홉 살 된 내 딸아이다. 파머스 마켓에서 그녀의 판매대가 우리 자리 바로 옆에 있을뿐더러 마켓에서는 물물교환을 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내 집에는 언제나 그녀의 잼이 몇 병씩 비치되어 있었다. 세 살 되던 해에 첫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와 신선하게 구운 브리오슈(버터를 많이 넣어 만든 흰 식빵)에 맛을 들인 딸아이는 비가 내리는 늦가을이 되면 준 테일러의 잼을 얇게 바른 브리오슈 토스트로 아침을 맞고 싶어 했다. 그렇게 맛있느냐고 묻는 내게 딸아이는 정색을 하며 “준의 잼은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 만족을 준다”고 대답해 나를 놀라게 했다. 어휘력이 점점 늘면서 아이의 표현은 맛있다(good), 만족스럽다(satisfying), 대단하다(great), 눈부시다(splendid), 비교가 되지 않는다(incomparable)로 발전해갔다. 특히 ‘붉은 구름’이란 이름의 살구잼(Red Cloud Apricot Conserve)은 비 내리는 추운 아침 아이에게 여름날 황혼 녘의 붉게 물든 구름을 기억하게 했고, 딸기 장미 제라늄(Strawberry Rose Geranium)은 여름으로 넘어가는 늦봄의 정원에서 함께 자라는 딸기와 제라늄의 향기를 떠올리게 했다. 가장 예쁜 은숟가락으로 유난히 그녀의 잼을 즐기는 아이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난 그녀가 단순히 제철 과일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꿈을 병에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잼 메이커인 준 테일러

준 테일러. 염색하지 않은 반백의 짧은 머리, 두꺼운 검은 안경테 너머로 따뜻하면서도 강렬하게 빛나는 그녀의 눈에서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푸드 아르티장의 내공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이 되어가지만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에는 아직도 강한 영국인의 악센트가 남아 있다. 잼을 만들기 시작한 지 30년이 넘은 그녀는 버클리의 한가운데 자리한, ‘스틸 룸(Still-Room)’(정적이 깃든 고요한 방)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공방에서 잼을 만든다. 영국이 음식 문화에서 조소의 대상이 되던 시절 그녀는 잘 만든 잼으로 그 선입견을 깨고 싶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마멀레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난히 요리를 싫어한 그녀의 어머니도 1년에 한 번씩은 마멀레이드를 만들었고, 그녀의 아침 식탁에는 언제나 토스트와 마멀레이드 그리고 진하게 우린 홍차가 있었다. 또 정원 가꾸기를 좋아한 아버지와 유난히 친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제철 식자재를 저장하는 요리법을 배웠다고 한다.
16년간 수제 치즈를 만들어온 나에게도 예순을 넘긴 대선배인 그녀의 공방을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성당에 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창 바쁜 시기에도 2명 이상의 도움을 받지 않는 그녀는 과일을 닦고 깎는 일부터 시작해 모든 작업을 손으로 한다. 아직도 한 번에 10병(병당 250g) 이상을 생산하지 않으며, 농축된 과일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설탕 사용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 과일과 동량의 설탕을 넣는 고품질의 잼 생산 원칙과 달리, 적게는 과일 무게의 20%부터 최대 35%의 설탕을 사용한다. 복숭아같이 펙틴 함량이 적은 과일을 가공할 때조차 펙틴을 더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떻게 널리 알려진 원칙을 무시하면서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묻자 그녀는 그것이 30년 동안 노력해 얻은 자신만의 비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과일을 잘라 졸이는 모든 과정을 직접 손으로 작업한다.

파머스 마켓에서 ‘과일의 여왕(queen of fruits)’으로 알려진 그녀는 서서히 사라져가는 희귀종과 토종 과일의 재배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이를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된 맛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바삐 돌아와 정원을 가꾼 것처럼, 그녀도 잼 만드는 일과가 끝난 후 농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이웃을 돌아다니며 숨은 과일의 향기를 좇는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단순한 일, 과일에 설탕을 넣어 끓이고 병에 담는 과정의 연속이 그녀에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그녀는 30년 넘게 이 일을 기쁘게 해올 수 있는 이유는 잼을 만드는 일의 단순함과 소박함 그리고 정직성에 있다고 했다. 이런 기본적인 일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30년의 경험을 통해 조금 더 쉽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크게 웃었다.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 자신이 이제까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연말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몇천 개의 오렌지를 작은 칼 하나로 잘게 자르는 과정, 한 번에 2.5kg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일주일에 몇백 개 분의 냄비를 하나하나 가열하며 농도를 맞추는 과정, 아직도 완성한 잼을 작은 컵으로 병 하나하나에 붓고 입구를 닦은 후 손으로 뚜껑을 닫는 과정. 내가 그녀라면 과연 30년 후에도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까?

병에 담은 시판용 마멀레이드

그녀는 아직도 완벽한 농도로 조리해 원하는 질감과 향으로 완성한 잼을 볼 때 순수한 희열에 몸을 떤다고 했다. 거리를 걷다 다른 집의 정원에서 익고 있는 희귀한 과일을 보면 어떻게 저 과일을 저장할 수 있을까 생각하느라 목적지를 잊어버릴 때도 있고, 숲 속에서 야생 과일과 식용 식물을 발견할 때면 낯선 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난다고 했다. 식물을 사랑해 정원을 가꾸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이제는 자신이 가공하는 과일을 재배하는 모든 농부에 대한 애정과 존경으로 발전했다고, 그래서 그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면서 사랑하는 과일을 마치 애인의 이름처럼 불렀다. Red Cloud, Royal Blenheim Apricot, Arctic Queen White, May Pearl, Rose Bright Nectarine, Diamond Princess, Summer Sweet Peach….
마지막으로 집에서 잼을 만드는 독자들에게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주위에서 가장 좋은 과일을 발견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당부했다. 우리가 저장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일이 지닌 맛과 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에디터 이정주(프리랜서)
소영 스캔런(Soyoung Scan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