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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에서 만난 피에르 위그

ARTNOW

1962년 파리에서 태어난 피에르 위그는 1990년대 초반,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후 20여 년 동안 ‘시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파격적인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 프랑스 국립 퐁피두 센터는 위그의 회고전을 열어 그의 탁월한 예술성을 집중 조명 했다. 이 전시는 올해 독일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 (4월 11일~7월 13일)에 이어 11월 23일부터 내년 3월 8일까지 미국의 로스앤 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순회 전시를 앞두고 있다.

현대미술의 역사가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는 참신함으로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실천의 연속이었다면,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당대에 그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해내고 있는 미술가 중 한 명이다. 위그는 작품의 개념과 형식뿐 아니라 전시의 구성 방식에서도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기로 유명하다. 그 배경에는 현대 철학과 이론을 섭렵한 작가의 노력과 국립 장식미술학교 재학 시절 세트 디자인, 판화, 사진, 공연, 영상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교과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광범위한 매체로 구현할 수 있게 된 훈련이 뒷받침하고 있다.
위그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전시가 작업의 최종 결과물을 보여주는 행사가 아니라 전시 자체가 작업의 연장이자 미래의 작품을 위한 단초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번 회고전도 보통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초기작, 인기작, 후기작 또는 최근작으로 나누는 기존의 형식을 완전히 탈피해 위그가 초창기부터 천착한 ‘시간성’이라는 주제를 강화한 특별전 형식을 취했다.
우선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통로에서 검은색 카펫이 관람객을 맞는다. ‘카페팅 (Carpeting)’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루트비히 미술관의 행정동 건물에 깔려 있던 실제 카펫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낡은 카펫 위에는 그동안 사람들이 걸어 다닌 경로가 시간과 함께 닳아 마치 흰색 길 같은 자국으로 남았다. 루트비히 미술관의 시공간적 흔적을 담은 이 오브제는 마치 전시장 앞에서 “위그의 전시를 개최하는 세 곳 중, 여기는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듯한 상징성을 띤다. 아울러 평소 무심코 지나치는 통로를 어엿한 전시 공간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위그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공간을 보여준다. ‘카페팅’을 지나 전시실 입구에 다다르면 안내 요원이 입장하는 관람객의 이름을 묻는다. 그러고는 전시실을 향해 관람객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위그의 퍼포먼스 작품 ‘이름 안내원(Name Announcer)’이다. 그렇게 관람객은 전시실 안에 있는 관람객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그때부터 전시의 일부가 되는 것. 익명의 관람객으로 전시를 감상하던 우리의 통상적 미술관 경험을 뒤집고 관심의 초점을 작품 자체에서 작품과 관람객의 관계, 관람객의 상호 관계로 돌린 작업이다.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Pierre Huyghe, Exhibition view, Pierre Huyghe, Museum Ludwig, Cologne, Germany, April-July 2014

전시실 내부는 조금 어둡고 동선이 복잡한 편이다. 벽에 어떤 설명문도 없어 텍스트에 의지하지 않고 빛, 소리, 공간의 물리적 구조 등을 따라가며 각자의 감각과 본능으로 전시를 보게 된다. 작품은 주로 영상이지만 수족관, 아이스링크, 정원, 벌집, 돌아다니는 개, 수증기 등 다소 당황스러운 매체도 있다. 특이한 점은 전시의 관람 동선을 통제하는 이 칸막이 벽들이 퐁피두 센터에서 위그의 회고전 바로 직전에 개최한 마이크 켈리(Mike Kelly) 전시의 가벽이라는 것. 즉 위그의 이번 회고전은 켈리의 퐁피두 특별전을 기반으로 그 위에 자신의 전시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전시 장소를 옮겨도 여전히 켈리 전시의 잔재가 위그 전시의 관람을 안내하는 지침이 되면서 그 위로 위그의 지난 20여 년간 작업과 새로운 개입이 켜켜이 중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각기 다른 시간대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한순간, 한 점에서 수렴되며 ‘영원한 지금’을 깨닫게 되는 것이 위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이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시간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올 수 있다”고 보는 작가의 위상수학주1적 시간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위그는 활동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이 주제를 담은 작품을 발표해왔다. 전시장 벽에 넓적한 구멍을 뚫고 그 밑에 숨은 겹겹의 페인트 단면을 통해 전시장의 역사를 드러내는 ‘시간 기록자(Timekeeper)’(1991년), 중생대부터 지구 상에 존재한 소라게가 20세기 조각 거장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자는 뮤즈(Sleeping Muse)’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주드람 4(Zoodram 4)’ (2011년) 등 자연, 과학, 역사와 문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시공간을 재구성하는 위그의 능력은 단연 탁월하다. 위상수학적 시간에 대한 관심은 2005년 위그를 남극에까지 가게 만들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쥘 베른의 19세기 과학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위그는 남극에 살고 있다고 알려진 희귀한 알비노 펭귄(Albino Penguin)을 찾아 탐험을 떠났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한 뮤지컬 형식의 영상 작품 ‘존재하지 않는 여행(A Journey That wasn’t)’(2005년)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선보였는데, 이 작품은 전시실 꼭대기에 위치한 방에서 전시의 클라이맥스로 상영됐다. 시간과 공간,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 작품은 원래 위그가 2002년 발표해 이번 회고전에도 출품한 ‘반짝이는 탐험(L’Expédition Scintillante)’ (2002년)이란 작품을 시나리오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 밖에 비물질적 개념 작업인 ‘해방된 시간협회(L’Association des Temps Lbiérés)’도 주목할 만하다. 위그의 작업 중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룬 초석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1995년 위그가 <도덕적 미로(Moral Maze)>라는 그룹전에 참여한 동료 작가들과 함께 조직한 이 협회는 전시를 작업 과정의 종점이 아닌 협업의 출발점으로 삼기로 하고 이후 많은 활동을 같이 했다. 특히 위그는 이 협회의 활동을 통해 현대사회의 진정한 자유 시간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다. 업무 시간의 반대가 아니라 완전히 비생산적인 시간 말이다. 이후 그가 작품에서 휴가, 방학, 테마파크, 게으름 같은 개념을 자주 다루고 태곳적부터 존재했거나 오지에 서식하는 생물의 생태를 관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마도 위그의 작업은 시간에 대한 탐구를 매개로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긴 여정인지도 모른다.

주1
유클리드기하학에서는 그 형태를 변형시키지 않고 선형적 이동에 의해 겹쳐지는 두 도형을 같다고 인식하는 반면, 위상수학에서는 도형을 구부리고 늘이고 줄이는 것 같은 변형을 통해 같은 형태로 만들 수 있을 때,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유승은(Sey Artnet 대표) 사진 제공 에스더 시퍼 갤러리, 피에르 위그, 마리안 굿맨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