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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또 다른 얼굴, 작품 The Shilla Seoul & The Shilla Jeju

ARTNOW

최고급 호텔은 유명 작가의 작품을 공간 디자인에 적극 활용해 그들만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국내 최고 호텔로 꼽히는 신라 호텔에는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이 놓여 있을까? 놓인 장소에 따라 감상법도 여러 가지다.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전문 전시 공간 다음으로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은 호텔이다. 국내 최고의 호텔들은 호텔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로비나 레스토랑 등의 공간에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해 호텔의 품격을 높이고 공간을 돋보이게 한다. 흰 벽만으로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화이트 큐브 전시장이 아니라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모르고 지나치기엔 아쉬운 훌륭한 작품이 아주 많다. <아트나우>가 첫 번째로 소개할 곳은 신라 호텔이다.

THE SHILLA SEOUL

한국의 전통을 이상적으로 재해석한 현대적 디자인을 추구하는 서울 신라 호텔의 디자인 키워드는 ‘시대를 아우르는 모던함(timeless modern)’이다. 호텔 곳곳을 장식한 미술품에서도 이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한국적 정신을 현대 회화로 표현하는 박서보, 정상화, 서세옥을 비롯해 현대미술 거장 피카소와 톰 웨슬먼, 리처드 세라, 에릭 올 등의 서구 현대미술 작가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동서양을 초월한 유명 작품이 공간의 특색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서울 신라 호텔의 로비를 장식하고 있는 설치 작가 박선기의 샹들리에 작품 ‘조합체’

1층 뷔페 레스토랑 더 파크뷰 내에 걸린 빌 톰슨의 ‘Bean’

2층 더 라이브러리 내를 장식한 피카소의 판화작품

김홍주 작가의 회색 톤이 감도는 꽃 작품 ‘무제’

로비에서 만나는 화려한 샹들리에
일단 호텔 로비에 들어서면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은 설치미술가 박선기의 ‘조합체’다. 로비 천장에서 떨어지는 샹들리에 형태로, 투명 나일론 와이어에 매달린 수만 개의 아크릴 비즈가 공기의 움직임에 따라 빛을 반사하면서 공간에 화려한 생동감을 더한다. 이 작품은 매년 새로운 디자인으로 설치하는데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레드 컬러의 포인트를 더한다고. 고객의 호텔 인증 사진 배경으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워낙 높이 매달려 있어 1층과 2층에서 보는 뷰가 확연히 다르니 두 곳에서 각각의 뷰를 꼭 확인할 것! 좀 더 규모가 작은 박선기의 설치 작품을 1층 더 파크뷰로 들어가는 길목 오른쪽에 설치해 샹들리에 작품과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로비 오른쪽 엘리베이터 입구 양쪽 벽면에는 김홍주의 꽃 그림 ‘무제’ 2점이 걸려 있다. 꽃을 주제로 한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차분한 회색 톤이 감도는 색감으로, 마냥 예쁘게만 보일 수 있는 꽃이 모던한 인상을 준다. 로비에서 처음 만나는 이 ‘반짝이는 것’과 ‘꽃’만큼 ‘환영’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두 작가의 작품을 지나치면 아무리 우중충한 날씨에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로비를 한국 작가 중심으로 구성했다면 1층의 뷔페 레스토랑 더 파크뷰와 바 & 라운지 더 라이브러리에서는 외국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더 라이브러리의 프라이빗 룸에는 20세기 현대미술 거장 피카소의 판화 8점이 몇 점씩 걸려 있다. 룸 안으로 들어서면 어두운 조명에 모던한 인테리어 공간과 어우러진 앤티크 액자의 피카소 판화 덕분에 마치 유럽의 사교 모임 공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뷔페 레스토랑 더 파크뷰는 빌 톰슨의 ‘Pomodoro’가 글로시한 질감의 입체감 있는 덩어리로 벽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블랙의 힘 있는 선으로 구성한 톰 웨슬먼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는 레스토랑에 강약을 더해주는 것도 주목해야 할 부분.

2층 중식당 팔선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 정상화의 ‘무제’

아시아 퀴진과 어울리는 단색화
중식당 팔선과 일식당 아리아께가 자리 잡은 호텔 2층은 아시안 퀴진의 영향인 듯 다른 곳에 비해 동양적 감성을 담은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다. 2층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한국 모노크롬 회화의 대표주자 박서보의 ‘묘법’이 우리를 반긴다. 흰색에 가까운 박서보의 ‘묘법’이 검은색 벽에 걸리는 것은 드문 조합인데, 그 덕분에 작품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듯하다. 팔선 입구에는 역시 모노크롬 계열 작가인 정상화의 작품이 걸려 있다. 정상화 작가는 지난 7월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후 화랑과 컬렉터의 관심이 더욱 높아진 작가다. 얼핏 단조로워 보이지만 캔버스에 고령토를 바르고 말린 후, 캔버스를 접어 균열을 만들고 금이 간 고령토 조각을 뜯어낸 다음 아크릴 물감을 칠하는 과정을 거친, 엄청난 공이 들어간 작품으로 인내와 끈기가 내재된 한국적 미감을 함축하고 있다. 팔선의 카운터 옆 벽면은 한국의 명품 백자 브랜드로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품으로 전시하기도 한 박영숙 요에서 만든 백자로 구성했다. 백자의 재료가 고령토인 것을 생각하니 어쩌면 백자 빙열(氷裂)의 회화적 형태가 앞서 본 정상화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23층 한식당 라연에 걸린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

23층 프렌치 레스토랑 콘티넨탈 입구에 걸린 다니엘 브라이스의 ‘무제’

콘티넨탈 실내를 장식한 리처드 세라의 판화 작품과 그것에서 모티브를 받은 듯한 원형 고리 모양의 조명이 인상적이다.

리처드 세라를 감상하는 방법 하나
서울 신라 호텔의 꼭대기 층인 23층에 기존의 프렌치 레스토랑 콘티넨탈 외에 최근 한식당 라연과 이그제큐티브 라운지가 새롭게 들어섰다. 공간적으로 대칭 구조를 이루는 콘티넨탈과 라연은 디자인 컨셉도 다르다. 콘티넨탈은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인 반면, 라연은 남성적이고 직선적인 분위기. 콘티넨탈의 프라이빗 룸에는 초대형 강철 조각으로 유명한 리처드 세라의 판화 작품 ‘Bright Series’ 8점이 걸려 있다. 작품의 원형 모티브를 활용해 디자인한 조명과도 잘 어울린다. 신기한 건 식사할 때 와인잔에 원형 조명의 빛이 반사돼 리처드 세라의 작품과 비슷한 원형 고리들을 만들어낸다는 사실.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작품 감상의 묘미다.
한식당 라연의 프라이빗 룸에는 한국의 서예를 현대미술로 승화시킨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이 걸려 있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먹선으로 춤추는 사람들을 격자 형태로 추상화한 작품이다. 23층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레노베이션 후 새로 생긴 이그제큐티브 라운지. 작은 판화나 도자기 작품 외에도 순수 미술, 디자인, 인테리어, 건축, 패션, 브랜드 등 분야별로 엄선한 아트 북 600여 권이 라운지 곳곳의 책장에 꽂혀 있어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다. 남산의 서울N타워 등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23층 이그제큐티브 라운지에서 원하는 아트 북을 골라 티타임을 즐기는 것도 좋을 듯.

서울 신라 호텔 정문에 들어서면 세키네 노부오의 ‘무지개’가 고객을 맞는다.

분수 & 조각공원
이 밖에도 서울 신라 호텔에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곳곳에 많은 미술 작품이 숨어 있다. 특히 야외에서는 다양한 조각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호텔 앞 분수는 일본 조각가 세키네 노부오의 작품 ‘무지개’로 중앙에서 만나는 시원한 물줄기는 동서양의 연결을 상징한다. 영빈관 뒤편에는 4만m2의 녹지대에 야외 조각공원을 조성해 김정숙, 김창희, 백현옥, 조성해, 유영교, 이종각 등 유명 작가의 조각 20여 점을 설치했다. 상대적으로 고객의 발걸음이 뜸해 도심 속에서 혼자만의 여유롭고 평온한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 적격인 곳이다.

THE SHILLA JEJU

제주 신라 호텔 역시 서울 신라 호텔 못지않은 훌륭한 컬렉션을 자랑한다. 서울 신라 호텔이 로비의 샹들리에 설치 작품으로 화려하면서도 모던한 분위기를 풍긴다면, 제주 신라 호텔은 자연을 주제로 한 한국 중견작가의 작품을 설치해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주는 아늑함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제주에서 만날 수 있는 작가는 김창열, 김홍주, 안병석, 이왈종, 최종태, 방혜자, 유영국, 이강소 등의 한국 현대미술 중견작가와 아르망, 달리 등의 해외 유명 작가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겸비한 작가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

보리밭 화가로 유명한 안병석 작가의 작품 ‘바람결’

3층 식당가에 걸린 박영남 작가의 ‘고흐&몬드리안의 합작 2’

제주도에서 20년 넘게 제주의 생활을 그리고 있는 이왈종의 ‘생활 속의 중도’

6층 로비에서는 최종태 작가의 조각 ‘얼굴’을 감상할 수 있다

자연을 그리다
로비인 6층에는 15점 내외의 작품이 걸려 있다. 꽃을 그리는 화가 김홍주의 ‘무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배경을 과감히 생략한 채 정교한 세필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려 화폭을 가득 채운 꽃 한 송이는 꽃잎 하나하나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서로 다른 색감의 벽에 걸린 핑크색과 연두색 2점의 꽃 그림은 흰 기둥을 사이에 두고 공간에 잔잔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김홍주의 ‘무제’ 옆에는 보리밭 화가로 알려진 안병석의 ‘바람결’ 2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생명력이 절정에 이른 여름의 푸른 들판이고, 다른 하나는 가을빛이 완연한 갈색 들판이다. 대비되는 계절감의 두 작품 모두 바람이 들판이라는 자연을 캔버스로 그려낸 아름다운 시각적 선율을 보여준다. 제주도의 들판과 바람, 자연을 떠올리게 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작품인 듯하다.

제주의 작가들
제주 신라 호텔에는 제주도와 연관 있는 작가의 작품이 다수 걸려 있다. 바로 김창열과 이왈종의 작품이다. ‘물방울’ 시리즈로 유명한 김창열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우리나라 대표 화가로 해외 경매 리스트에도 자주 오르는 유명 작가다. 1960년대에 박서보, 하인두 등과 앵포르멜 운동을 이끈 그는 1972년부터 40여 년 동안 물방울만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물방울은 가까이서 보면 사실적이진 않지만 제소(gesso, 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그렸기 때문에 조금만 거리를 두고 감상해도 마치 물방울이 실제로 캔버스에 방울방울 맺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톡’ 하고 터지거나 흐르거나 공기 중으로 날아가 없어질 물방울은 존재와 부재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담고 있는 동시에, 작가가 스무 살 무렵 겪은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자신을 정화하는 의미를 지닌다. 김창열 작가는 한국전쟁 당시 1년 6개월 정도 머무른 제주를 지금도 ‘제2의 고향’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작년 4월 그의 작품 200여 점을 제주도에 기증했고, 이를 계기로 2016년 김창열제주도립미술관이 완공 예정이다. 이왈종도 제주도 작가로 유명하다. 1991년 제주도로 훌쩍 떠나 20년 넘게 ‘생활 속의 중도’라는 단일 명제로 집과 산, 배, 나무, 꽃, 새, 물고기 등을 제주도의 밝은 색으로 표현하고 있다. 3층 연회장 쪽에 걸린 이왈종의 작품에선 작가가 제주도라는 보물섬에서 발견한 행복의 원천인 자연과의 교감, 생의 즐거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작품을 좀 더 보고 싶다면 서귀포에 위치한 왈종미술관을 둘러보길 권한다.

제주에서 보는 아르망과 달리
마지막으로 제주 신라 호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해외 작가의 작품은 로비 라운지 양쪽에 위치한 조각 작품, 살바도르 달리의 ‘우주 비너스(Space Venus)’와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무희(Bayadera)’다. ‘우주 비너스’는 달리가 1977년부터 1984년에 걸쳐 완성한,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육체를 통해 신성성이 아닌 유한한 인간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작품이다. 조각에 새긴 녹아내리는 시계는 육체의 아름다움이 일시적으로 유한한 것임을 보여주고, 허리 부분의 두 마리 개미는 이 육체가 곧 썩어 없어질 거라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반대로, 잘린 골반 부분에 놓인 금빛 달걀은 생명과 부활, 미래를 상징한다. 한마디로 이 조각은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공존하는 우주’를 표현한 셈이다. 아르망은 달리만큼 한국 사람에게 유명하진 않지만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누보레알리즘 (신사실주의)을 대표하는 작가다. 특히 현대 소비사회가 생산해내는 사물에서 영감을 받아 폐품을 활용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는데, 악기를 분해하거나 부수어 만든 작품이 유명하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방소연(갤러리플래닛 큐레이터) 사진 김춘호