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직한 판화가의 듬직한 작업실
판화가 구자현은 2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국내 판화계에서 독보적 자리를 지켜왔다. 그 이면엔 경기도 양수리에 있는 작업실의 영향력이 자리한다. 작품의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구자현의 작업실을 찾았다.
양수리와 맞닿은 계곡에서 이어진 좁고 비탈진 길을 따라 한참 오르면 미술가 구자현의 작업실 겸 주택을 발견할 수 있다.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그의 작업실 겸 주택은 울창한 나무숲이 가까워 시원한 바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양평의 명당 중 명당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외관을 마감한 작업실은 정면에서 보면 2층이고, 낮은 언덕을 올라 건물 뒤편에서 보면 1층 같은 구조가 특징. 건물에 맞춰 억지로 땅을 다지기보다 최대한 자연의 생김새에 따라 건물을 재단한 듯하다.
구자현 작가는 우연히 건축가 최욱이 설계한 공간을 보고 마음에 들었는데, 마침 그의 아내가 지니 서 작가라는 걸 알게 되어 그에게 작업실겸 주택을 설계해달라고 의뢰했다. 미술가를 아내로 둔 건축가니 미술가의 공간을 잘 이해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업실 겸 주택이 단 몇 개월 만에 뚝딱 만들어진 건 아니다. 6개월이면 지을 수 있는 건물을, 구자현 작가는 작품 하나 팔릴 때마다 조금씩 자금을 모아 2년 6개월에 걸쳐 완성했다. 1층은 작업실, 2층은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공간인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어느덧 8년이 흘렀다.
앞마당에서 잠시 바람을 쐬다, 구자현 작가의 안내를 받아 1층 현관으로 들어서니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높이의 300호 목판화 작품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그는 양수리 작업실에 온 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20년 전 일기를 보니 ‘대형 판화를 빨리 제작해 전시하고 싶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넓은 공간이 아니면 이렇게 규모가 큰 작업을 하지 못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멀찍이 보기도 해야 하고, 만들어둔 작품들을 보관도 해야 하니까요. 공간은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죠.” 대형 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 더 큰 기계를 들이게 되고, 더 규모가 큰 작업을 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지사. 요즘 그는 건축을 공부하는 아들과 함께 마당 한쪽에 천장이 높은 작 업실을 하나 더 지으면 어떨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대형 판화 작업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도구
미술가 구자현의 판화는 어떤 색의 잉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그림이라도 전혀 다른 오라를 내뿜는다
구자현 작가는 건축가 최욱의 아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두말없이 그에게 자신의 작업실 설계를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아내를 둔 건축가라면 작가의 작업실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구자현 작가는 주로 서양의 전통 회화 기법인 템페라와 판화를 선보이는 현대미술가다. 특히 젊은 시절부터 판화 작업에 따르는 ‘고된’ 느낌을 즐겼다. 어떤 작품이 나오느냐 하는 결과보다 어떤 노력을 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겼고, 그것이 작가의 존재 이유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판화에 흥미를 느낀 1980년대 초반 국내엔 판화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인기 장르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판화가 발달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80년대 말 일본에서 8년 동안 판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는 그야말로 판화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독보적 존재가 됐다.
그가 미술가의 삶을 걸어온 지 어느덧 20여 년. 그는 미술가가 살기엔 척박한 국내 환경에서 이제껏 버텨온 자신이 대견하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1988년 홍익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판화과가 생겼어요. 1995년엔 판화 미술의 수준을 높이고 국내 판화가들을 독려하기 위해 서울판화미술제도 개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대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판화가는 아주 적죠. 왜일까요? 작업 과정이 상당히 고되어서 젊은이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에요. 국내엔 판화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화랑이나 큐레이터가 부족하기도 하고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존재해야 국내 미술 환경이 더욱 풍성해질 텐데 말이죠.” 그는 더불어 판화 미술을 빙자한 복제 미술품 시장의 활기로, 농부처럼 정직한 땀을 흘린 작가들의 노동이 허무해지는 것 같다며 국내 미술 시장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소처럼 우직하다. 작품에 쓸 최고 품질의 종이와 잉크를 구하기 위해 주문 제작에만 반년이 넘게 걸리는 영국, 프랑스, 뉴욕, 일본 등지의 회사에서 수년째 미술 재료를 구하는가 하면, 작품에 사용하는 물감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페인트 전문 회사의 연구소에 연구를 부탁하기도 했다. 심지어 캔버스 테두리에 쓰는 못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에서 공수해온 스테인리스스틸 못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판화가 재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작업인 만큼 이를 다루는 미술가는 까다롭고 지독해질 수밖에 없다.
경기도 양수리에 위치한 구자현 작가의 작업실 겸 집. 건축가 최욱이 설계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1층 작업실 공간
1층 작업실로 들어오는 문 바로 옆 계단을 오르면 구자현 작가와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 나온다. 그의 아내 장유희, 반려견 비비와 심바가 주로 머무는 곳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만든 아일랜드 테이블, 가족 식탁, 소파 등이 놓인 거실과 작은 주방이 2층의 주요 공간이다. 길게 뻗은 복도 오른편엔 부부 침실과 아들딸의 방이 있는데, 그 공간에 채운 가구도 모두 예사롭지 않다. 부부가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제주도에서 산 반닫이, 어머니의 친구가 물려준 작은 책상, 딸이 어려서부터 사용한 침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개장 등 모든 가구엔 각각의 사연이 숨어 있다.
판화 작업을 위한 인쇄 기계와 완성한 작품이 충분히 마를 수 있도록 만든 거치대
추상적 형상을 표현한 그의 템페라와 판화 작품
1층 작업실이 구자현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면, 2층 주택 공간은 아내의 취향과 가족의 역사가 묻어나는 곳이다. 작업실과 주택이 붙어 있으니 무엇보다 좋은 점은 원할 때 언제든 작업하고 배가 고프면 2층에 올라가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어른 팔뚝만 한 길이의 끌을 이용해 대형 목판화 작업을 할 때면 말도 못하게 힘든데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밥심 덕분이라고.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형 작품은 절대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모든 공을 아내에게 돌린다. 거실 테이블 옆에서 따뜻한 차와 다과를 챙기던 그의 아내는 집안의 가장이 우뚝 서야 아 이들도 바르게 자란다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말한다.
구자현 작가의 아내로서 곁에서 그를 살뜰히 챙겨온 아내 장유희는 사실 서양화를 전공하고 남편과 함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미술 작가다. 한때 대학 강의를 나가며 작품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형편에 자신까지 캔버스를 펴는 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남편이 작업에 몰두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한 데다 특히 판화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꿈을 접었단다. “예술가는 하늘이 내려야 하는 것 같다”며 남편은 그야말로 천생 작가이기 때문에 자신은 내조를 선택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구 작가는 서울에서 양수리로 주거지를 옮기며 건강한 생활과 취미가 생겼다. 팔당 생활협동조합에서 장을 보는 소소한 재미와 이웃에게 배운 막걸리 제조가 그것이다. 토마토 하나, 상추 하나를 사더라도 팔당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한다. 인근에 상수도 구역인 팔당댐이 있어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유기농 식자재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막걸리를 위한 누룩도 직접 만든다. 현재 유학 중인 아들 방은 누룩을 숙성시키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쌀막걸리, 현미막걸리, 보리막걸리 등 맛도 수준급. 단맛이 전혀 없고 시큼털털하면서도 뒷맛이 깔끔하다. 막걸리 만드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그의 아내는 “취미 생활도 작업할 때 모습과 어쩌면 그리 같은지 막걸리를 만들기 위한 재료 준비와 과정도 매우 정확하다”며 가끔은 왜 저리 힘들게 사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단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빠르고 쉽게 흘러가는 요즘, 미술가 구자현은 그런 세상의 흐름에 역행이라도 하듯 그 누구보다 천천히 한길만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작품과 도구가 한데 모여 있는 작업 공간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글 박은영(프리랜서) 사진 이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