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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오로지 예술뿐

LIFESTYLE

로버트 모어랜드(Robert Moreland)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어떤 질문에도 허투루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차분하게 그리고 길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시아 첫 개인전을 위해 방한한 로버트 모어랜드를 만나기로 했다.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g.gallery에서 작품을 둘러보며 작가를 기다렸다. 형태는 간결하나, 작품을 보면 볼수록 갖가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작품의 빼어난 후처리를 보면서 예민한 예술가를 상상했고, 카메라 앞에서 모델처럼 자유롭게 포즈를 취하는 그를 보고는 거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그런 예상은 모조리 빗나갔다. 그는 따뜻하고 진지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는 확고하고 진실했다. 어쩐지 대화가 자꾸만 길어졌다.
로버트 모어랜드는 루이지애나 출신으로 로스앤젤레스 차이나타운에 스튜디오를 두고 있다. 올봄 ‘아트부산’에 등장하면서 국내에서도 팬층이 쌓이기 시작했지만, 주로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펼치는 그이기에 아시아에서는 아직 이름이 생소하다. 하지만 2016년 유망한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레마 호트 만 파운데이션 그랜트(Rema Hort Mann Foundation Grant)의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미국에선 인지도가 높은 작가다.
한국의 갤러리와는 인스타그램으로 인연을 맺었고, 10월 4일부터 7일까지 열리는 ‘키아프’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인스타그램은 페인트의 발명 이후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가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한국 관람객에게 제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 어떤 작가인지 보여주고 싶어서 되도록 많은 작품을 가져왔어요. 저는 한국의 미니멀리즘도 좋아하는데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국 문화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흥분됩니다.”
루이지애나주 남부의 한 가정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날 때부터 예술에 둘러싸여 자랐다. “어머니는 예술품 복원사, 아버지는 시인이었어요. 집에 어머니의 스튜디오가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에 노출됐죠.” 그렇다고 엘리트 미술 코스를 밟은 건 아니다. 의외로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친구들을 따라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에서 미술 강의를 들었고 주변에 많은 예술가 친구를 두었을 뿐. 교수들은 정식 학생이 아닌 그가 미술 강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한술 더 떠 그가 루이지애나를 떠나기 전 몇몇 교수가 초청 강연을 제안했을 정도다. “남들 다 있는 졸업장이 없는 만큼 저 자신을 더 몰아붙였어요. 오로지 미술을 향해 달렸고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미술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이 길뿐이었어요.”
처음엔 식당에서 요리하거나 나무 공방과 스테인드글라스 스튜디오에 몸담았으며 그러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간 어머니의 스튜디오에서 미술품 관리원으로 일했다. 처음엔 실수도 했지만 여러 재료로 실험하다 보니 점점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지금의 작품에 이르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복원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내며 생활 속에서 예술을 체득했어요. 스튜디오에는 풍경화와 초상화가 많았고 간혹 18세기 작품도 있었는데, 그때 전 그것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이 벽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뻗어나가길 바랐죠. 그러던 차에 리 본테쿠, 도널드 저드, 엘스워스 켈리, 솔 르윗의 입체적 작품을 보게 됐고 큰 감명을 받아 제 작품의 방향성을 정했습니다.”

특히 지금 같은 작품 세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이 있다. 바로 전시장 한쪽에 자리한 자그마한 크기의 갖가지 모형이다. 컬러도, 형태도 다양한 모형은 벽에 걸린 작품의 축소판 같다. “수년간 여러작업 방식을 시도하다 조그마한 마켓(모형)을 디자인하면서 작품 활동의 전환점을 맞이했죠. 여러 가지 마켓을 만든 다음 원하는 걸 골라 작품을 크게 확장하죠. 제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준 작업이에요.” 그렇다면 작업 과정은 어떨까? “사이즈를 재고 패널을 자른 후 제 손으로 캔버스를 짜요. 다 직접 해요. 복원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낡은 작품에 안감을 덧대곤 했거든요. 매일같이 오래된 캔버스를 나무틀에서 떼고 낡은 못 수천 개를 빼냈는데 지금도 비슷합니다. 저는 오래된 나무, 캔버스, 못을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도 작업할 때 그 세 가지를 사용하곤하죠.” 로버트 모어랜드는 ‘단순함(simplicity)’이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라고 말했다. 블랙과 화이트, 총천연색 그러데이션, 모노톤, 파스텔 톤, 강렬한 원색과 곡선, 직선, 사각형, 타원형 등 크기, 컬러, 형태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원색과 기본 도형을 절대로 놓지 않는다. 단순하고 명료한 것. 작품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컬러와 형태를 중시하는 그의 의도와 맞아떨어진다.
작품 제목이 ‘Untitled’로 시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에 파란 직사각형을 그렸다면 ‘Blue Rectangle’, 초록빛 도형 3개를 그렸다면 ‘Three Greens’가 붙는 제목은 작품만큼이나 명료하다. 그는 완벽한 제목을 지을 수 없다면 차라리 제목이 없는 채로 남기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다. “지금 같은 작품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작품에 들어맞는 제목을 붙이려고 쭉 노력했어요. 하지만 오히려 제목을 붙이면 관람객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돼요. 관람자가 작품을 통해 직관적 체험을 하길 바라죠. 제 작품은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아티스트로서 오래도록 커리어를 다져나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전시 계획도 촘촘하다. “The Hole NYC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고, 내년엔 잠시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업할 생각이에요. 코펜하겐, 시카고, 이스탄불,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를 앞두고 있거든요. 페어에 출품할 작품도 만들고 있어요. 또 개인적으로는 스튜디오에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거대한 프리스탠딩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Profile미국의 미니멀리스트 예술가 로버트 모어랜드는 The Hole NYC, 루이지애나 스테이트 뮤지엄, LA 더 쇼 아트센터, 뉴 올랜드 현대미술센터 등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했고, 프레더릭 R. 와이즈먼 컬렉션에 작품이 포함됐다. 서울 g.gallery에서 10월 20일까지 그의 개인전이 열린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